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한 촬영장 안으로 세영과 연숙이 걸어 들어왔다.
“한연숙 선생님!”
가장 먼저 PD가 그들을 맞이했다.
하던 일도 전부 제치고 달려온 PD가 연숙의 양손을 반갑게 맞잡으며 말했다.
“아이고, 선생님. 어서 오세요. 먼길 오시느라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호호. 안녕하세요. 그간 잘 지내셨어요?”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선생님은 건강하게 잘 지내셨나요?”
“저야 항상 잘 지내죠.”
이전부터 알던 사인지, 두 사람은 정답게 안부를 물었다.
“이번 심사위원 일. 이렇게 흔쾌히 승낙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제가 약속한 건데 당연히 지켜야지요.”
“흘리듯 약속하셨던 거라 기억해주신 게 더 놀라울 정돈데요, 뭘. 첫 화가 가장 중요한데, 선생님이 와주신 덕분에 저희 프로그램도 위상이 살겠어요.”
“호호호. 아유. 말만이라도 감사합니다.”
연숙의 입이 아주 싱글벙글하였다.
입을 가리고 웃던 연숙이 옆에 있던 세영을 소개했다.
“참, 이쪽은 제 조카예요.”
“안녕하세요. 류세영이라고 합니다.”
세영이 허리 굽혀 인사했다.
예의 바른 모습에 연숙이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서울에 혼자 오기 적적해서 제가 데리고 왔어요. 오늘 촬영장에 같이 있어도 괜찮을까요?”
“아, 이렇게 예쁜 조카분이 있으셨군요. 물론 괜찮죠! 촬영 시간이 긴데 지루하진 않을까 걱정되네요.”
“PD님.”
그때 웬 남자가 다가왔다.
모두의 시선이 남자에게로 집중됐다.
세영도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보았다.
눈앞엔 단정한 조리복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세영은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한참 고개를 들어야 했다.
오뚝한 코와 날렵한 턱선이 시선을 끌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머리와 짙은 눈썹이 인상을 진하게 만들었다.
고우면서도 선이 굵은 남자였다.
바른 자세와 단정하고 깔끔한 요리복이 남자의 성품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일순, 남자의 시선이 세영에게로 향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관심 없다는 듯, 차가운 눈동자였다.
그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아, 참 내가 깜박했네. 선생님. 이 친구가 선생님의 열렬한 팬이라고 합니다. 오늘 선생님이 심사위원으로 온다고 알려주니 꼭 인사드리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안녕하세요. 예재찬이라고 합니다. 한연숙 선생님을 꼭 한 번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아유. 어린 친구가 벌써 사회생활 할 줄 아네. 빈말이라도 고마워요.”
“빈말 아닙니다. 선생님이 예전에 내신 ‘한식기행 – 우리의 맛을 찾아서’. 정말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저는 선생님을 존경해서 요리사라는 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진심 어린 재찬의 말에 연숙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렸다.
부끄럽다는 듯 연숙이 웃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많이 부족한 책이었는데 그걸 읽었다니 고마워요. 오늘 요리 기대할게요.”
“네. 최선을 다해 만들겠습니다.”
재찬은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하고 떠났다.
“저 친구가 이번 경연의 최연소 참가자입니다. 나이가 어린대도 실력이 아주 출중하다고 합니다.”
“그래요?”
연숙이 유심히 재찬을 바라보았다.
재찬은 경연 준비를 하고 있었다.
손을 풀기 위해서일까. 그는 벌써 무언갈 요리하고 있었다.
그의 움직임이 정확하면서, 군더더기가 없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경연 기대되네요.”
* * *
한참의 열띤 토론 후.
도겸과 승완, 미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하자.”
“좋아. 완벽하다.”
“완벽하다고 할 것까지야.”
대화를 마친 세 사람은 다시 스튜디오로 향했다.
문손잡이를 잡고, 도겸이 말했다.
“나 때문에 미안. 그래도 잘 부탁해.”
