세영이 떠나는 걸 바라본 진희도 자리를 떠났다.
정신을 잃었던 호진도 얼마 뒤 깨어나 돌아갔다.
아무도 남지 않은 자리.
숨어있던 한 남자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다은의 의뢰로 세영의 뒤를 밟고 있었다.
도겸이 관심을 보이고 있는 여자가 누군지 찾아오는 것이 그녀의 의뢰였다.
다은은 이름은커녕 아무런 신상 정보 없이 찾아내라는 말만 뱉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하는 수 없이 남자는 방송국에 숨어들어, 도겸의 핸드폰을 몰래 꺼내 보는 등의 노력을 들여야만 했다.
그렇게 찾아낸 도겸과 연락하는 단 한 명의 여자가 세영이었다.
“이거야 원. 우연히 안 좋은 장면을 보고 말았네.”
남자는 모자 위로 머리를 긁적였다.
“우리 의뢰인분이 알게 되면 또 굉장히 히스테리를 부리겠는데.”
곤란한 것처럼 중얼거리면서도, 남자는 히죽 웃고 있었다.
입꼬리가 올라가자 볼에 난 흉터가 우그러졌다.
다은이 또 짜증을 낼 걸 생각하면 번거로운 일이었다.
“그래도 나는 맡은 바 일을 해야지. 아무렴.”
하지만 이 사실을 알려주면 분명 돈벌이가 될 것이다.
남자의 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콧노래를 부르며 남자는 마지막으로 자리를 떴다.
빈자리엔 차가운 바람만 불어왔다.
*
학교를 떠난 네 사람은 저녁 식사를 하러 자리를 옮겼다.
아직 밥을 먹기엔 이른 시간이었다.
그렇지만 도겸, 미연, 승완은 바쁘게 일하느라 제대로 먹질 못해 배가 고팠고, 세영은 세영대로 신경 쓸 것이 많아 점심을 거른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도겸과 승완이 자주 가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그 과정에서 세영은 승완의 말이 마냥 허풍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미연이 운전하는 차는 굉장히 빨랐다.
세영은 미연에 대한 인상을 ‘친절하고 상냥하신 분’에서 ‘베스트 드라이버’로 재정의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한적한 곳에 위치한 이탈리안 컨템포러리 레스토랑이었다.
그들의 방문에 익숙했는지, 직원은 그들을 반갑게 맞이한 뒤 룸으로 안내했다.
혹시나 직원들이 도겸과 자신의 관계를 궁금해하지는 않을까.
룸인 덕분에 사람들이 알아볼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겠다.
세영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미연이 속삭였다.
“여긴 스태프들이랑 자주 들러서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걱정하는 걸 눈치챘구나.
세영은 미연에게 감사하다고 말하며 살짝 웃어 보였다.
“아구 귀여워.”
몇 살 차이도 나지 않는데 세영이 마냥 귀엽고 맘에 들었는지, 미연은 세영에게 굉장히 친절했다.
자연스럽게 한쪽에는 도겸과 세영이, 그리고 반대편에는 승완과 미연이 자리하게 되었다.
능숙하게 음식을 주문하고, 승완이 물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어떻게 알게 된 거예요?”
호기심 가득한 눈빛에 세영은 마시던 물을 꿀꺽 삼켰다.
“어……. 두 사람이라면…….”
“당연히 도겸이랑 세영 씨죠.”
뭘 묻냐는 식으로 승완이 어깨를 으쓱였다.
역시나 저랑 도겸인가. 살짝 부담스러워진 세영은 딴 얘기를 했다.
“그, 두 분 다 저보다 연상이신데, 말씀 편하게 하세요.”
“먼저 그렇게 말한다면 그럴까? 그래서 어떻게 만났어?”
그 말에 미연이 웃으며 말했다.
그녀도 궁금했는지, 턱을 괴고 세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영은 곤란했다.
도겸이 얘길 안 한 걸 봐선 별로 얘기하고 싶었던 게 아닌 것 같은데.
흘끔, 승낙을 구하듯 도겸을 바라보았다.
식전 빵을 뜯어먹고 있던 도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도 돼.”
조금은 화가 누그러졌는지,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이 자식, 나나 누나한텐 절대 말 안 할 것처럼 굴더니. 태도 확 바뀌는 거 봐라. 어이없네.”
승완은 기가 차서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도겸은 무시로 일관했다.
