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은은 대기실 소파에 앉아 조금 전 있었던 일에 대해 떠올렸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다은은 기분이 좋았다.
어디에 꼭꼭 숨은 건지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던 도겸이 스케줄이 생겨 방송국을 찾았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곧장 오늘 잡혀있던 스케줄을 모두 취소해버렸다.
다은이 단순한 연예인이었다면 바로 태도 불량으로 논란이 됐을 일이지만, 그녀는 그래도 됐다.
다은의 든든한 뒷배경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다은의 실체는 이미 연예계 내에서는 공공연하게 알려진 일이었지만, 아무도 그에 대해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 뒤 다은은 바로 도겸이 있다는 곳으로 향했다.
꽤 오랫동안 그를 보지 못했기에 보고 싶기는 했지만, 내색하지 않는 느긋한 태도였다.
도겸의 대기실에 도착해 문을 열려던 차에 안에서 대화 소리가 들렸다.
평소였다면 무슨 대화를 하고 있든 개의치 않고 문을 벌컥 열어 재꼈겠지만, ‘여자’란 단어가 그녀를 멈칫하게 했다.
“그래서 그 여자가 어떤 사람인데?”
남자의 목소리였지만 도겸이 아니었다. 다은도 잘 알고 있는, 승완의 목소리였다.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지만, 이곳은 도겸의 대기실, 승완의 대화 상대가 도겸이라는 것은 손쉽게 유추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아니 궁금하잖아. 쟤가 저렇게 여자에 목메는 건 처음 보는데.”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승완이 억울한 듯 말했다.
그리고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겸아, 내가 아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 생각엔 그냥 네가 원래 대하던 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이번에도 다은은 쉽게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다은을 짜증 나게 하는 미연이었다.
다은은 도겸 근처에 있는 여자라면 누구든 거슬렸다. 도겸의 옆에 일을 핑계로 끈질기게 붙어있는 미연은 유독 더 그랬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미연이 아니었다.
그때 들려오는 도겸의 목소리.
“……부담스러울 것 같다면서?”
도겸은 부정하지 않았다.
다은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
여자. 그것도 도겸이 목메고 있는 여자.
그것이 다은을 무척이나 거슬리게 했다.
아니, 거슬린다는 말로는 다은의 감정을 모두 표현할 수 없었다.
다은은 지금껏 자신이 원한 것은 무엇이든 가져왔다.
그중에서도 사람을 다루기가 제일 쉬웠다. 원하는 것을 주고 쾌락을 주기만 하면 사람들은 순식간에 다은이 원하는 대로 되었다.
손쉬웠다. 그래서 모든 것이 너무 쉽고 지루해질 무렵, 도겸을 만나게 되었다.
도겸은 달랐다.
좋든 싫든 자신에게 먼저 숙이고 보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도겸은 다은의 눈치를 보긴 녕, 다은에게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 모습이 다은을 자극했다. 그는 그녀의 승부욕과 소유욕을 불러일으켰다.
얼마나 희귀하든, 상대방이 저항하든, 결국은 모두 다은의 손안으로 들어왔다.
그렇기에 다은은 도겸 또한 곧 자신의 것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게임도 어려울수록 깼을 때의 보상이 더 달콤한 법이기에 그가 제 것이 되었을 때 얼마나 즐거울지, 상상만 해도 즐거웠다.
하지만 그에게 자기가 아닌 여자가 생겼다니, 다은은 다리를 꼬고 앉아 그녀를 어떻게 그의 곁에서 지쳐 떨어지게 하면 좋을지 생각했다.
괴롭힐 생각을 하자 다은은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결국 다은은 참을성이 없어 그 여자가 누구인지 듣게 되기 전에 문을 열어버리고 말았지만 어차피 못 들었다고 해도 다은이 못 알아낼 것은 없었다.
“이번에는 얼마나 버티려나…….”
다은이 한 번 손을 대면, 다들 6개월도 채 버티지 못하고 떨어져 나갔다.
