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숙은 때마침 세영이 움츠리는 모습을 봐버렸다.
그 옆에는 세영의 또래로 보이는 커플이 지나가고 있었다.
딱히 그 사람들이 세영에게 무슨 짓을 하지 않았지만, 세영이 움츠러든 원인이 그들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낯선 사람 자체가 세영을 움츠리게 만든 것 같았다.
그 짧은 장면이 세영이 학교에서 무슨 일이 겪었는지 알려주는 것 같아 연숙은 마음이 아팠다.
그러고 보면 세영이 처음 학원에 나왔을 때도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원래 낯을 가리는 아이긴 했지만 그렇게 경계하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는데.
왜 그때는 별생각 없이 지나쳤는지…….
좀 더 빨리 알아차릴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 계속 후회로 남았다.
연숙은 이내 생각을 떨쳐냈다.
후회해서 바뀌는 건 없다.
지금이라도 조금씩 바꿔나가면 됐다.
연숙은 자신에게 걸어온 세영의 어깨를 힘껏 감싸 안았다.
세영과 연숙은 우동을 앞에 두고 테이블에 앉았다.
요즘은 잘 볼 수 없던 옛날식 냄비우동이 반가웠다.
한입 먹어보니, 친숙한 맛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뜨뜻한 우동 국물이 차갑던 몸을 데워주었다.
한동안 두 사람 다 먹는 데만 집중했다.
그러다 연숙이 먼저 침묵을 깼다.
“방송국에 가면 어쩌면 도겸이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 넓은 방송국에서?”
“얘, 도겸이 이렇게 놓치면 안 돼. 내가 너한테 그 얘길 듣고 정밀. 나는 정말 처음부터 도겸이가 괜찮은 녀석인 줄 알았다.”
세영에게서 도겸과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 원래도 높았던 연숙의 마음속 도겸의 주가는 상한가를 찍다 못해 뚫을 기세였다.
“먼저 학교 일부터 해결하고 싶어.”“네가 그렇다면 말리진 않겠지만, 모든 일은 타이밍이 있는 법이야. 그리고 한 번 기회를 놓치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 명심해라.”
“……명심할게.”
세영은 다시 우동에 집중하려 했다.
맛있기만 하던 우동이 더는 맛있게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일엔 타이밍이 있다는 연숙의 말만 귀를 맴돌았다.
그냥 꾸역꾸역 입에 우동을 밀어 넣었다.
연숙과 휴게소 안 가게들을 한 번씩 휩쓸고 나서야 세영은 차로 돌아올 수 있었다.
연숙은 운전대를 잡으며 세영에게 말했다.
“좀 자 둬. 두, 세 시간 뒤면 도착할 거야.”
“알겠어.”
선선히 수긍하고 세영은 자신의 겉옷을 담요처럼 둘렀다.
피곤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생각이 너무 많았다.
세영은 오랫동안 몸을 뒤척였다.
그러다 피곤을 못 이겨 선잠이 들었다.
잠시 후 세영이 눈을 떴을 땐 서울이었다.
* * *
촬영은 진도가 좀처럼 나가질 않고 있었다.
예능 토크쇼라 사전 인터뷰를 기반으로 얻은 몇 가지 주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아주 평범하고 찍기 쉬운 프로그램이었건만…….
괜찮은 장면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은 때마다 꼭 다은이 훼방을 놓았다.
방송에 내보낼 수 없는 발언을 한다거나 도겸에게 과한 스킨십을 시도하는 등, 방법도 다양했다.
그 바람에 자꾸만 스튜디오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스태프도, 출연진도 모두 지쳐만 갔다.
오로지 다은만 아무렇지 않게 있을 뿐이었다.
결국은 보다 못한 PD가 잠시 휴식을 선언했다.
도겸과 승완, 미연은 휴식이라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스튜디오 밖으로 향했다.
다은은 그들이 나가는 것을 눈여겨보며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그녀의 매니저가 헐레벌떡 그녀에게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이 전 매니저가 마음에 들지 않아 새로 뽑은 매니저는 아직 모든 게 서툴렀다.
