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영은 호텔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푹신한 침대에 저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기나긴 하루였다.
이대로 잠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많은 일이 있었다.
피곤이 몸을 감싸고 있었다.
세영은 저도 모르게 눈이 스르르 감겼다.
몇 분이 지났을까. 세영은 벌떡 일어났다.
“아, 정말 잠들 뻔했다. 안 되지. 안 돼.”
도겸에게 전화를 하기로 했던 것이 기억난 것이다.
세영은 화장실에 있는 연숙에게 들리도록 크게 말했다.
“이모! 나 잠깐 밖에 산책 좀 하고 올게.”
“이 늦은 시간에 산책한다고? 저녁 먹게 일찍 돌아와.”
“알았어.”
세영은 연숙에게 산책이란 핑계를 대고 방 밖으로 나왔다.
방문을 닫자마자 세영은 바로 도겸에게 전화를 걸었다.
세영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던 건지.
신호음이 몇 번도 채 울리기 전에 바로 도겸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세영아.”
도겸이 세영의 이름을 불렀다.
목소리에서 들뜬 기분을 읽을 수 있었다.
세영 또한, 도겸의 목소리에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잘 들어갔어?”
“네. 잘 들어갔어요.”
“아직도 존댓말 하는 거야?”
“하는 거 봐서 반말하겠다고 했잖아요.”
“나 하는 게 맘에 안 들었어?”
전화상인데도, 울상을 짓고 있을 게 뻔히 보였다.
아무도 없는 엘리베이터에 타면서 장난스럽게 세영이 말했다.
“어디 보자. 얼굴 피하고. 사람 놀라게 갑자기 끌어안고. 놔두고 가버리고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 이런.”
그러자 도겸이 낮게 탄식했다.
“내가 나빴네. 어떻게 하면 네 화가 풀릴까?”
순순히 수긍하는 말에 세영은 숨죽이고 웃었다.
“어디 한 번 열심히 고민해봐요. 어떡하면 내 화가 풀릴지.”
“알겠어. 한 번 최선을 다해서 생각해볼게. 그러니까 얼른 화 풀어야 해.”
세영은 장난이었는데 도겸은 진지했다.
그와 전화를 하고 있으니, 세영은 피로가 날아가는 것만 같았다.
1층에 도착한 세영은 호텔 밖으로 나서면서 물었다.
“스케줄은 다 끝났어요?”
“응. 지금 막 끝난 참이야. 오늘은 좀 일찍 끝났어.”
세영이 깜짝 놀라서 물었다. 지금이 밤 9시인데.
“이게 일찍 끝난 거라고요?”
“응. 워낙 밤낮없이 일하는 곳이니까. 그래도 예전만큼 밤새워서 일하는 일은 적어진 거야.”
“피곤하겠다……. 이렇게 전화할 시간에 잠이라도 좀 더 자는 게 나은 거 아니에요?”
“어, 안 돼. 끊지 마. 나 안 자도 돼. 괜찮아. 튼튼하다고.”
세영이 끊을 것처럼 굴자 도겸이 다급하게 말했다.
자신이 괜찮음을 피력하는 말에 세영이 웃었다.
세영의 웃는 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도겸에게 들려왔다.
“알겠어요. 안 끊을게요.”
호텔 밖으로 나온 세영은 정처 없이 걸었다.
겨울바람이 춥기보단 시원하게 느껴졌다.
도겸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안 피곤해? 서울까지 오느라 많이 힘들었을 것 같은데.”
“저도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정말로? 계단 올라가는 것도 힘들어했잖아.”
“…… 자꾸 그러면 전화를 확 끊어버리는 수가 있어요.”
“하하. 알겠어. 안 그럴게.”
장난스럽게 웃던 도겸이 나직하게 말했다.
“…… 네 목소리 들으니까 더 보고 싶다.”
보고 싶다는 말에 세영의 볼이 붉어졌다.
“아까 봤잖아요.”
“잠깐밖에 못 봤잖아. 영화 예고편도 아니고 그렇게 감질나게 보는 건 본 거로 못 쳐.”
세영은 작은 목소리로 자신의 마음을 전했다.
“……나도 보고 싶어요.”
“방금 뭐라고?”
