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 중인 밴 안에는 도겸과 민수만 있었다.
웬일로 둘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도 없어 차 안은 고요한 분위기였다.
그때, 도겸이 아주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쉬었다.
“하아…….”
이걸로 일곱 번째 한숨이었다.
도겸은 거의 1, 2분 간격으로 계속해서 한숨을 쉬고 있었다.
결국 운전석에 있던 민수가 도겸에게 벌컥 소리를 질렀다.
“뭐! 왜!”
높은 데시벨에 깜짝 놀란 도겸이 민수를 흘겨보며 말했다.
“아 깜짝이야. 형은 왜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그래.”
자기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왜 생사람 잡느냐는 듯한 말투에 민수가 핸들을 힘껏 움켜쥐며 도겸에게 말했다.
“왜 자꾸 그렇게 한숨을 쉬는데! 할 말 있으면 말로 하라고! 말로.”
“아니, 그냥 한숨이 나오는 걸 어떡하라고.”
“네가 나 눈치 보라고 그러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도겸이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며 툴툴거리자 민수가 룸미러로 도겸을 노려보며 말했다.
마침 빨간불에 걸려 차가 멈췄다. 익숙한 길이라 이곳 정지 신호가 길다는 걸 아는 민수는 몸을 돌려 도겸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미안하다고 말했잖아.”
사과했던 것을 상기시켜줘도 도겸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일주일 잡혀 있던 도겸의 스케줄 중 오늘은 나흘째였다.
그런데 그 빽빽하던 스케줄의 딱 중반 즈음인 오늘, 갑자기 민수가 스케줄이 늘어났다는 말을 해온 것이다.
그건 앞으로 며칠 뒤면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도겸의 입장에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그래서 지금 도겸이 이렇게 ‘나 화났소.’ 하고 있는 대로 티를 내고 있던 것이다.
민수는 애같이 구는 도겸이 짜증 나긴 했지만, 애초에 약속했던 것도 자신이고, 도겸의 마음도 이해가 되는지라 민수가 다시 한 번 사과를 했다.
“갑자기 스케줄이 늘어나서 미안해.”
“…….”
“근데 나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는 것만 좀 알아줘라.”
“…….”
정말로. 민수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는 건 사실이었다.
사장님이 갑자기 웬 일감을 들고 와서는 이걸 꼭! 꼭! 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민수가 거절하고 싶어도 거절할 수가 없지 않은가.
신호가 초록 불로 바뀌었다. 민수는 다시 정면을 바라보고 차를 출발했다.
그때까지도 말이 없던 도겸도 기세를 한 풀 꺾고 민수에게 사과했다.
“아냐, 내가 미안해. 형도 어쩔 수 없는 건 아는데…….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했어.”
“괜찮아. 그럴 수 있지.”
민수와 서로 화해를 한 뒤 도겸은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도겸의 스케줄은 이미 빽빽했기 때문에 사장님이 들고 온 새 일들을 끼워 넣을 틈이 없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서울에 머무는 기간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늘어난 것이 삼 일. 도겸의 스케줄은 총 열흘이 되고 말았다.
스케줄이 시작되기 전 서울에 삼 일을 일찍 왔으니 거의 보름을 세영과 떨어져있게 된 것이었다.
세영은 대체 어떻게 지낼까. 자신을 생각하고는 있을까.
아직까지도 아무런 연락이 없는 핸드폰을 보니 울적한 생각만 들어 도겸은 창에 이마를 맞대고 눈을 감았다.
“토요일이라 그런가, 차가 막히네.”
꽉 막힌 도로를 보며 민수가 중얼거렸다.
혹시라도 방송국에 늦게 도착할까 봐 걱정스러운 기색이었다.
민수를 안심시켜주려고 도겸이 말했다.
“일찍 출발했으니 괜찮을 거야. 너무 조급해하지 마.”
“그렇겠지?”
충분히 여유 시간을 두고 출발했는데 설마 늦겠어.
민수는 침착함을 찾은 것 같았다.
하지만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도통 움직일 생각을 않는 차들로 인해 두 사람은 아슬아슬한 시간에야 방송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도 아까워 대기실까지 뛰어 올라가면서 도겸은 그냥 재수가 조금 안 좋았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네? 출연진이 바뀌어요?”
조용한 대기실 안. 커다란 민수의 목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촬영 시작 직전, 스태프가 찾아와 전해주는 공지사항이었다.
도겸은 미연에게 빠르게 메이크업을 받으며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스태프가 민수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갑자기 바뀌어서 미리 알려드리려고요.”
누가 갑자기 펑크를 내기라도 했는지. 흔치 않은 일에 민수가 오늘 참 희한하다는 생각을 하며 물었다.
“그래서 바뀐 출연진이 누군데요?”
“그게…….”
눈치를 보며 대답을 하길 망설이는 스태프의 모습에 민수가 인상을 찌푸렸다.
“누군데요?”
민수의 눈을 마주하지 못하며 스태프가 그 이름을 뱉었다.
“그……. 함다은 씨입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도겸에 대한 다은의 집착은 방송국 내에서도 유명한지라, 말단이어서 도겸에게 이 사실을 전하는 일을 맡게 된 스태프는 어쩔 줄 몰랐다.
