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이 끝났다.
다은이 없어 오랜만에 기분 좋게 끝난 촬영이었다.
도겸은 대기하고 있던 민수와 미연에게 다가갔다.
민수가 자연스럽게 도겸에게 겉옷을 건넸다.
“수고 많았어.”
“땡큐. 형 다음은 뭐였지?”
“광고 촬영. 그리고 그다음은 인터뷰.”
“바로 움직여야겠네.”
떨떠름하게 도겸이 대답하며 옷을 걸쳤다.
민수는 도겸의 어깨를 두드렸다.
“가는 동안 눈 좀 붙여.”
도겸은 정말 피곤했는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케줄이 빡빡한 탓도 있었지만,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더 컸으리라.
민수는 안쓰럽게 도겸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조금 죄책감도 생기는 것 같았다.
다은을 막아줄 만큼 민수나 회사에 힘이 없기 때문에 생긴 일이니까.
잠시 도겸을 바라보던 민수는 묵묵히 뒷정리를 하고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세 사람이 떠날 채비를 하는 것을 한 스태프가 멀리서 바라보았다.
스태프는 안절부절못했다.
그녀는 자신이 본 것을 말해줘야 할지, 아니면 그냥 넘어가도 될지 망설이고 있었다.
아까 이상한 남자가 도겸의 핸드폰을 건드린 것에 대해 말해야 할지 말이다.
도겸은 이제 곧 떠날 것만 같았다.
얼른 결정을 내려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아니, 사실 마음속으론 알고 있었다. 말해줘야 했다.
혹시 그 남자로 인해 무슨 큰일이라도 나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말해줘야 할 것 같은데, 스태프는 도겸에게 다가가다가도 자꾸만 멈추게 되었다.
남자의 눈. 그 오싹한 눈 때문이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을 때 무어라 잘 설명할 수 없지만, 스태프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할 수 있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것 같은 그런…….
그런 생각을 하니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아직도 어디선가 남자가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남자의 이상한 행동을 본 것은 자신밖에 없었다.
달리 말하자면, 누가 도겸에게 알려줬는지 남자도 바로 알 것이라는 거였다.
거기까지 생각하면 몸이 굳어버렸다.
남자는 스태프가 아님이 틀림없는 데도 방송국 안으로 들어왔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한데, 아무한테도 들키지 않았다.
어떻게 한 건지는 몰라도, 언제 또 같은 방법으로 방송국 안에 나타날지 몰랐다.
이번에는 핸드폰을 엿보는 데서 끝나지 않을지도 몰랐다.
남들은 과한 걱정이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스태프는 망설이다 결국 도겸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그녀는 스튜디오 밖으로 향하는 도겸 쪽을 바라보았다.
그저 아무 일도 없기를…… 자신의 과민반응이었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
도겸과 민수, 그리고 미연은 스튜디오를 나와 바로 주차장으로 향했다.
도겸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방송국 건물 안에서도, 그리고 주차장에 들어서고 나서도.
말 그대로 차로 향하는 내내 두리번거렸다.
무언가를 경계하는 듯한 모습이 이상했다.
먼저 자동차에 탄 미연이 물었다.
“누구 찾는 사람 있어?”
머쓱하게 도겸이 대답했다.
“아니, 아니야 아무것도.”
“사람 다 신경 쓰이게 두리번거려놓고 뭐가 아니야.”
“그냥…… 팬이라도 있을까 봐.”
“뭐야, 그래서 그런 거였어? 싱겁게. 너 걱정이 과하다.”
“그렇지? 괜히 한 번 그래봤어.”
도겸이 미연에게 웃어 보였다.
미연이 관심을 거두는 것을 확인한 도겸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도겸은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밖을 훑어보았다.
웃음을 거둔 지 오래, 도겸은 어딘가 날카로운 표정이었다.
지난번 라디오가 끝나고 만났던 남자가 또 있을까 빠르게 확인했다.
정장을 입고 있던 남자는 도겸도 아주 잘 아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근래 안 봤다 한들, 까먹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만큼 오랫동안, 가까이서 봐왔던 사람이었다.
가족만큼, 아니 어쩌면 가족보다 더 자주 봤던 사람이었다.
도겸이 집을 뛰쳐나올 때까진 말이다.
집과 가족에 대해 생각하고 있자니 좋았던 기분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다행히 남자는커녕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도겸은 안심하고 눈을 붙일 수 있었다.
* * *
조금 늦은 점심시간.
차에서 내린 세영은 입이 떡 벌어졌다.
커다란 한옥이 시야에 가득 찼다.
재찬이 운영한다는 한식당이었다.
세영은 그 기세에 눌려 가만히 서서 멀거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서울의 한복판. 노른자 같은 땅에 이렇게 커다란 한옥집이라니.
임대료가 얼마일지, 세영은 상상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자신과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나던 것 같은데, 이렇게 큰 식당을 운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뒤따라 내린 연숙이 뻣뻣하게 굳은 세영을 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뭐해. 안 들어가고.”
연숙은 세영을 지나쳐 먼저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앞장서는 연숙을 따라 세영은 종종걸음으로 들어갔다.