제대로 못 들었는지 되묻는 말에 세영은 다른 얘기로 주제를 돌렸다.
“내일은 뭐 해요?”
“나? 나는 일 해. 내일은 오전 6시부터 시작해서 저녁에 끝나.”
“진짜 피곤하겠다. 얼른 자두는 게 좋지 않아요?”
“괜찮다니깐. 너랑 이렇게 얘기하는 게 더 피로가 풀려. 너는 내일 뭐 해?”
“저는 이모랑 여기저기 돌아다닐 것 같아요. 또 예재찬 씨가 하는 한정식집도 갈 것 같고.”
“예재찬 씨?”
“아, 이모가 특별 심사위원으로 나왔던 요리 경연 서바이벌 참가자인데, 이모 팬이라고 하더라고요.”
“남자?”
“남자죠.”
“…… 그래?”
도겸의 목소리에 못마땅함이 묻어있었다.
이 사람이 갑자기 왜 이럴까.
세영은 어리둥절했다.
설마. 문득 스치는 생각에 세영이 물었다.
“…… 설마 지금 질투하는 건 아니죠?”
“……왜? 질투하면 안 돼? 질투하냐고 묻는 걸 보니 질투할 만한 사이인가 봐. 그 예재찬 씨랑?”
어떡해. 진짜로 질투하나 봐.
도겸이 귀여워서 세영은 절로 입가가 올라갔다.
“그 사람이랑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래도 내일 그 사람 보러 간다는 거 아니야. 한정식집에. 그 사람이 너한테 뭐……. 뭐 있는 거 아냐?”
호감이라도 있는 게 아니냐고는 말하기 싫었는지.
도겸이 얼버무려서 말했다.
절대 그건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세영은 엉뚱한 질투를 하는 도겸이 귀엽기만 했다.
“그건 나 때문이 아니라 우리 이모 팬이라서 초대한 거죠. 그 사람 저 완전 싫어하던데. 서로 아주 최악의 첫인상이었을 걸요.”
“그건 불가능해.”
“뭐가 불가능해요?”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세영이 되물었다.
“너를 어떻게 싫어하겠어. 말도 안 돼.”
“그건…….”
그건 진짜 콩깍지 같은데.
차마 자신의 입으로 말하기는 너무 부끄러워 세영은 입을 다물었다.
자꾸만 가슴이 간질거렸다.
세영이 걷던 걸음을 멈추고 도겸에게 불쑥 물었다.
“……나 좋아해요?”
“좋아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도겸이 대답했다.
“그때 그렇게 가버리라고 말했는데도요? 그래도 내가 좋아요?”
“응. 좋아해.”
여전히 도겸은 단호했다.
“…… 내가 이렇게 확인하듯이 묻는 거 귀찮지 않아요?”
“그게 뭐 어때서? 뭐 어려운 일이라고.”
“…….”
세영은 눈을 감고 도겸의 목소리를 들었다.
“네가 질리도록 말해줄 수 있어. 좋아한다고.”
핸드폰을 통해 들리는 도겸의 목소리가 다정했다.
“그러니까 언제든 물어봐. 계속해서 대답해줄 테니까.”
“…….”
“좋아한다고.”
* * *
대기실 안.
도겸은 거울 앞에서 미연의 메이크업을 얌전히 받고 있었다.
민수는 그 뒤에 있는 소파에 앉아 도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따라 도겸은 웬일인지 투정 하나 부리지 않고 잘 따라왔다.
원래 이게 평소대로인 건데, 요즘 하도 도겸이 툴툴댔던 탓일까.
민수는 지금의 도겸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지금쯤이면 빨리 끝났으면. 하고 한 마디라도 해야 했는데.
아침부터 이어진 스케줄에 지칠 법도 한데 말이다.
민수가 도겸에게 무슨 일 있었냐고 물어보려던 찰나.
민수의 전화벨이 울렸다.
말하려던 것을 멈추고, 민수가 핸드폰을 꺼냈다.
“아, 사장님…….”
민수가 이마를 짚었다.
요즘 도겸과 사장님 사이의 감정은 좋을 수가 없었다.
다은이 갑자기 도겸의 스케줄에 낀 것을 알면서도 말도 안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건 민수의 입장에서도 썩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설마 또 무슨 일을 벌였을까.