“에이 뭘. 친구 좋다는 게 뭐냐.”
“그래. 나중에 한턱 쏴.”
도겸이 씨익 웃었다.
두 사람의 대꾸에 그간 쌓였던 스트레스가 조금이나마 풀리는 것 같았다.
다시 시작된 촬영.
도겸의 기분과 달리, 전보다 순탄치 않았다.
어찌어찌 토크 분량은 다 찍었지만, 다음 코너를 시작하기도 전에 문제가 생겼다.
“다은 씨. 처음부터 말씀드렸잖아요. 저희 요리하는 코너 있다고요.”
“아니 그걸 어떻게 해? 내가 요리하다가 칼에 손이라도 베이면 책임질 거야?”
PD는 말문이 막혔다.
지금부터 찍어야 할 코너는 ‘스타의 야식 만들기’.
제목 그대로 스타들이 자신만의 야식 레시피를 소개하는 코너였다.
독특한 레시피로 시작하자마자 프로그램을 대표하는 코너가 됐을 만큼 중요한 부분이었다.
물론 연예인 중에는 야식을 먹지 않는 출연자도 많았다.
또는 이렇다 할 레시피가 없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경우는 사전에 말을 하면 스태프가 준비를 해두기도 했다.
하지만 갑자기 들어온 다은의 것까지 준비했을 리가 만무하다.
괜찮았다.
다행히도 스태프가 준비해둔 예비 레시피가 있었다.
아주 훌륭하지는 않기에 제했던 것이지만, 구색을 갖추기엔 충분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다은이 요리를 안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녀는 자기 손으로 직접 요리를 해 본 적이 없었다.
요리뿐만이 아니었다.
뭐든 가만히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다 알아서 해주는데, 자신이 할 줄 알 필요가 없었다.
그러니 요리는커녕, 칼로 재료를 다듬는 것도 할 줄 모르는 게 당연했다.
이건 모두 어디까지나 다은의 입장.
촬영을 해야 하는 PD의 입장에서는 답답한 일이었다.
“지금 와서 갑자기 이러시면 저희도 곤란해요. 미리 말씀해 주셨으면 방법을 준비해뒀을 텐데요.”
“지금 내 탓하는 거야?”
“후……. 다은 씨 그게 아니라요.”
“대타 구해. 그러면 되잖아. 뭘 어렵지도 않은 일 가지고 난리야?”
“…….”
애써 좋게좋게 말하던 PD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다은은 말이 통하질 않았다.
PD는 다은에게서 몸을 돌렸다.
“……예 알겠습니다.”
“어쩜 그렇게 생각이 없어? 이런 코너가 있었으면 대타를 미리 구해뒀어야지. 설마 나한테 직접 요리하게 할 생각이었던 건 아니겠지.”
“…….”
등 뒤로 적반하장격인 다은의 말이 들려왔다.
PD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모든 것이 화가 났다.
프로그램에 대한 존중이라곤 하나도 없는 다은의 태도도.
다은으로 인해 자꾸만 중지되는 촬영도.
그런 다은에게 굽신거려야 하는 자신도.
그는 대답하지 않고 세트 밖으로 걸어 나왔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작가들이 다가왔다.
“PD님 어떡해요? 지금 와서 대타를 구하기는…….”
“……누구 아무나 함다은이랑 체격 비슷한 사람 없어?”
“없어요……. 저희가 하면 바로 손에서부터 들킬걸요.”
“후……. 곤란하게 됐네. 어디 다른 데서라도 대타를 구할 수 없을까?”
그때 막내 작가가 말했다.
“오늘 요리 경연 서바이벌 촬영하는 팀 있지 않아요?”
“요리 경연?”
“네. 거기 있는 스태프들 중에 혹시 체격이 비슷한 사람이 있으면 괜찮지 않을까요? 요리 경연이니까 어느 정도는 요리도 잘 알 거고…….”
“그거 괜찮네. 젊은 여자 스태프만 있으면 딱 맞다.”