세영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도겸이, 아니 도겸 씨가 제 이모 요리 학원에 등록해서, 거기서 만나게 됐어요.”
“요리 학원?”
의외라는 듯, 미연이 눈을 깜박이며 되물었다.
“네. 저희 이모가 전통음식 전문가셔서 몇 번 방송에도 나오시고 그랬거든요. 한 방송에서 도겸 씨랑 알게 돼서. 그 인연으로…….”
“아무리 그래도 너무 의왼데? 네가 집에서 뭘 해 먹기도 해?”
“아니 너희 집에 조리 도구가 존재하기는 해?”
미영과 승완이 경악에 찬 눈빛으로 도겸을 바라봤다.
그리곤 피식 웃었다.
세영도 두 사람의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이 이해가 됐다.
요리는커녕. 계란프라이를 할 때 기름을 둘러야 하는 것도 몰랐던 그다.
그랬던 그를 생각하면 전혀 이상한 반응이 아니었다.
“그 정도는 있어. 오버하지 마.”
부끄러운지 도겸이 투덜거렸다.
자신과 친한 사람들과 있을 때의 도겸은 이렇구나.
세영은 도겸을 살짝 훔쳐보았다.
“아니, 그래도 좀 신기하잖아. 아무리 세영 씨 이모님과 면식이 있었다고 해도. 그냥 한 번 들리는 게 아니라 요리 학원에 등록을 했다고? 무슨 바람이 들었길래?”
나름 합리적인 의심이라고. 미연이 주장했다.
그러자 한술 더 떠, 승완이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세영 씨 만나려고 했던 거 아니야?”
“에이, 설마.”
그러고 보니.
세영은 예전에 연숙에게서 들었던 얘기가 생각났다.
촬영 중 연숙과 만난 도겸이 자신의 사진을 보고 한 번 찾아 봬도 되겠다고 물었었다고.
그걸 보고 아 너한테 관심이 있나 보다 싶었다고, 연숙이 그랬다.
그 이후에 도겸에게 거짓말한 걸 화내느라 진짜냐고 물을 기회는 없었지만 말이다.
“…….”
화낼 법도 한데, 도겸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미연의 승완이 눈을 반짝이며 그가 대답하길 기다렸다.
그의 대답이 궁금한 건 세영도 마찬가지였다.
정작 도겸은 대답할 생각이 없었다.
무시하면 결국 미연과 승완도 포기할 터였다.
하지만 세영도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도겸은 미치겠는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툭 내뱉었다.
“그래. 그랬다 왜.”
“어머, 어머, 어머. 대애박.”
“세영 씨 보자고 민도겸이 생전 안 하던 요리 학원엘……!”
승완과 미연은 입을 틀어막고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세영은 얼굴에 열이 올랐다.
도겸도 별반 다르지 않았는지 살짝 보이는 뺨이 붉었다.
시끄러운 반대편과 달리, 두 사람 사이엔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어깨 간 가까운 거리가 갑자기 의식됐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미지를 의식해서인지 언제 법석을 떨었냐는 듯 차분하게 돌아온 승완이었다.
직원들이 주문한 음식을 서빙하기 시작했다.
향이 좋은 제철 나물과 조갯살이 들어간 오일 파스타, 해산물이 들어간 로제 리조또, 한우 채끝 스테이크 등등…….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의 향연이었다.
직원들이 사라지자 승완과 미연의 수다가 다시 시작됐다.
“일부러 접근하려고 요리 학원에 등록했다니 민도겸 음흉해.”
“근데 세영 씨를 어떻게 알고 만나러 갔던 거야? 그 전에 뭐 만난 적이라도 있어?”
이상함을 깨달은 미연이 질문했다.
그건 세영도 궁금했던 질문이었다.
자신의 사진을 보고 직접 찾아 봬도 되냐고 했다니, 핸드폰 사진을 보고 첫눈에 반하기라도 한 건지.
차마 직접 묻기에는 부끄러웠는데.
세영은 음식을 먹는 데 정신이 팔린 척하면서도 귀를 기울였다.
도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 전에 학교에서 마주친 적이 있어.”
응?
세영은 먹느라 바쁜 시늉을 하던 것도 잊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도겸을 바라보았다.
곧장 도겸과 눈이 마주쳤다. 느리게, 도겸이 이어 말했다.
“얜 다 잊어버린 것 같지만.”
