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타 구했습니다!”
촬영장 안은 소란스러웠다.
막내 작가를 따라 들어가자마자, 스태프들이 그들에게 서둘러 달려왔다.
“진짜?”
“고생했다 막내야.”
“이분이 대타 서주시기로 하신 분이야? 급한 부탁에도 승낙해주셔서 감사드려요. 잘 부탁드립니다.”
“아 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우르르 몰리는 사람들에, 빠르게 쏟아지는 말까지. 세영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막내 작가와 다른 스태프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우리가 옷은 준비해뒀어. 레시피는 어딨어?”
“여기 있어.”
“대타분 준비하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아?”
“모르겠어요. 그래도 한 십 분, 십오 분 정도면 되지 않을까요?”
“알겠어. 얼른 준비해.”
“이거 설명은 어떡하지?”
“함다은 씨랑 맞춰봐야 할 것 같은데. 레시피는 먼저 알려드렸어?”
“응. 일단 건네드렸어. 타이밍 잘 안 맞으면 그냥 나중에 목소리 씌우는 거로 가죠.”
“그래. 그렇게 해.”
세영은 그 가운데서 황망하게 서 있었다.
막내 작가가 세영에게 옷을 들고 달려왔다.
“좋아. 그럼 먼저 이 옷으로 갈아입고 오시겠어요? 사이즈는 비슷할 것 같은데.”
“아 네. 알겠습니다.”
“탈의실은 따로 없어서. 저기 안에서 갈아입으시면 될 것 같아요. 저 따라오세요!”
세영은 엉겁결에 옷을 받아들고 작가를 따라갔다.
걸음걸이가 너무 빨라 쫓아가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정신없이 바빴다.
막내 작가가 웬 커튼 앞에서 멈춰서더니 그녀를 돌아봤다.
“여기! 여기 안에서 입고 나오세요!”
“네!”
가림막 커튼 하나로 나누어진 허술한 공간이었다.
개의치 않고 세영은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막내 작가의 조급함이 옮은 걸까. 어쩐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옷을 다 갈아입었을 즈음, 커튼 너머로 막내 작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때요? 옷 사이즈 괜찮아요?”
“아, 네. 괜찮은 것 같아요.”
“한 번 나와볼래요?”
세영이 쭈뼛거리며 나왔다.
다은의 딱 붙는 화려한 옷이 어색했다.
무채색의 옷만 입었던 터라 더욱더 그랬다.
막내 작가는 세영을 눈으로 스캔했다.
완벽하게 똑같지는 않아도, 그런대로 다은과 체격이 비슷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막내 작가가 종이를 건넸다.
“좋아요. 이거 받아요. 야식 레시피예요.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 이해 안 되는 부분 있으면 알려줘요.”
세영이 내용을 확인했다.
확실히 이해하기 쉬웠다.
과정마다 사진도 첨부되어 있었고, 무엇보다 몇 줄 되지 않았다.
“간단하죠?”
“네.”
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거창하게 요리라고 할 것도 없는 일인데……. 우리 배우님은 대타를 사용하라고 하시니. 하하.”
“…….”
“그래도 세영 씨 덕분에 저희가 한시름 놨어요. 세영 씨 아니었으면 정말 일정이 다 어그러졌을 거예요.”
“아니에요. 힘든 일도 아닌걸요.”
“어쩜. 세영 씨는 정말 천사가 아닐까요. 참, 이 부분은요…….”
두 사람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촬영장으로 나섰다.
세영은 촬영장 안을 둘러볼 여유를 조금은 되찾았다.
어수선하던 분위기는 조금 정돈되어 있었다.
요리 경연을 찍고 있던 곳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구경하고 있을 때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 남자는 도겸이었다.
잠시 세영은 자기 눈을 믿을 수 없었다.
환상을 보는 건 아닐까. 잠깐이지만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했다.
세영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모가 우스갯소리로 말하던 일이 실제로 일어날 줄이야.