“저…….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그 임무를 완수한 당사자는 문을 닫고 얼른 도망가 버렸다,
민수는 닫힌 문에서 눈을 떼고 도겸을 바라보았다.
도겸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 * *
도겸의 수난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 뒤로도 스케줄이 변경되거나 추가되었다는 연락이 민수의 핸드폰에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스케줄에는 어김없이 다은이 껴있었다.
심지어 드라마 속 상대 배우와 찍기로 되어 있던 광고마저도 다은과 같이 찍는 것으로 변경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이쯤 되면 다은이 의도적으로 도겸의 스케줄에 압력을 가했다는 것이 뻔히 보였다.
그리고 그 가증스러운 인간은 지금 뻔뻔하게 도겸의 눈앞에 앉아 있었다.
촬영장 안은 도겸의 스케줄을 헤집어놓고 어김없이 당당한 모습으로 도겸의 옆자리에 앉은 다은과 그녀를 노려보는 도겸으로 인해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사람들은 두 사람에게 시선을 주지 않으면서도 두 사람에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미연과 민수, 그리고 같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된 승완도 있었다.
묘한 침묵 속, 다은을 노려보고 있던 도겸이 먼저 입을 열었다.
“미쳤어?”
도겸의 말에 다은이 웃으며 고개를 갸우뚱해 보였다.
“내가 미쳤다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진한 표정이 도겸의 화를 더 끓어오르게 했다.
하지만 다은은 자신으로 인해 화를 내는 도겸의 모습이 보기 좋은지 되려 더 진하게 웃어 보였다.
“이젠 숨기려는 노력도 안 하냐? 너랑 나랑 같이 드라마를 찍은 것도 아닌데 이렇게 계속 묶여서 방송에 나오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안 여길 것 같아?”
“상관없어. 이참에 뭐 좀 같이 하나 찍을까?”
“하.”
기가 차서 도겸이 헛웃음을 흘렸다.
“진짜 말이 안 통하네.”
애꿎은 머리만 쓸어넘기며 도겸이 다은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다은이 미소를 거두며 말했다.
“그러게 누가 눈을 딴 데로 돌리래?”
“……뭐?”
“아니면 적어도 들키지 말았어야지.”
순간, 안 좋은 예감이 스쳐갔다.
설마, 어떻게 안 거지.
아니, 떠보는 걸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감정의 동요를 내비치지 않으려 도겸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도대체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하하하.”
뭐가 그렇게 웃긴지 다은이 큰 소리로 웃었다.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다은에게 집중되었다가 다시 흩어졌다.
다은이 비웃음을 흘렸다.
“시치미 떼지 마. 네 입으로 말하는 걸 직접 들었으니까. 날 속이려 들어?”
확신하는 말투에 도겸의 눈이 흔들렸다.
“그렇게나 소중한가 보지?”
대답하지 않으며 도겸은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다리를 꼬아 앉으며 다은이 방글방글 웃어 보였다.
“이번엔 얼마나 갈지 기대되네.”
말과 어울리지 않는 청순한 미소였다.
그 말에 도겸이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꿈도 꾸지 마.”
“…….”
“그 애한테 손대기만 해봐. 나도 가만히 안 있어.”
다은은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뭘 할 수 있는데?”
도겸을 가소롭게 바라보며 다은이 웃었다.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
그를 비웃는 말에 도겸은 뿌득 이를 갈았다.
그런 그를 놀리듯 가까이 다가온 다은이 귓속말로 말했다.
“그렇게 말해도 결국 넌 나한테서 못 벗어나. 너도 잘 알 텐데.”
연예계 내에선 그녀의 말 한마디로 모든 일을 뺏길 수 있었다.
그렇기에 연기하는 일을 좋아하는 만큼, 도겸은 다은에게서 거스를 수 없었다.
그것이 주변 사람들이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알면서도 큰 도움을 못 줬던 이유였다.
고작 화를 내고 다은을 욕하는 것, 그리고 그 사람들을 멀리하는 것이 전부였다.
결국은 다은의 뜻대로 일이 흘러간다는 것이.
그것이 도겸에게 있어선 너무나 치욕스러운 일이었고 무력감을 느끼게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달랐다. 도겸의 나름대로 필모그래피를 쌓았고 인지도를 올렸다.
이대로 그냥 당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도겸은 다은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이럴수록 난 네가 더 싫어져. 끔찍하게 싫다고.”
“…….”
“역겹다고.”
다은의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도겸이 어떤 말을 하든 다은은 아무런 타격을 받지 않았다.
그것이 더욱 도겸을 화나게 했다.
“나도 이제 더는 가만두지 않아. 건들지 마.”
다은으로 인해 모든 일을 잃게 된다고 해도, 그녀 또한 끌어내려 버리겠다는 결연함이 도겸의 눈에 가득했다.
다은은 속으로 웃었다.
도겸이 더 반항하면 반항할수록 자신의 쾌감은 더 끓어오른다는 것을 왜 모를까.