그렇게 말하는 도겸의 표정은 어딘가 짓궂었다.
정말 그랬다.
세영은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도겸을 학교에서 만난 적이 있는가.
자신의 기억을 찬찬히 되짚어 봤지만, 검색 결과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언제? 마주친 적이 있다고? 알려줘.”
“싫어. 안 알려줄 거야.”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세영이 물었지만 도겸은 알려줄 생각이 없었다.
적어도 구경꾼 두 사람이 있는 곳에서 말하고 싶진 않았다.
세영이 몇 번 더 물어봐도 도겸은 단호했다.
그래. 기억 못 하는 사람이 죄인이지.
세영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두 사람의 모습을 승완과 미연이 흐뭇하게 바라봤다.
* * *
음식은 맛있었고 분위기는 유쾌했다.
식사가 끝난 뒤 미연의 차를 다시 탔다.
세영을 그녀가 묵고 있는 호텔로 데려다주기 위함이었다.
호텔 앞에서 세영은 미연 그리고 승완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특히 미연과는 짧은 시간 동안 아주 친해져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도겸도 자연스럽게 세영을 따라 내렸다.
두 사람이 내린 차 안, 보조석에 앉아있던 승완이 말했다.
“나 민도겸 저런 모습 처음 보는 거 알아요? 여자에 하도 관심이 없어서 신기했는데 이런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존대를 반쯤 섞어 말하는 승완에게 미연도 동조했다.
“진짜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누구 좋다고 열정을 불태워 그 먼 거릴 찾아가고, 요리 학원엘 다니는 민도겸이라니. 어색해서 죽을 것 같아.”
“오늘 계속 세영 씨 챙기는 거 봤어? 그 모습이 생각보다 자연스러워서 더 어색해. 으.”
소름 끼친다는 듯 손가락을 오므리는 승완에 미연이 호탕하게 웃었다.
정면을 주시한 채로, 미연이 말했다.
“그래도 나 세영이 마음에 들어. 예쁘고. 착하고. 오늘 어찌나 귀엽던지 내가 다 반하겠더라. 정말 도겸이가 반할만 한 것 같아.”
씨익 미소 짓고 있는 미연을 승완이 바라보았다.
“누나도 예쁜데.”
“뭐라고? 못 들었어.”
슬쩍 본심이 튀어 나와버렸다.
순간 당황스러웠지만, 다행히도 지나가는 차 소리에 승완의 진심은 묻혀버렸다.
아니, 다행이 아닌가.
승완은 복잡한 마음으로 밉살맞게 말했다.
“누나도 좀 본받으라고.”
“진짜 너 그러다 오늘 황천길 드라이브하는 수가 있다.”
이 악물고 말하는 미연에 승완이 기겁했다.
“아냐, 아냐. 누나는 지금 이대로 완벽하지. 제발 여기서 더 난폭하게 운전하진 말아줘!”
“늦었어.”
미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액셀을 밟았다.
더 낼 속도가 있었는지, 도로를 달리는 차들 사이를 요리조리 피하며 계속해서 빨라졌다.
승완은 기겁하며 창문 위 손잡이를 생명줄처럼 움켜쥐었다.
“으아악! 내릴래! 나 내릴래!”
도로 위, 승완의 비명만 울려 퍼졌다.
*
한편 세영은 자신을 따라 내린 도겸에 당황하고 있었다.
“너 왜 내렸어?”
“왜 내리냐니. 내리면 안 돼?”
오늘따라 삐딱한 도겸의 말에 세영은 더욱더 당황스러워졌다.
“아니 그건 아닌데.”
도겸은 앞장서서 호텔을 향해 걸어갔다.
그 뒤를 쫓아가면서 세영이 말했다.
“그래도 호텔에 들어가는 건 위험하지 않아? 파파라치라도 있으면 어쩌려고.”
우뚝. 도겸이 멈춰서 세영 쪽을 돌아봤다.
“그러는 너는. 위험한 짓은 하지 않겠다면서.”
그제야 세영은 아직 도겸이 화가 나 있음을 깨달았다.
“그건…….”
할 말이 없었다.
아무리 저는 다쳐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어도 걱정 끼친 것은 사실이었다.
세영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사과했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네 잘못 알고 있는 거 맞아? 너 그때 내가 안 갔으면 그 개만도 못한 새끼한테 맞았을 수도 있어.”