과연 어떤 여자일까, 어떤 여자든 도겸의 마음에 든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주겠다는 생각을 하며 다은은 사람들이 청순함의 극치라고 칭찬하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 * *
“아, 진짜 너무 싫다.”
대기실을 나서고 얼마 안 가 승완이 나쁜 것을 털어내듯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미연은 지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다은이 대기실에 있던 시간은 십 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사람을 이렇게 피곤하게 만드는 것도 재능일 거라고 미연은 속으로 생각했다.
“도대체 걔는 네 스케줄을 어떻게 알고 오는 거지?”
승완이 인상을 있는 대로 구기며 투덜댔다.
미연은 계속 문을 닫기 전 마지막으로 봤던 다은의 표정이 아른거려 승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체 왜 그렇게 표정을 구긴 것인지, 이유를 알 수 없어 더욱더 찝찝했다.
“사람이 싫어하는 걸 뻔히 알면서 저렇게 굴고 싶을까.”
“도겸아, 조심해.”
미연은 아무래도 다은의 표정이 마음에 걸려 도겸에게 말했다.
말이 없었지만 승완과 마찬가지로 인상을 구기고 있던 도겸이 미연을 바라봤다.
“뭐를?”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아. 나올 때 보니까 다은이 표정이 싹 굳어 있더라고.”
“…….”
“너에 대한 거에는 광적으로 집착하는 애잖아. 그 여자애에 대해 알게 되면…….”
미연은 말끝을 흐렸지만 그 ,어떻게 될지는 도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지금껏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왔던 여자들이 어떻게 됐는지 제 눈으로 똑똑히 봐왔으니 말이다.
“……알겠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도겸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도겸은 예전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다가오는 사람들이 적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알지 못했다.
자신에게 관심을 표했던 사람들에게 얼마 안 가 안 좋은 일이 생겨도 그저 운이 좋지 않았나보다 생각했다.
그러다 그런 일이 계속 이어지다 보니 이상함을 감지했다.
그런 우연이 몇 번이나 반복될 리 없지 않은가. 그러다 보니 의심을 안 하려야 안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의심일 뿐, 확신은 하지 못하고 있을 때, 한 동료 배우가 버티다 버티다 힘에 겨워 도겸에게 실토했다.
다은이 도겸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라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괴롭히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그 괴롭힘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연예인으로서 활동에 치명적인 루머에 휩싸이거나 사고로 어딘갈 크게 다치는 일도 있었다.
도겸에게 그 사실을 알린 그녀도 다은으로 인해 연예계 일은 그만두면서 그에게 말했던 것이었다.
그제야 그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다은이 모든 일의 뒤에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고 보면 다은만이 그의 주변에서 다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성적인 관심은 없었지만 같은 동료이기에 아무런 일도 없는 것을 다행이라 여겼는데, 그게 모두 다은이 범인이기 때문이었다니.
충격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그녀는 너로 인해 내가 이런 일을 겪어야 했다고 도겸을 원망하며 떠나갔다.
자신의 탓은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그 일은 오랫동안 도겸의 마음속에 짐으로 남아있었다.
자신이 좀 더 빨리 알았다면 그런 일이 조금은 줄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세영의 존재를 들켜서는 안 됐다. 특히 그녀에게 다은이 괴롭힐 수 있는 약점이 있으니 더더욱.
오래된 일이긴 해지만, 다은의 귀에 들어갈 위험이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쥐고 있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전부터 고민하고 있었는데, 세영에 대한 헛소문을 해결할 방법이 필요했다.
아무래도 학교라도 직접 찾아가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도겸은 승완과 미연의 뒤를 따라 스튜디오로 들어갔다.
잠시 후, 스튜디오 안은 예능 촬영이 한창이었다. 미연은 스태프들 사이에서 촬영이 진행되는 것을 보고 있었다.
도겸과 승완은 프로답게 즐거운 표정으로 촬영에 임하고 있었다.