달갑지 않은 전화에 민수는 화면만 바라보았다.
끄응.
민수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잠깐 전화 좀 받고 올게.”
“응. 천천히 다녀와.”
도겸이 메이크업을 받느라 눈도 뜨지 못한 채로 말했다.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도겸의 눈이 번쩍 뜨였다.
“야. 갑자기 눈을 뜨면 어떡해!”
미연이 화를 내거나 말거나.
도겸이 서둘러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지난 밤, 그 뒤로도 도겸과 세영은 긴 시간 전화를 했다.
아쉽게도, 둘이 다시 만나기는 힘들었다.
도겸의 스케줄이나 함다은 때문이었다.
대신, 두 사람은 문자로 계속해서 연락을 하기로 했다.
“연락 왔나?”
기다리던 연락이 왔는지 도겸의 표정이 밝아졌다.
[늦잠 자버렸어요. 도겸 씨는 지금 일하는 중이에요?]
별 내용 없는 문자에도 도겸은 하늘을 나는 것만 같았다.
도겸은 서둘러 답장을 하기 시작했다.
“너 웃지 말고! 얼굴 얌전히 하지 못해? 고개 숙이지 말고!”
도겸은 대답조차 없었다.
도겸이 핸드폰을 보느라 화장을 하려야 할 수가 없는 미연은 속이 터졌다.
“적어도 핸드폰을 들어 올려서 보던가. 나 일은 하게 해줘라. 응?”
“잠깐만. 나 답장만 보내고.”
누구랑 그렇게 연락을 하는 건지.
미연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기에 눈꼴시어 볼 수가 없었다.
좋다고 실실 웃고 있는 게 자기가 알고 있던 도겸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지금 대기 중. 이제 곧 XXX 찍으러 가. 나 방송에 나오면 봐줄 거지?]
“됐어. 이제 해.”
문자를 보낸 도겸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미연은 한숨을 쉬고 다시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민도겸은 오늘 온종일 이 상태였다.
민수가 없을 때면 핸드폰을 손에서 놓질 못했다.
형에게는 뭐든 솔직하게 말할 거라던 도겸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몰래몰래 연락하는 꼴이 아주 필사적이었다.
세영과 연락이 닿은 걸 민수에게 들켜서는 안 됐다.
특히나 학교에 몰래 갈 생각을 하고 있는 지금은 더욱더 말이다.
민수가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도겸은 마음이 급했다.
그때 민수가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왔다.
들어온 사람이 민수라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도겸의 표정은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도겸의 표정을 확인하지 못한 민수가 말했다.
“도겸아. 좋은 소식이다.”
“뭔데?”
세영의 문자보다 좋은 소식이 더 있을까.
도겸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도겸의 시큰둥한 반응에도 개의치 않고, 민수가 흥분해서 말했다.
“사장님이 그러시는데, 함다은 씨가 억지로 끼어드는 일은 더 없을 것 같아.”
“뭐라고?”
그 말에 도겸 뿐만 아니라 미연 또한 놀라서 민수를 바라보았다.
드디어 기대했던 반응이 나왔다.
민수는 더욱 신나서 말했다.
“지금 있던 스케줄 외로도 한동안은 더 네 스케줄에 훼방 놓을 것 같았는데 갑자기 그럴 기미가 싹 사라졌다네.”
“갑자기 왜?”
“그러게요. 계속 따라다닐 것만 같더니 갑자기 왜?”
갑작스럽게 다은이 개과천선할 리도 없고.
도겸과 미연은 의심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사장님도 잘 모르겠다는데. 뭐 이유야 어쨌든 간에 잘된 일 아니겠어?”
“그건 그래요. 진짜 다행이다 도겸아.”
“촬영에 도움도 안 되고 매번 불편했는데 진짜 잘 됐지.”
민수의 말에 미연이 맞장구를 쳤다.
그들의 말대로, 조금만 더 참으면 다은을 안 봐도 된다는 말에 도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함다은이 껴든 스케줄은 그대로 가는 거야?”
“그건 그대로 갈 것 같아. 다시 빠진다는 말은 없으셨어.”