대문을 지나면서 세영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어쩐지 오늘따라 이모가 유난히 차려입는다 싶더니.
자기에게도 미리 귀띔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어느새 재찬이 나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재찬은 연숙에게 허리 굽혀 인사했다.
고개를 든 재찬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선생님.”
“아이고, 날도 추운데 뭘 이렇게 나와 있어.”
“선생님이 오시는데 당연히 나와서 맞이해야죠.”
길지 않아도 연숙에 대한 애정을 담뿍 드러내는 말이었다.
연숙도 미소로 화답했다.
“혀에 꿀이라도 발랐나. 어쩜 이렇게 말을 예쁘게 할까.”
연숙의 말에 재찬이 쑥스러운 듯 웃어보였다.
“그럼 안으로 들어갈까요.”
재찬이 문을 열어 두 사람을 안으로 안내했다.
연숙이 먼저 들어가고 세영이 그 뒤를 따랐다.
재찬과 세영.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쳤다.
일단 그래도 초대해준 거니, 세영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또 뵙네요.”
“……네.”
떨떠름한 대답이었다.
귀찮은데 선심 써서 대답해준다는 티가 팍팍 났다.
기가 막혀서 세영이 재찬을 노려보자, 재찬은 그저 고개만 까딱일 뿐이었다.
빨리 들어가라는 까딱거림이었다.
저 싸가지.
연숙에겐 아주 순한 양이 따로 없더니 자신에겐 아주 찬 바람만 쌩쌩 불었다.
너무나도 확연한 태도 차이에 세영은 바짝 약이 올랐다.
‘지만 싫은 줄 아나.’
속으로 온갖 험한 말을 하면서 세영이 뒤따라갔다.
두 사람은 개인실로 안내되었다.
좌식으로 되어있는 방이었다.
마루에서는 따듯한 온기가 올라왔다.
연숙과 세영이 나란히 앉고 반대편에 재찬이 앉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준비해뒀는지 바로 요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요리가 끊임없이 나왔다.
무릎 꿇고 앉은 재찬이 연숙에게 말했다.
“차린 게 많진 않지만, 정성을 다해 만들었습니다.”
‘하이고, 차린 게 많지 않기는. 웃기고 앉았네. 아주 상다리가 휘어질 것 같은데 무슨.’
겸손 떠는 모습도 얄미워 세영이 속으로 비웃었다.
“음.”
연숙이 젓가락을 들었다.
재찬의 몸이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었다.
반대편에 앉은 세영에게도 보일 정도였다.
연숙은 나물을 집어 맛보았다.
천천히 맛을 음미하던 연숙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제야 안심됐는지 재찬의 굳었던 몸이 풀어졌다.
그렇게 본격적인 식사가 시작되었다.
재찬은 식사를 하지 않았다.
단정하게 앉아 연숙의 평을 귀 기울여 들을 뿐이었다.
연숙과 재찬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로 요리에 대한 내용이었다.
세영은 눈을 내리깔고 얌전히 앉아 열심히 음식만 집어 먹었다.
재찬은 맘에 들지 않았지만, 재찬의 음식 솜씨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주 세영의 입맛에 딱 맞았다.
그래도 이모만큼은 아니지만.
쉬지 않고 젓가락을 움직이며 열심히 먹던 세영은 문득 옆에 있는 문을 바라보았다.
방은 희한하게 문이 양쪽에 있었다.
세영이 들어왔던 쪽 문은 한지를 바른, 한옥을 생각하면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문이었다.
반면에 반대쪽 문은 나무 틀 안이 유리로 되어있었다.
덕분에 바깥에 무엇이 있는지 훤히 볼 수 있었다.
그 문밖엔 정원이 있었다.
입구(口) 자로 건물이 둘러싸고 있어서 밖에서는 볼 수 없었던 정원이었다.
크기가 아주 큰 건 아니었지만 고즈넉한 정원이었다.
딱 보아도 잘 가꾸어진 것이 정성을 들인 것이 느껴졌다.
정원 한 편에 있는 연못을 바라보며 세영은 살짝 웃어 보였다.
음식도, 가게의 분위기도 마음에 들었다.
재찬의 싸가지만 아니었으면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세영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때 연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화장실에 가기 위함이었다.
순식간에, 재찬과 세영만 남은 방 안에는 싸늘한 침묵만이 맴돌았다.
재찬의 시선은 이제 세영을 향했다.
세영은 그 시선을 무시하고 꿋꿋이 젓가락을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진득한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체할 것 같아, 세영은 한숨을 쉬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세영은 고개를 들어 재찬을 바라보았다.
“왜요.”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재찬은 멀뚱히 세영을 바라만 보았다.
세영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했다.
“왜 그렇게 보는데요.”
재찬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삐딱한 말투를 지적하는 대신, 재찬은 솔직하게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 맛은 어때요?”
“…… 맛있어요.”
이걸 맛있다고 해 말아.
고민하던 세영도 솔직하게 대답했다.
사람이 싫은 거지, 음식은 정말 맛있었으니까,
맛있다는 대답이 나올 줄은 몰랐는지, 재찬의 눈썹이 더욱 올라갔다.