바로 직전까지도 기분이 안 좋았던 티는 전혀 나지 않았다.
그때 스튜디오 안으로 다은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마지막으로 봤던 표정과 달리 굉장히 기분이 좋은 듯한 웃음을 얼굴 가득 짓고 있었다.
“괜찮겠지…….”
미연이 불안감에 휩싸여 중얼거렸다.
* * *
“세영아.”
전화를 받고 돌아온 연숙이 세영을 불렀다.
식자재를 정리하고 있던 세영이 왜 부르냐는 듯 고개를 들어 연숙을 바라보았다.
아무렇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아무래도 이번 주말에 서울을 가야 할 것 같네.”
“서울엔 왜?”
연숙이 세영의 옆으로 오면서 핸드폰을 주머니 속으로 넣었다.
“예전에 요리 경연 서바이벌에 심사위원으로 한 번 얼굴 비추기로 했던 걸 내가 깜박하고 있었지 뭐야.”
“다녀와야겠네. 서울 멀어서 이모 다음 날에 피곤하겠다.”
적당히 대답하면서 세영은 다시 재료 정리에 집중하려 했다.
“그래서 말인데, 너도 서울에 같이 갈래?”
갑작스러운 이모의 제안에 세영은 이모에게 표정을 보이지 않으려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아니 나는 여기 있을래.”
“왜, 같이 갔다 오자. 바람도 쐬고 좋잖아.”
머리 위에서 연숙의 아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
세영이 말이 없자 연숙이 설득하기 시작했다.
“여기는 솔직히 너무 적적하잖아. 이모 혼자 가면 너무 심심하니까 같이 갔다 오자.”
“그럼 이모부랑 다녀와.”
무뚝뚝한 세영의 말에 연숙이 입을 삐죽였다.
“야, 재미없게 집에서 매일 보는 아저씨를 왜 데려가.”
연숙은 망설이면서 뒷말을 이었다.
“그리고 너 혼자 두면 내가 걱정돼서 안 돼.”
“……날 왜 걱정해. 어디 다친 것도 아니고.”
“그럼 내가 어떻게 안 걱정해. 요즘 좀 밝아졌다 싶었더니 다시 이 모양 이 꼴인데.”
세영의 말이 끝나기를 무섭게 연숙이 반박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연숙은 속으로 쌓아뒀던 말을 모두 내뱉기 시작했다.
“너도 모든 스스로 알아서 하고 책임져야 하는 나이가 됐으니 내가 크게 관여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요즘 네 꼴이 어떤지 알아? 너 힘들어 보여.”
세영이 뭐라고 말할 틈도 없이 연숙은 계속해서 쏘아붙였다.
“너 스스로는 잘 속이고 있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가까이 있는 사람이 볼 때는 다 티가 나는 법이야. 걱정을 끼치지 않고 싶으면 얼른 다 털어버리고 괜찮아지던가.”
“…….”
“네가 말하기 힘든 것 같아서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힘든 게 보이는 데도 털어놓지도 않고 혼자서 끙끙대면 얼마나 속상한지 너는 모르지?”
연숙이 그렇게 속상해하고 있는지 몰랐던 세영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이모를 바라보았다.
매서운 기세로 하고 말을 하던 연숙은 조금 누그러진 어조로 말했다.
“허구한 날 골골대는 게 안 그래도 삐쩍 말라서 밥 잘 챙겨 먹고 있는지도 불안한데 이모가 너를 놔두고 갈 수가 있겠어?”
연숙의 눈에는 세영에 대한 애정이 가득했다.
연숙은 항상 자신을 아껴주긴 했지만, 솔직히 속으론 친자식도 아닌 자신이 귀찮게 여겨지진 않을까 걱정될 때가 있었다.
그래서 연숙에게 쉬이 투정을 부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된다면 연숙도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의 잘못이라고 말하진 않을까 두려웠었다.
그런 제 생각이 부끄러워 세영은 연숙과 눈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결국 터져 나온 눈물을 참지 못해 세영은 고개를 숙였다.