“진짜 다행이긴 한데. 무슨 일이 있던 건지 알 수가 없네. 이랬다가 또 갑자기 다시 끼어들고 그러는 거 아니야?”
여전히 도겸은 의심스러웠다.
고개를 끄덕이며 민수가 자기 생각을 말했다.
“내 생각에는 자의로 그만두겠다고 한 건 아닌 것 같아. 아버지나 위에 있는 사람이 조금 자제하라고 한 건 아닐까.”
“그럴 듯한데? 그러면 한동안은 자기가 뭘 어쩌지는 못하겠다.”
미연이 그렇게 말하며 도겸과 눈빛을 교환했다.
다은이 아무것도 못 할 때에 얼른 학교에 들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도겸도 민수 몰래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정말 다행이지. 준비가 다 됐으면 이제 슬슬 갈까?”
촬영장으로 이동했다.
스태프들에게 인사한 뒤, 곧바로 촬영이 시작되었다.
도겸은 입고 있던 패딩을 준비된 의자 위에 올려둔 뒤, 세트 위로 올라갔다.
휴대전화는 패딩 안에 넣어두었다.
다은의 연락이 신경 쓰여 촬영에 집중하지 못할 것 같아 일부러 빼둔 것이었다.
옆에는 민수와 미연도 있으니 걱정할 것이 없었다.
촬영이 시작되었다.
거의 유일하게 다은이 껴있지 않은 촬영이었기에, 촬영은 순조롭게 이어졌다.
민수와 미연은 능숙하게 MC의 질문에 대답하는 도겸을 보고 있었다.
그때 한 스태프가 다급하게 미연을 불렀다.
“미연 씨 정말 죄송한데 이쪽 좀 잠시 도와주실 수 있으세요?”
“물론이죠. 무슨 일이신데요?”
“저희가 급해서……. 이쪽으로 따라오시면 가면서 설명해 드릴게요.”
“아, 네. 알겠습니다.”
미연이 얼떨떨하게 민수를 바라봤다.
다녀오라는 듯. 민수가 미연에게 눈짓하자 미연은 스태프를 따라갔다.
민수는 미연이 촬영장 밖으로 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다시 고개를 돌려 도겸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민수의 주머니 속 진동이 울렸다.
촬영 시작 전 진동으로 바꿔둬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민수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다음 스케줄인 잡지사에서 온 전화였다.
촬영 중 잡음이 섞여서는 안 되니 이곳에서 받을 수는 없었다.
잠시 민수의 눈이 도겸의 패딩으로 향했다.
도겸의 옷이나 소지품을 봐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이 걸렸다.
이내 민수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설마 그 짧은 사이에 설마 무슨 일이 있겠어.
민수는 전화가 끊어질세라, 서둘러서 촬영장 밖으로 나섰다.
그렇게 도겸의 패딩은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촬영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모자를 쓴 남자가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자는 지금껏 틈을 보고 있었다.
스태프 증을 목에 걸고, 소도구 상자를 든 채로, 스태프 사이에 자연스럽게 숨어들어서 말이다.
그는 빠르게, 그러면서도 신중하게 의자로 다가갔다.
의자 뒤에서 남자는 무언가 떨어뜨리고 그걸 줍는 시늉을 했다.
쪼그려 앉은 채로 그는 패딩에 손을 뻗었다.
조심스럽게, 안에 있던 핸드폰을 꺼냈다.
들었던 것처럼, 도겸의 핸드폰에는 암호가 걸려있지 않았다.
남자는 씨익 웃어 보였다.
밝은 조명 아래로, 남자의 볼에 긴 흉터가 드러났다.
핸드폰을 뒤져 찾던 것을 발견한 남자는 사진을 찍었다.
핸드폰을 다시 원래대로 넣어둔 뒤 남자는 일어났다.
그때 남자는 한 스태프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를 의심스럽게 보고 있던 와중에 그가 하는 행동을 보고 만 것이다.
남자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손가락을 들어 올려 입에 갖다 대었다.
쉿.
즐겁다는 듯 남자가 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나 섬찟해서 스태프는 고개를 돌렸다.
본능적으로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눈치챘다.
남자는 유유히 촬영장 밖을 떠났다.
아무도 그를 막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