괜찮은 생각인 것 같았다.
작가들의 시선이 PD에게로 모였다.
팔짱을 끼고 있던 PD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누가 거기 촬영장 좀 한 번 갔다 와 봐. 대타로 쓸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죄송하지만 부탁드린다고 모셔오고. 없으면 그냥 다은 씨 분량은 시간상 편집된 거로 해.”
“네!”
힘차게 대답한 뒤, 막내 작가는 바로 스튜디오를 나섰다.
제발 누군가 대타가 있기를 바라면서.
* * *
“요리 경연 서바이벌, 지금 시작합니다!”
세영이 있는 스튜디오 안은 경연이 막 시작된 참이었다.
커다란 스튜디오 안.
심사위원들 앞에 정렬된 10개의 조리대에는 온갖 요리 재료들이 가득했다.
“이야, 시작종이 울리자마자 모두들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1회차 대망의 주제는 바로 ‘최고의 맛’! 사실상 자유주제나 다름이 없는 이 주제. 각자가 가장 자신 있는 요리를 선보이는 만큼 가장 부담스럽고 치열한 경쟁이 아닐까 생각이 드는데요.”
사회자의 말처럼, 참가자들은 열과 성의를 다해 요리하고 있었다.
“다들 어떤 요리를 선보일지 기대되지 않습니까, 한연숙 선생님?”
“어떤 요리를 맛보게 될지 저도 정말 기대됩니다.”
“오늘의 특별 심사위원이자 전통음식 전문가이신 선생님의 입맛을 사로잡을 요리는 과연 무엇일지! 제가 다 긴장이 됩니다.”
사회자가 과하지 않게 너스레를 떨었다.
그 뒤 사회자는 주변을 돌아다니며 이목을 끄는 참가자들을 인터뷰했다.
그중 가장 이목을 끄는 것은 재찬이었다.
잘생긴 외모도 외모였지만, 그의 손놀림이 범상치 않았다.
사회자가 그에게 다가가 인터뷰를 하기 시작했다.
“이야, 예재찬 씨. 이번 서바이벌의 최연소 참가자로 시작하기 전부터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는데요. 오늘은 어떤 요리를 하실 예정이신가요?”
촬영장 구석에서, 세영도 그 모습을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을 때였다.
옆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부탁드릴게요.”
“이거 곤란하네.”
허리를 숙이며 간곡하게 무언가를 부탁하는 여자와 머리만 긁적이는 PD가 보였다.
작은 목소리로 여자가 말했다.
촬영에 지장이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갑작스럽겠지만 저희 촬영에 대타가 필요한 상황이라서요. 어떻게 안 될까요?”
“그, 상황이 어떤지는 알겠고, 도울 수만 있으면 도와주고 싶은데. 우리 팀에도 지금 손이 비는 여자 스태프가 많지 않아서요.”
“…….”
“게다가 함다은 씨랑 체구가 비슷한 사람이라니. 있을지 모르겠네.”
“요리를 아주 잘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간단한 요리만 할 줄 알면 돼요.”
“그렇게 말해도……. 갑자기 웬 사람이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PD가 중얼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세영과 딱. 눈이 마주쳤다.
“어어! 있네. 있어!”
작게 말해야 한다는 것도 잊고 PD가 외쳤다.
막내 작가와 PD가 빠르게 세영에게 다가왔다.
“세영 씨. 이름 맞죠? 혹시 잠시 도와줄 수 있을까요?”
“네, 네?”
당황하는 세영을 앞에 두고 여자와 PD가 말했다.
“어때요? 함다은 씨랑 체격도 비슷하지 않아요?”
“네. 정말 비슷한데요. 나이대도 비슷하신 것 같고.”
“한연숙 선생님 조카라서 웬만한 요리도 할 줄 아실 거예요.”
“헉. 대박.”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수 없었기에.
세영은 가만히 있었다.
막내 작가의 동의를 얻은 뒤, PD가 세영에게 설명했다.