오랜만에 보는 도겸의 얼굴이 반가웠다.
세영은 도겸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촬영을 위해 단장한 모습이 낯설면서도 잘 어울렸다.
깔끔하게 넘기 머리가 그의 반듯한 콧날을 돋보이게 했다.
도겸은 뜨거운 조명 아래에서 그 누구보다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적어도 세영의 눈에는 그러했다.
반가움과 그리움이 차올랐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을 때, 세영과 도겸의 눈이 마주쳤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라, 그의 눈이 커지는 것이 보였다.
세영은 손을 흔들어 보이려 했다.
도겸 또한 그녀를 이곳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으리라.
그러나 도겸은 매정하게 고개를 돌려버렸다.
철렁.
순간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제야 세영의 시야에 도겸 주위가 들어왔다.
그의 옆에는 어떤 여자가 있었다.
보자마자 감탄이 나올 만큼, 예쁜 여자였다.
그녀는 도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리곤 키스할 것처럼 얼굴을 가까이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마치 연인 같아 보였다.
가슴 한쪽이 따끔거려 더는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세영은 옆에 있는 막내 작가 쪽으로 몸을 틀었다.
도겸은 그 여자를 밀어내기 바로 직전이었다.
“자 촬영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PD의 목소리가 촬영장 안에 울려 퍼졌다.
“세영 씨 그럼 세트 위로 올라가시고. 다은 씨 적당히 설명 맞춰서 말해주세요!”
옆에 있던 막내 작가가 세영의 등을 세트 쪽으로 밀었다.
세영은 막내 작가가 일러준 대로 조리대로 향했다.
조리대 건너편, 즉 세영의 앞에는 연예인들이 앉아 있었다.
개중에는 도겸도 있었다.
고개를 들 수가 없어 세영은 조리대만 바라보았다.
부끄러웠다.
내심 도겸이 자신을 그렇게 빨리 잊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
대체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앞으로 며칠은 이불을 뻥뻥 차게 되리라.
그때 옆에서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 참, 누가 야밤에 이렇게 짠 걸 먹는다고.”
고개를 들어 옆을 바라보니, 도겸의 옆에 앉아있던 여자가 서 있었다.
그녀는 자신과 똑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제야 세영은 그녀가 다은임을 알게 되었다.
레시피 종이를 들고 있는 그녀를 옆에서 보니 더욱더 예뻐 보였다.
“뭘 봐?”
“…….”
세영을 위아래로 훑은 다은이 말했다.
“인간적으로 대타면 나랑 조금이라도 비슷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PD님, 정말 얘 요리 잘하는 거죠? 그거라도 잘해야지 아니면 차라리 내가 하는 게 낫겠는데?”
“요리 경연 프로그램 쪽에서 어렵게 모셔온 분이에요. 한연숙 선생님의 조카니까 걱정 없어요.”
PD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지친 표정이었다.
다은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아 뭐 그러시구나. 뭐, 그럼 한 번에 해낼 수 있겠네. 안 그래요?”
“…….”
“시작할까요?”
세영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다은이 싫었다.
도겸 때문만은 아니었다.
남의 몸을 훑는 시선이라니.
그녀는 거만하고, 무례했다. 이 짧은 순간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처음 보는 상대에 대한 존중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었다.
세영은 고개를 숙였다.
무례한 말을 해도 넘어가 달라는 막내 작가가 했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참을 수밖에 없었다.
촬영이 시작되고, MC가 대화를 이끌기 시작했다.
“그럼 마지막으로 함다은 씨. 어떤 메뉴를 준비해오셨나요?”
“오늘 제가 준비한 야식은 쫄면인데요. 이게 그냥 쫄면이 아니에요.”
“그냥 쫄면이 아니라니. 어떻게 다른 거죠?”
“그냥 알려드리면 재미없죠. 보시면 알게 될 거예요.”
“이야, 기대되는데요.”
“먼저 면을 삶아줄게요.”