연숙은 울기 시작한 자기 조카의 어깨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힘들어도 혼자 끌어안으려고 하는 게 얼마나 답답했던 줄 알아? 나는 내가 속상했던 걸 이렇게라도 꺼내놔서 속이 다 시원하다.”
그리고는 펑펑 우는 세영을 조심스럽게 다독여주었다.
한참 울고 나서야 세영은 고개를 들었다.
“이모, 사실은…….”
어떤 말부터 해야 할지, 세영은 더듬더듬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하기 시작했고 연숙은 재촉하지 않고 묵묵히 세영의 말을 들어주었다.
뒷부분으로 갈수록 그 당시의 감정이 다시 흘러나오는지 세영의 목소리에 울음이 섞였다.
세영의 얘기가 계속될수록 연숙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한 시간이 넘도록 이어지고서야 막을 내렸다.
말하면서 연숙의 표정을 살폈을 때는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의 이야기가 끝나고 나서도 연숙이 한참 동안 반응이 없어 살짝 불안해질 무렵 연숙이 입을 열었다.
“이 미련한 것아.”
대뜸 그렇게 내뱉은 연숙은 자신의 가슴을 치면서 말했다.
“네가 그런 일이 있었던 줄도 모르고 나는……. 아이고.”
연숙의 ‘미련한 것아’라는 말에 당황하기도 잠시, 세영의 눈에도 눈물이 살짝 고여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세영은 온전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지금껏 혼자서 얼마나 힘들었어. 네가 이렇게 미련하게 참고 있던 줄 모르고……. 닦달해서라도 더 빨리 털어놓게 해야 했어.”
연숙이 세영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통곡했다.
그 품이 너무 따듯해서 더는 흐르지 않을 것 같은 눈물이 다시 터지고 말았다.
아이처럼 소리 내어 우는 세영을 안고 연숙이 분노에 싸여 소리쳤다.
“그 망할 놈의 자식은 어디 사는 새끼야! 내가 적어도 그놈 가운뎃다리를 쥐어뜯어 놔야 이 기분이 풀리겠다.”
격하면서도 속 시원한 연숙의 말에 세영은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어딜 감히 남의 집 귀한 딸한테 그런 짓을 해?”
씩씩거리던 이모는 울면서 웃는 세영을 흘겨보며 말했다.
“넌 뭘 속 좋게 웃고 있어. 울면서 웃으면 뭐 난다는 옛말 못 들었어? 욕도 아닌 말 한마디에 기분이 풀리면 어떡해? 하여튼 이렇게 착해 빠져서 당하기만 했겠지. 내가 그만큼 더 갚아주지 않고는 못 살겠다.”
그렇게 말하며 연숙은 세영을 더 꽉 끌어 앉았다.
애꿎게 이모의 화살이 자신에게 향했지만 세영은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이모의 말이 웃기기도 했지만, 이모는 자신의 편이라는 안도감이 더 컸다.
그제야 세영은 오랫동안 숨겨왔던 짐을 털어놓아 속이 시원하다는 감정이 들었다.
그러자 도겸의 얼굴이 떠올랐다.
도겸의 네 잘못이 아니라는 말 덕분에, 세영은 이렇게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그 말이 아니었다면 아마 세영은 이모에게 평생 말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껏 아닌 척하고 있었지만, 용기가 없어 도겸을 그냥 그렇게 보낸 것에 대한 후회가 밀려왔다.
그는 이미 세영에 대한 마음을 접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냥 이렇게 보내면 더 큰 후회만 남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도겸이 밀어내도 다가와 줬던 만큼, 이번에는 자신이 도겸에게 다가갈 때였다.
세영은 눈물을 닦아내며 연숙의 품을 벗어나 말했다.
“이모, 나 서울 같이 가고 싶어.”
갑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이해할 수 없었는지 연숙이 그저 눈만 끔벅이고 있자 세영이 결연한 표정으로 연숙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서울,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