그래서일까, 뛰는 폼마저 어색해 보였다.
조심스럽게 다은에게 음료를 건네며 매니저가 물었다.
“저 다은 씨……. 그래도 조금은 조심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PD님 표정도 좋지 않고…….”
“상관없어. 여기 있는 사람들이라곤 다 아빠 앞에서 설설 길 텐데 뭐.”
“하지만 방금도 보니까 도겸 씨 표정이 좋지 않던데……. 정말 괜찮을까요?”
“아, 넌 아직 모르겠구나.”
다은이 음료 뚜껑을 따서 들이킨 뒤 말했다.
“쟨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절대 나한테 뭐라 못 해.”
“절대로.”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지 매니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다은에게 밉보이지 않고자, 그저 고개를 주억거릴 뿐이었다.
한편, 도겸, 승완, 미연은 서둘러 복도로 나왔다.
승완과 미연은 다은의 눈길이 닿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두 사람은 한탄하기 시작했다.
“아~ 지친다. 지쳐.”
“이대로 가다간 촬영 시간이 평소의 배로 걸리겠어…….”
“진짜 돌아버리겠네. 쟤는 왜 저렇게 자꾸 훼방을 놓는 거야. 누나가 볼 때는 촬영장 분위기 어땠어?”
“내가 뒤에서 봤는데. 다들 억지웃음 같은 게 티가 나서 스태프분들이나 작가님들도 표정이 안 좋더라. 대체 왜 갑자기 출연진을 바뀐 거지? 굳이 다은이를 넣을 필요가 있었나?”
“진짜 내 말이. 축 가라앉은 분위기인데 계속 즐거운 척하려니까 얼굴 근육이 땅길 지경이야.”
“네가 고생이 많다.”
미연이 승완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평소엔 앙숙 같던 두 사람이 함다은이라는 공동의 적이 생기니 평소보다 더욱 친밀해졌다.
그렇게 서로를 위로하길 잠시, 승완과 미연은 아무 말이 없는 나머지 한 사람을 흘끔 바라보았다.
도겸은 생각에 잠긴 듯해 보였다.
두 사람의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훤했다.
먼저 말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결국 미연이 도겸에게 물었다.
“왜 그래?”
“…….”
“무슨 일 있었어?”
“……함다은이 알아버렸어.”
“뭐를?”
“설마…….”
승완은 전혀 감도 못 잡은 반면에, 미연은 단박에 알아차렸다.
도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가 생각하는 게 맞아.”
“아…….”
승완은 한 박자 늦게 감을 잡았다. 그는 누가 들을세라 낮은 목소리로 자기 생각이 맞는지 물었다.
“뭐야,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거야? 그 네가 좋아하는 여자분?”
“응.”
승완이 경악했다.
“와 세상에. 목소리가 작아서 안 들렸는데. 아까 그런 얘기를 하고 있던 거였어? 어쩐지 분위기가 심상찮다 싶었어.”
미연이 의심스럽다는 듯 물었다.
“한 번 떠보는 거 아니야?”
“아니. 확신하는 말투였어.”
“오늘 촬영도 그래서 바꾼 거 같아. 나한테 경고하려고. 이거 말고도 내 스케줄. 함다은이 어딜 가도 베이스로 껴있어.”
“와……. 그렇다고 남의 촬영 스케줄을 바꿔? 진짜 제멋대로다. 아주 아빠 덕을 톡톡히 보고 있구먼. 금수저가 무섭다. 무서워.”
“…….”
“그 여자애가 누군지도 아는 거야?”
“그걸 모르겠어.”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세 사람의 머릿속엔 의문만 가득해 뒤죽박죽이었다.
경악하고 있던 승완이 정신을 차리곤 대화에 끼어들었다.
“근데 진짜 어떻게 안 거지?”
“내가 내 입으로 말하는 걸 들었다는데.”
“네가? 너 그 여자에 대해 여기저기 말하고 다닌 건 아닐 거 아니야.”
“……그렇지.”
“진짜 너한테 사람이라도 붙여둔 거 아니냐. 전적도 있잖아.”
“아니. 그랬으면 직접 찾아왔을 텐데. 그런 적은 없었어.”