카메라가 돌아가자 180도 변한 다은이 감탄스러웠다.
조리대에는 레시피에 맞춰 재료가 준비되어 있었다.
세영이 끓는 물에 면을 넣었다.
어쩐지 몸이 경직됐다.
도겸의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세영을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세영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
덕분에 그가 지금 어떤 식으로 바라보고 있을지. 세영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아니, 사실은 알게 되는 것이 두려웠다.
그가 너무나도 싸늘하게 바라보고 있을까 봐.
MC는 막간을 이용하여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나저나. 다은 씨. 이슬만 드실 것 같은데. 야식도 드시나 봐요.”
“하하. 저도 사람인걸요.”
“와. 야식도 먹는데 그 몸매를 유지할 수 있어요? 정말 다 가졌네. 다 가졌어.”
MC의 옆에 있던 고정 패널이 맞장구를 쳤다.
수줍은 다은의 표정이 클로즈업되었다.
“그 다음 오이를 썰어줄게요.”
다시 카메라가 세영을 비췄다.
세영은 촬영을 위해 평소보다 조금 천천히 움직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정갈하게 오이가 잘리는 모습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와, 다은 씨. 요리를 잘하시나 봐요. 칼솜씨가 아주. 어우!”
“후후, 그냥 집에서 해 먹는 정도예요. 대단할 거 하나 없어요.”
“아니, 아니. 요리 정말 잘하시는 것 같은데요?”
“아이참, 그렇게 칭찬하시면 저 실수해요~,”
“하하하.”
세영은 요리에만 집중하고자 필사적이었다.
다행히 다은이 큰 도움이 되었다.
카메라가 돌아가기 전 거만하던 말투는 어디로 갔는지.
다은의 연기력이 감탄스러울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자신의 실력인 것처럼 구는 뻔뻔함까지!
도겸에 대한 생각을 분산시키기에는 정말 최고였다.
“그럼 이제 양념장을 만들 건데요.”
그렇게 세영은 다은의 목소리로 잡념을 떨쳐냈다.
레시피에 맞춰, 기계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눈앞에 있는 도겸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면서.
* * *
촬영이 끝나고 나서야, 세영은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짧다면 짧은 촬영이었지만, 그녀에겐 너무나도 길게 느껴졌다.
그녀는 원래의 옷으로 갈아입고 탈의실을 나섰다.
밖에선 막내 작가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영 씨 고생하셨어요. 옷은 저한테 주시면 돼요.”
“여기요. 작가님도 수고하셨어요.”
세영은 가볍게 웃어 보이며 막내 작가에게 옷을 건넸다.
“조금 전에 많이 불편하셨죠?”
“네? 아…….”
언제를 말하는 건지 알 수 있었다.
세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막내 작가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말하지 않아도 그 맘 이해해요. 어쩜 사람이 초면에 그렇게 실례되게 말할 수 있는지 참…….”
그녀가 한숨을 푹 쉬곤 계속해서 말했다.
“이미 대충 느끼셨겠지만, 함다은 씨네 부모님이 워낙 대단하신 분이라서요. 일개 프로그램 스태프인 저희는 물론이고 PD님마저 기라고 하면 기어야 할 정도예요. 그래서 그런지 함다은 씨 성질이 장난이 아니에요.”
“…….”
“이번에도 갑자기 자기를 출연진에 넣어달라고 하신 거 있죠? 저희가 힘들다고 해도 막무가내로……. 그래놓고선 오늘 갑자기 자긴 야식 코너를 못 하겠대요.”
순식간에 막내 작가가 몇 년은 늙어 보였다.
“후, 이 일이 좋아서 시작했지만 이런 때면 정말 왜 내가 이 일을 하나 회의감이 들어요.”
갖은 고초에 시달린 듯한 모습에, 세영은 어찌 위로하면 될지 몰랐다.
“아……,힘내세요.”
세영은 그저 가만히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위로해줘서 고마워요. 게다가 갑자기 넣어달라고 한 이유가 뭔지 아세요?”