다시 그 상황이 생각나는지, 도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세영은 변명 아닌 변명을 시작했다.
“알아……. 그래도 나는 그 선배한테 한 대 맞아도 확실하게 해명할 수 있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해서. 아니 그렇다고 꼭 맞을 생각이었다는 건 아니고. 그냥 그렇게 된다고 해도 각오하고 있었다. 뭐 그런-.”
“아직도 모르네.”
말을 뚝 끊어버린 도겸은 다시 호텔로 향했다.
망했다. 어째 말할수록 자신도 이게 아닌가 싶었긴 한데.
세영은 울상을 지으며 다시 도겸의 뒤를 쫓아갔다.
“진짜 들어가려고?”
“지금 알아보는 사람 없을 때 들어가는 게 나아. 여기 멀뚱히 서 있는 게 더 위험해.”
“…….”
세영이 불안함에 별말이 없자 신경 쓰였는지 도겸이 말했다.
“진짜 걱정 마. 사진 찍힐 일 없어. 들어가서 얘기 좀 하자.”
“아, 알겠어.”
그렇게 호텔 안으로 들어와 앨리베이터를 타고 세영의 방에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 사이에는 말이 없었다.
방 안에 들어가서도 도겸이 말이 없자 세영은 도겸의 눈치를 봤다.
“아직도 화났어?”
“어. 화났어.”
세영이 도겸을 달랬다.
“그만 화 풀어. 응? 결과적으론 안 맞고 잘 끝났잖아. 앞으로 다시는 만날 일 없을 거고.”
도겸이 어이없다는 듯 세영을 쏘아보았다.
“넌 네 일인데 어쩜 그렇게 무심해?”
세영도 샐쭉해져선 말했다.
“그렇게 따지면 나도 할 말 없는 건 아냐.”
“뭐?”
“너 진짜로 호진 선배 쳤으면 어쩔 뻔했어. 그 선배가 자기가 잘못한 건 생각도 안 하고 경찰에 신고해서, 때린 게 민도겸이다. 배우라더라. 밝혀지면 어쩌려고 그랬어.”
“그럼 내가 그 상황에서 가만히 있어?”
“그럼 잘못 안 했다고?”
“…….”
반대로 이번엔 도겸이 입을 다물 차례였다.
뭔가 이긴 듯한 기분으로, 세영이 당당하게 말했다.
“이걸로 쌤쌤인 셈 쳐.”
“…….”
도겸은 맘에 들지 않는다는 듯,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인제 그만 기분 풀어. 둘만 있는데 계속 삐져 있을 거야?”
그래도 오랜만에 보는 건데?
세영이 말하자 도겸이 고개를 저었다.
“…… 아니.”
“그럼 화해의 포옹. 할까?”
세영은 기분이 좋았다.
완전히 해결된 건 아니지만, 억울했던 일도 잘 풀릴 것 같은 기분이었고, 새로 사귄 친구들도 좋았다.
그래서 먼저 선뜻 두 팔을 벌려보았다.
언제나 자신만 닿고 싶어 했지, 세영이 먼저 요구한 것은 처음이었다.
이 타이밍에 포옹하자고 먼저 말하다니.
도겸은 약았다고 생각하면서도 세영을 덥석 끌어안았다.
그의 품에 세영이 쏙 들어왔다.
세영의 목에 얼굴을 묻은 채로 도겸이 중얼거렸다.
“난 비슷한 상황에 부닥치면 또 그렇게 행동할 거야.”
세영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나도 똑같이 행동하겠지만, 넌 그러면 안 돼.”
“뭐?”
도겸이 세영과 딱 달라붙어 있던 몸을 조금 떨어뜨린 뒤 되물었다.
“나도 호진 선배가 때리려 하면 똑같이 맞아주고 그걸로 신고하겠지만, 넌 누구 때리고 그러면 안 된다고. 배우잖아.”
억울하다는 듯 도겸이 항변했다.
“너는 또 그렇게 행동할 거라고 하면서 나는 왜 안 돼? 그리고 내가 누굴 그냥 패려고 한 것도 아니고 네가 위험해서 그랬는데도 안 돼?”
“어. 안 돼. 그래서 더 안 돼.”
세영은 단호했다.
도겸이 뭐라고 더 말하기 전, 세영이 선수를 쳤다.
“우리 무슨 사이야?”
“어?”
“우리. 너랑 나. 무슨 사이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