반쯤 농담 삼아 했던 말인데 도겸은 진지하게 대답했다.
설마 진짜 사람을 붙인 일도 있었나.
승완은 인상을 팍 찌푸렸다.
“으 아주 집착이……. 미저리가 따로 없다. 따로 없어.”
“어쩌면…….”
미연이 조심스럽게 가능성을 제시했다.
“아까 대기실에서 우리가 얘기하고 있던 걸 들은 거 아닐까.”
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도 말은 하지 않지만, 침묵만으로 서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승완과 미연이 도겸에게 사과했다.
“미안하다. 우리가 얘기만 안 했어도 몰랐을 수도 있는데.”
“맞아. 우리가 흥분해서 평소보다 큰 목소리로 말했어. 미안해.”
“아냐. 모르는 일이잖아. 그리고 그렇다고 해도 두 사람이 사과할 이유는 없어.”
도겸은 단호하게 말했다.
두 사람이 잘못한 것은 없었다.
모두 다은이 나쁜 거였다.
남의 대화를 엿듣는 일도. 도겸이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를 괴롭히려 하는 것도 말이다.
단호한 도겸의 태도에도 두 사람은 마음이 무거웠다.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자신들이 원인을 제공한 것만 같았다.
“마음에 담아두지 마. 아까 우리의 대화를 들어서 알았다면 그나마 다행이지.”
“…….”
“그런 거면 아직 누군지는 모를 텐데.”
차라리 그렇다면 그나마 다행인 상황이었다.
적어도 다은이 누군지 알아낼 동안의 시간을 벌었으니.
최선은 아니지만, 그동안 어떡하면 좋을지 나름의 대책을 세울 수 있었다.
도겸은 좋게 생각하려 했다.
미연은 죄책감이 서린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그 여자분 위험한 거 아니야?”
“…….”
“네가 주변 여자들한테 눈길 한 번 안 줄 때도 저렇게 집착을 했는데, 네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다고 하면 그 자존심 높은 애가 가만두고 볼 리가 없잖아.”
“괜히 우리 때문에…….”
미연이 고개를 떨궜다. 도겸과 승완이 그녀를 다독였다.
“신경 쓰지 말래도. 언젠가 일어날 일이었어.”
“그래. 너무 상심하지 마. 아니 그래도 일반인이면 함다은이 손을 못 대지 않나? 우리야 뭐 연예인이니까 걔 아버지 때문에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린다고 해도…….”
승완은 말끝을 흐렸다. 그리곤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아니다. 회사에 잘리게 한다거나 할 수도 있겠네. 조심해야겠다.”
“넌 아직 모르는구나. 그 여자분 대학생이야.”
“뭐어?”
미연의 정정에 승완은 깜짝 놀랐는지 눈이 휘둥그레졌다.
“와, 나는 당연히 잘나가는 커리어 우먼 이런 느낌을 상상했는데. 대학생이라니 의외다.”
도겸은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대체 미연도 그렇고 승완도 그렇고 왜 다들 도겸의 상대로 사업가나 커리어 우먼 같은 모습을 상상하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럼 크게 뭐 괴롭힐 수 있나?”
가벼운 승완의 생각에 미연이 타박했다.
“너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거 아니야? 다를 게 뭐가 있어. 오히려 일반인이니까 더 제약 없이 과감하게 괴롭힐 수도 있지.”
그 뒤 미연은 다양한 경우의 수를 제시했다.
“우연한 사고처럼 뒤에서 손을 쓸 수도 있고. 아니면 직접 협박을 할 수도 있고. 또 도겸이랑 엮어서 그분을 안 좋게 말하는 루머를 만들 수도 있고. 그러면 일상생활 불가능할걸. 우리나라 네티즌들이 얼마나 무서운데. 하루 만에 신상 다 털릴 거다. 더 말해 볼까?”
“아냐. 괜찮아. 충분해.”
그렇게 말하곤 승완도 덩달아 침울해졌다.
“나랑 누나가 좀 더 조심했어야 했는데 미안하다.”
네티즌이라는 단어에 도겸의 표정은 더욱더 어두워졌다.