“뭔데요?”
“남자예요. 남자. 이번에 저희 방송에 나온다는 소식을 어떻게 알았나 보더라고요.”
남자라는 말에 세영의 눈이 잠시 흔들렸다.
그 남자가 누군지. 짐작할 수 있었지만 애써 모르는 척 물었다.
“그 남자가 누군데요?”
“민도겸 씨라고. 아시죠? 요즘 뜨고 있는 배우잖아요. 진짜 이 바닥에선 유명한 얘기예요.”
“아…….”
“그런데 민도겸 씨가 꼼짝을 못 하는 게 조금 이상하기 해요. 다른 여자들이 들이댈 때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유독 함다은 씨한테만 그러더라고요. 정말 둘 사이에 무슨 썸씽이라도 있나 싶기도 하고…….”
막내 작가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혼자 열심히 떠들던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녀는 머쓱하게 웃었다.
“제가 세영 씨한테 별의별 이야기를 다 하네요. 참, 저희끼리 한 얘기는 비밀이에요. 어디 가서 말씀하시면 안 돼요? 들키면 저 바로 잘려요.”
“네. 알겠어요.”
세영은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를 억지로 올렸다.
“고마워요. 정말 세영 씨한테는 고마운 일만 가득하네요. 나중에도 또 뵐 수 있으면 좋겠어요.”
“저도 또 뵐 수 있으면 좋겠어요.”
다정한 막내 작가의 말에, 세영도 이번에는 진심으로 웃을 수 있었다.
“다시 요리 경연 촬영장으로 돌아가셔야 하죠? 모셔다드릴까요?”
“괜찮아요. 혼자서 갈 수 있어요.”
서로 작별 인사를 하고 세영은 촬영장을 나섰다.
당당하게 말했던 것과 달리.
세영은 지금 길을 헤매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작가님께 부탁을 드리는 건데…….”
인제 와서 후회해서 무얼 하나. 엎질러진 물이었다.
정처 없이 방송국 복도를 걷고 있으니, 자꾸만 도겸 생각이 났다.
조금 전 촬영장엔 연예인들이 많이 있었다.
몇몇은 연예인에 대해 잘 모르는 세영조차 알 정도로 유명했다.
평소에 봤다면 세영도 감탄했겠지만.
오늘은 아무런 감흥도 느낄 수가 없었다.
막으려 해도. 아닌 척해도. 도겸에게로 온 신경이 집중됐던 탓이다.
그가 자신을 바라볼 때. 자신이 한 요리를 먹을 때. 입을 뗄 때마다.
세영은 자신의 몸이 긴장하는 것을 느꼈다.
도겸이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리던 순간만이 머릿속에서 자동재생 되었다.
도겸은 자신만큼 그렇게 반갑지는 않았던 걸까.
마음이 심란했다.
꼬리를 무는 생각을 떨쳐내고자, 새영은 자신의 뺨을 가볍게 때렸다.
이럴 때가 아니었다. 지금은 길을 찾는 게 우선이었다.
지금쯤이면 이모도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분명 여기서 오른쪽으로 꺾었던 것 같은데.
생각하며 발걸음을 서두르고 있을 때였다.
“앗!”
코너를 돌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반대편에서 세영을 끌어당겼다.
세영은 속절없이 끌려갔다.
그 누군가는 와락, 그녀를 끌어안았다.
순식간에. 그녀는 커다란 품에 안기고 말았다.
그녀는 벗어나고자 버둥거렸다.
아플 정도로 꽉 안은 것도 아닌데, 좀처럼 벗어날 수가 없었다.
후드티를 쓰고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어 누군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녀가 소리를 지르려고 할 때 남자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세영아.”
익숙한 목소리였다.
세영이 버둥거림을 멈추자 조심스럽게 남자가 세영을 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나야.”
그녀의 머릿속을 헤집어놓던 장본인.
도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