재찬이 별말이 없자, 세영이 불퉁하게 말했다.
“뭐, 맛있다는 것도 싫어요? 칭찬인데?”
그건 아니라는 듯. 재찬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솔직히 그쪽한테서 맛있다는 말을 들을 줄은 몰라서. 날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싫은데요?”
잘 아네.
재찬의 말이 끝나자마자 세영이 말했다.
단호한 말에 재찬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영은 다시 젓가락을 잡으며 말했다.
“그래도 맛있는 걸 맛없다고 할 순 없잖아요.”
그리곤 쌈밥을 집어 들어 옆에 놓인 소스를 찍어 먹었다.
재찬이 직접 만든 듯한 소스가 쌈밥과 굉장히 잘 어울렸다.
먹기 좋게 적당한 사이즈도 마음에 들었다.
세영은 오물오물 열심히 씹어 먹었다.
여전히 재찬은 세영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지만, 세영은 개의치 않았다.
쳐다보면 어쩔 건데.
눈치 보다가 맛있는 걸 못 먹으면 자기 손해였다.
세영은 뻔뻔하게 나가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져 다시 젓가락을 열심히 놀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재찬이 입을 막 뗐을 때 연숙이 돌아왔다.
“도중에 자리를 비워서 미안. 나 없는 동안 두 사람 얘기는 많이 했어?”
어느새 재찬에게도 말을 편하게 하는 연숙이었다.
세영은 입안 가득 무언갈 먹고 있어서 고개만 도리도리 저었다.
“뭐어? 좀 나이도 비슷한 사람들끼리 친해져 보지. 세영이 넌 좀 말도 먼저 걸고 그래 봐. 나 같은 늙은이랑만 대화하면 재미없을 거 아냐.”
“아닙니다. 전 선생님이랑 좀 더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세영은 피식 웃었다.
누가 이모 팬 아니랄까 봐 아주 지극정성이다. 지극정성.
연숙도 듣기 싫진 않은지 싱글벙글하였다.
“아유 나야 언제든 환영이지. 궁금한 게 있거나 수다 떨고 싶을 땐 전화해. 나 엄청 한가해.”
연숙이 깔깔 웃으며 말하자 재찬도 부드럽게 웃었다.
식사 자리는 훈훈하게 끝났다.
돌아가기 위해 연숙이 차를 끌고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세영은 재찬과 남게 되었다.
세영이 추위에 입김이 나오는 것을 구경하고 있으니, 재찬이 불쑥 손을 내밀었다.
세영은 재찬의 손을 빤히 내려다봤다.
“이거 뭐예요?”
“전화번호 알려주세요.”
재찬의 손에는 핸드폰이 들려있었다.
“제 전화번호요? 이모 전화번호가 아니라?”
“네. 선생님 말고 세영 씨요.”
“왜요?”
세영은 미간을 좁혔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체 제 전화번호를 왜 받으시려는 거예요?”
대답하는 대신, 재찬은 낮은 목소리로 세영에게 되물었다.
“……그렇게 주기 싫습니까?”
“아니, 뭐 그건 아닌데.”
자존심에 상처받았다는 듯한 태도에 세영은 당황스러웠다.
그렇다고 우리가 전화번호를 교환할 만큼 친한 건 또 아니잖아요?
세영은 그 말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진 못하고 삼켰다.
“오늘 굉장히 잘 드시던데 또 식사 대접하고 싶습니다.”
“어…….”
굳이 안 그러셔도 되는데……. 그러다 체할 것 같은데…….
갑작스럽게 친절을 베푸는 재찬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해가 될 리가 없었다.
까칠함과 예민함의 끝을 달리던 사람이 갑자기 전화번호를 묻는다?
절대 좋은 신호는 아니었다.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진짜 친해지고 싶어서 그러는 거라면?
세영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여전히, 재찬은 핸드폰을 내밀고 있었다.
추워서 그런지 그 손이 빨갰다.
결국 세영은 머뭇거리며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꾹꾹 자신의 번호를 한 자 한 자 입력했다.
추워서 손이 잘 움직이질 않았다.
재찬이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는데, 손이 제 맘대로 잘 움직이질 않아 답답헀다.
겨우 11자리 숫자를 제대로 입력했다.
세영은 다시 한 번 틀린 곳이 없는지 확인했다.
세영은 재찬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여기요.”
핸드폰을 돌려받은 재찬은 설핏 웃어 보였다.
“감사합니다. 곧 연락할게요.”
“네에…….”
어정쩡하게 세영이 대답했다.
안 그러셔도 된다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괜히 좋게 지내려고 마음먹은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곧 연숙이 차를 끌고 돌아왔고 재찬은 깍듯이 인사했다.
세영은 연숙의 옆좌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고, 차가 출발하고 나서도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대체 뭐 하는 사람이지.
꿍꿍이가 뭐야.
재찬의 속이 의뭉스러웠다.
“허.”
잠시 고민하던 세영은 큰 의미 두지 않으려 노력했다.
좋은 게 좋은 거지.
그래도 참 별 희한한 일이 다 있네.
세영은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