쉽게 순응하는 것은 재미없었다.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다은이 말했다.
“어디 한 번 해보시던가.”
도겸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그 모습을 쭉 지켜보고 있던 승완과 미연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다은의 행패를 계속 이렇게 지켜볼 수만은 없다는 것은 도겸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무언가 대책이 필요했다.
* * *
한편.
시간을 조금 전으로 돌린 금요일 밤, 세영은 수업을 마치자마자 연숙의 차를 타고 서울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차 안에서, 세영은 잠들지 않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울로 가자고 결정한 뒤, 세영은 계속 곰곰이 생각했다.
도겸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자신을 둘러싼 소문 때문이었다.
그것이 언젠가 도겸에게 피해가 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그저 도겸을 밀어낼 생각만 했다.
하지만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은 아니었다.
원인이 되는 소문을 해결한다는 방법이 있었는데, 그럴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그럴 만큼의 용기는 없었다는 말이 더 정확했다.
그녀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피하기만 급급했다.
초반에 오해라는 해명만 몇 번 하다 지쳐서 모든 걸 포기해버렸다.
그때는 그게 올바른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너무 지쳐있었고, 자신이 발버둥 치면 칠수록 사람들의 관심만 끌어모을 뿐이라며 쉽게 포기했다.
그 뒤로 포기하는 것이 버릇된 건지, 그녀는 도겸마저도 쉽게 포기해버렸다.
세영은 씁쓸하게 웃었다.
도겸이 그로 인해 얼마나 상처받았을지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웠다.
지금이라도 도겸을 만나 사과해야 했다.
그러려면 도겸을 만나기에 앞서,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다.
선배. 호진 선배.
오랜만에 떠올리는 이름이었다.
그동안 의식적으로 떠올리지 않으려 했던 이름.
그를 만나 소문을 바로잡을 것을 요구해야 했다.
그가 과연 자신의 말을 들어줄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더 이상 뭘 해보기 전에 먼저 손 놓고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대학교는 아직은 학기 중일 터였기에 세영은 조금 더 서울에 머무르며 학교에 다녀올 생각이었다.
자신의 계획을 말하니 연숙은 기꺼이 자신도 함께 남겠다고 말했다.
세영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면서 위험하게 홀로 보낼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세영은 괜찮다고 했지만 연숙은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학원 사람들에게 미리 양해를 구하고 그 주 수요일까지의 수업을 빼두었다.
그 대신 학원 사람들에게는 그 이상의 학원이 할인을 약속하였다.
손해를 감내하면서까지 자신과 함께 가주겠다고 하는 이모에게 세영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마움을, 그리고 그녀를 지탱해줄 사람이 있어 든든함을 느꼈다.
세영은 결심을 다시 한 번 강하게 다졌다.
자신이 놔두고 도망친 문제를 이제는 해결할 때였다.
“세영아. 여기서 휴게소 좀 들렀다 가자.”
창밖을 보고 있는 세영을 연숙이 불렀다.
아무래도 장시간 운전은 부담이 되는지라 조금 쉬고 가자는 연숙의 말이었다.
“응. 그래.”
“휴게소는 오랜만이네. 맛있는 거로 배도 좀 채우고 갈까?”
이모 우동이 먹고 싶네. 연숙이 말했다.
어쩐지 목소리에서 신난 기색이 느껴져 세영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나도 지금 좀 배고픈 것 같아.”
밝게 대답하는 세영을 보며 연숙은 조금 안심하며 더 큰 웃음을 돌려줬다.
휴게소 쪽으로 차를 향했다.
주차장 안에 들어서니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차가 드문드문 차 있었다.
주차를 한 뒤에 차에서 내리며 연숙은 신난 말투로 늘어서 있는 가게를 쭉 훑었다.
“어디 보자. 뭘 먹으면 좋을까. 저기 알감자도 맛있어 보인다. 호두과자도 오랜만이네. 이따가 사들고 가서 차 안에서 먹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어때?”
보이는 족족 다 살 것 같은 연숙의 기세에 웃으면서도 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좋아.”
“훌륭하다. 오늘 한 번 배 터지게 먹어 보자.”
장군처럼 호탕한 목소리로 웃으며 연숙은 지갑을 들고 앞장섰다.
“일단 몸을 따듯하게 해줄 뜨끈한 국물부터 시작해볼까.”
그 뒤를 따르며 세영은 조용히 웃었다.
푸드코트 안으로 들어설 때 반대편에서 나가기 위해 다가오는 세영 또래의 커플이 보였다.
즐겁게 웃고 떠들던 그들과 눈이 마주치자 세영은 저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런 세영을 보며 왜 저러나 잠시 갸웃거리던 커플은 이내 아랑곳하지 않고 옆을 지나쳐갔다.
그제야 세영도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세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은. 낯선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불안했다. 몸이 먼저 반응하고 말았다.
움츠러들고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그러다 세영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앙다물었다.
이래선 안 됐다. 조금씩 얼른 적응해야 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보든 이제는 자신의 편이 되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이 예전과 지금의 차이였다.
세영은 다시 고개를 들고 앞으로 나아갔다.
다시는 움츠려 들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