“세영 씨. 제가 이름 잘 기억하는 거 맞죠? 여기 계신 이 여자 분이 다른 촬영 팀분이신데, 촬영 중에 요리하는 장면을 찍을 대타가 필요해서 왔다고 해요. 마침 체구도 비슷해서 세영 씨한테 부탁드리고 싶다는데 괜찮을까요?”
“어…….”
“얼굴은 찍히지 않을 거예요. 요리하는 손만 찍을 거예요.”
세영이 망설이자, 여자가 재빠르게 말했다.
“제발 부탁드릴게요. 뭐 거창한 거 아니고요. 어렵지 않은 레시피에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을 거예요. 저희 예능에서 꼭 필요한 장면이라 곤란하던 참이거든요.”
“어어…….”
“저희가 거창한 건 아니어도 사례금도 드릴 수 있고요, 촬영하고 계시는 연예인분들 사인도 받아드릴 수 있어요. 국민 MC 아시죠? 그분도 지금 촬영 중이시거든요. 잘생긴 배우들도 많고요……. 진짜 저희 딱 한 번만 도와주실 수 없으실까요?”
하다못해 출연 연예인의 사인을 내걸 정도로, 여자는 간절했다.
망설이던 세영이 마음을 굳혔다.
거창한 일도 아니라고 하고, 이렇게까지 도움을 요청하는데 거절하기도 그랬다.
“얼굴은 정말 안 나오는 거죠?”
“네? 네! 하나도 안 나와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과하게 감사 인사를 표하는 여자에게, 세영은 그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럼 죄송하지만 지금 당장 부탁드려도 될까요? 저희가 좀 급해서.”
“아 네, 알겠습니다.”
세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쪽으로.”
“네, 알겠습니다.”
막내 작가가 문밖으로 세영을 이끌었다.
뒤에서 재찬이 흘끔 세영이 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인상을 찌푸린 뒤, 재찬은 다시 요리에 집중했다.
복도를 뛰면서도, 막내 작가는 설명을 계속했다.
세영은 그것에 귀 기울여 들었다.
“일단 의상 갈아입고, 레시피 설명해 드릴게요. 야식 레시피라 간단하고요. 말하는 거에만 맞춰서 손 움직여 주시면 돼요.”
“말하는 거요?”
“네. 그러니까. 레시피 설명하는 거는 그 안에 계시는 함다은 씨가 직접 해주실 거고요. 세영 씨는 거기에 맞춰서 손과 몸 부분만 찍는 거라서요.”
“아아,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음…….”
막내 작가가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직접 보시면 알겠지만, 음. 함다은 씨가 TV에서 보이는 것과 다르게 성격이 좀 안 좋을 수도 있거든요.”
숨이 차는지 한 번 말을 끊은 뒤, 작가가 이어서 말했다.
“저희가 최대한 부딪히지 않도록 하겠지만, 함다은 씨가 막 세영 씨한테 무례한 말을 할 수도 있어요.”
“…….”
“정말 죄송하지만, 그런 일이 생기면 그냥 넘어가 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도 싫은데, 막 어떻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서요.”
원래 방송사보다 연예인이 위인 건가?
아니면 그냥 함다은이라는 사람이 방송사보다 힘이 센 건가?
세영으로선 알 수가 없었다.
그냥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네에, 알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복 받으실 거예요. 정말 여기서나 하는 얘기지만 함다은 씨 때문에 촬영장 분위기도 다 어그러지고. 오늘 너무 힘들었거든요. 갑자기 대타를 구하라고 하질 않나.”
“하하, 네…….”
“세영 씨 덕분에 살았어요. 진짜 감사드려요.”
막내 작가는 연거푸 감사 인사를 했다.
스튜디오에 도착해가는지 막내 작가의 걸음 속도가 느려졌다.
세영은 숨이 차서 뒤에서 헐떡였다.
“여기에요. 그럼 바로 안으로 들어갈게요?”
세영이 대답하기도 전에, 막내 작가는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