도겸은 망설이다 운을 뗐다.
“문제가 있어. 두 사람한테는 말을 안 했는데,”
도겸은 세영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요약해서 말하되, 세영도 속은 피해자였다는 것을 강조했다.
도겸의 이야기가 끝나고 두 사람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진짜 큰일이다. 남의 상처 후비는 게 취미인 계집애가 이런 좋은 기회를 그냥 넘길 리가 없잖아.”
“그런 상황인데 너랑 엮이면 소문이 더 부풀려질 수도 있겠어.”
세영이 순진한 도겸을 꼬셨다는 둥. 도겸은 아무것도 모르고 바보같이 당했다는 등 말이다.
도겸이 한숨을 푹 쉬었다.
“그렇겠지…….”
미연이 승완과 묘한 눈빛을 나눈 뒤 물었다.
“나랑 승완이가 뭐 도와줄 수 있는 건 없을까?”
“맞아. 할 수 있는 건 다 해볼게.”
들어보니 그닥 좋은 상황이 아닌 것 같았는데, 다은이 그사이에 껴들었다간 없던 썸도 깨질 판이었다.
애초에 아예 모르게 해야 했는데.
도겸이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친한 두 사람이 이대로 손 놓고 보고 있을 순 없다는 것이 둘의 결론이었다.
도겸이 거절하기도 전에 미연이 먼저 선수를 쳤다.
“괜찮다고 하지 마. 너 솔직히, 다은이한테 제대로 화낼 수도 없잖아. 그런 상황에서 혼자 뭘 할 수 있겠어?”
“그래. 안 그래도 너한테 관심 집착 가득한데. 네가 뭘 하든 함다은 귀에 들어갈 거다. 으으, 끔찍한 계집애.”
“그러니까 우리가 도와줄게.”
“근데 우리도 이래놓고 아무 도움 안 될 수도 있어. 누구누구 말대로 실력도 없는- 아!”
미연이 승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승완의 다리를 걷어찼다.
며칠 전, 대기실에서 다은이 했던 말을 기억나게 했던 탓이다.
“실력이란 단어 꺼내지 마라. 안 그래도 내가. 후,”
“아니 그렇다고 바로 걷어차냐.”
구두 코 끝이 꽤나 아팠는지 승완이 다리를 붙잡고 찡찡댔다.
흥. 미연은 속이 다 시원했다.
‘실력도 없으면서 어떻게 여전히 도겸이 옆에 붙어 있네?’
당시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시시때때로 그 말이 생각나는 바람에 미연은 화가 나서 애꿎은 허공에다 여러 번 발길질을했다.
승완은 여전히 투덜댔다.
“누나는 그때 진작 화를 냈어야지. 화도 못 내는 바보도 아니고.”
“호호. 화내다 나 잘리면 어떡하라고. 네가 책임질 거야?”
책임이라는 말에 승완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모습을 흘겨본 뒤 미연이 도겸에게 몸을 돌렸다.
“그래서? 뭐 혹시 생각해뒀던 방법이라도 있어?”
“학교로 일단 찾아가보려고 했어.”
“그다음엔?”
“……멱살이라도 잡고 몸의 대화를 해볼까 했지.”
“미쳤어. 얘가.”
그 말에 깜짝 놀라 미연이 도겸의 팔을 가볍게 때렸다.
“너 그러다가 폭행이라고 신고당하면 어쩌려고.”
도겸이 불퉁하게 말했다.
“양다리나 걸치는 새끼가 좋게 말한다고 알아듣겠어? 그딴 놈한테 베풀 친절은 없어.”
“이 친구 화가 많이 났네.”
승완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이런 모습 처음 본다. 그래도 그렇지, 그러다가 안 좋은 기사 나고 네 이미지 추락하면. 그 여자애 입장에서 달가울까? 그거야말로 정말 부담되는 일 아니야?”
도겸이 입을 다물었다.
예리한 지적이었다. 세영이 달가워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딱히 좋은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아무도 좋은 방법을 못 내고 있을 때 미연이 눈을 빛냈다.
“그럼 이런 방법은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