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대에 몸을 걸치고 도겸을 기다리고 있던 민수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왔어?”
문을 열고 밴 안으로 들어온 도겸은 지친 표정이었다.
“이제 얼마나 남았지?”
“야, 아직 인터뷰 하나밖에 안 했어.”
오늘은 도겸의 스케줄이 시작되는 첫 날이었다. 그리고 방금 잡지사와 한 인터뷰는 오늘의 첫 스케줄이었다.
밤샘 촬영을 할 때도 쌩쌩하던 괴물 같던 녀석이. 민수가 어이가 없다는 듯 도겸을 바라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도겸은 목베개를 목에 끼운 뒤 고개를 젖히고 한탄했다.
“아 피곤해. 나를 부려먹네. 부려먹어.”
“허.”
계속해서 칭얼대는 도겸에게 민수가 헛웃음을 흘렸다. 요 사흘 간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찡찡거리면서 민수를 귀찮게 했던 도겸이었다.
어째 그 생각을 하니 화가 나서 민수는 다음 목적지인 방송국을 향해 차를 출발하면서 싸늘하게 말했다.
“어디 한 번 진짜 부려먹어줘? 너 그러다가 영영 못 돌아가는 수가 있다.”
그 말에 도겸이 입을 꾹 다물었다. 지금 무슨 말을 더 얹으면 민수는 정말 일을 더 잡아 올 터였다.
하지만 입이 삐죽 튀어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앞으로 일주일이나 더 서울에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쫌팽이.”
민수에게 들리지 않도록 도겸이 작게 중얼거렸다.
“방금 뭐라고 했어?”
“아무 말도 안 했어.”
귀신같이 그걸 알아들은 민수를 향해 그렇게 말한 뒤 도겸은 뚱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잡지사는 방송국과 가까웠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했다.
삐졌는지 대기실로 이동할 때까지도 아무 말이 없는 도겸을 보고 민수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는 잠깐 스태프분들 만나고 올 테니까, 넌 여기서 대기하고 있어.”
“얼른 가버려.”
민수에게서 등을 돌린 채로 툴툴거리며 말하는 도겸의 모습에 민수가 저걸 어떡해야 하나, 늦은 사춘기라도 온 건지. 속으로 중얼거리며 절레절레 고개를 젓고선 나갔다.
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한 도겸도 삐진 표정을 거두고 지친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곤 옆에 있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아.”
민수의 앞이라 티는 내지 않았지만, 요 며칠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 상태가 엉망이었다.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못한 이유는 모두 세영에 대한 생각 때문이었다.
며칠 전, 민수의 앞에서는 아무 생각 없이 긍정적인, 기운을 차린 듯한 태도를 보였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연기였다.
일부러 민수의 의도와 반대로 먹히는 듯한 태도를 보여서 입을 닫게 만들어버리려던 연기.
민수가 계속 세영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이 듣기 싫어서 그랬다. 그리고 민수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진 것을 보니 먹혀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그는 그 이후로 서울까지 입을 꾹 다물고 운전만 했으니깐.
하지만 실제로는 민수의 말은 제대로 먹혀들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불편했을 수도 있다는 말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뭐, 도겸 자체가 싫은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점은 다행이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가 됐든 세영이 자신을 곁에 두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문제는 똑같았다.
아니, 어쩌면 도겸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서는 더욱더 나빴다.
“어쩌면 좋지.”
의자 쪽으로 몸을 젖히며 도겸이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가까이 있는 것보단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좀 더 우울한 마음 정리에 도움을 줄 거라고 생각해서 서울에 일찍 왔지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세영이 앞으론 자신을 보려하지 않으면 어떡하나, 걱정만 늘어났다.
계속해서 안 좋은 생각만 들다 보니 예전의 그 쉴 틈 없이 바쁘던 스케줄 때처럼 몸이 힘들지는 않았지만, 대신에 정신적으로 지쳐왔다.
얼굴을 감싸고 있던 손을 내린 채 도겸이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은 채로 생각에 잠겼다.
도겸이 그렇게 피곤함에 눈을 감고 있을 때 스태프를 보러 갔던 민수가 돌아왔다.
민수는 자신이 들어오는 기척에도 도겸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자 말했다.
“설마 아직도 삐져있는 거야?”
“……아니.”
한 박자 늦은 도겸의 대답에 민수가 도겸의 반대편에 앉으며 말했다.
“스케줄 더 안 잡아. 걱정 마.”
“형이 스케줄 더 잡았으면 난 형 안 봤어.”
도겸은 그렇게 응수하면서 눈을 떴다.
민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니 그래도 도겸아. 정말 내가 몇 번이나 말하지만,”
“…….”
예상되는 다음 말에 도겸은 아무 말 없이 민수를 바라봤다.
“그 얘가 네 일에 타격을 줄 수도 있다니까.”
“…….”
“넌 정말 그래도 걔가 좋아?”
“응.”
“네 배우 생활이 끝장난다고 해도?”
극단적인 민수의 말에 잠시 도겸은 할 말을 잃었다. 잠시 고민한 뒤, 도겸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만 해도 도대체 몇 번째인지, 민수는 한숨을 푹 쉬면서 머리를 쥐어뜯었다.
“정말 너 미친 거 아니냐…….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그래도 난 류세영이 좋은 걸 어떡해.”
단호한 말에 민수는 정말 며칠 사이로 폭삭 늙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대체……. 그 여자애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해?”
정말 이해할 수 없어서 민수가 물었다.
“걔가 뭐라고 네가 좋아하는 연기까지 쉽게 포기할 수 있다고 말하는 건데.”
질문이 한 개 터져 나오자 그 뒤로도 민수의 질문은 줄줄이 이어져 나왔다.
“그리고 너는 무슨 자신감으로 그런 말을 나한테 당당히 하는 거야? 난 네 매니저라고.”
설득하는 건 바라지도 않았다. 도겸은 원래 고집이 셌고, 요즈음 도겸이 찡찡거리는 것만으로도 도겸이 세영을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민수는 도겸의 매니저기에 민수는 도겸의 사랑을 아주 응원할 수는 없었다. 거기다 배우 일을 포기할 수도 있다는 말은 더더욱 달갑지 않았다.
자신의 심정을 전부 설명하진 않았지만 도겸도 뜻을 이해했으리라.
“형이니까 말하는 거야.”
민수는 도겸에게 있어 세영과 다른 의미로 소중한 사람이었다. 그는 도겸이 루머에 휩싸였을 때도 쭉 자신의 곁을 지켜줬다.
민수 정도의 경력이 있는 매니저라면 다른 곳에서도 이직 제의가 많았을 텐데 말이다. 게다가 회사 내에서도 다른 연예인의 매니저로 이동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았던 민수에게 도겸은 항상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도 민수는 자신이 걱정돼서 그런 말을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민수에게만은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민수의 말대로 자기 일에 타격이 간다면 그 타격은 민수에게까지 갈 수 있으니 더더욱.
“나 때문에 형까지 괜히 휘말려서 위에서 욕먹는 건 바라지 않으니까.”
여차하면 형은 담당 연예인 얼른 바꿔버려. 그 말에 민수는 머리를 짚으며 도겸에게 말했다.
“아주 고맙다. 그래.”
비꼬는 말에 도겸이 슬쩍 웃었다.
“아직은 사귀는 사이도 뭣도 아니잖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그리고는 씁쓸하게 도겸이 중얼거렸다.
“먼저 세영이가 나를 좋아하긴 해야 뭘 하지…….”
그 모습에 민수는 하려던 말도 모두 삼키고 입을 꾹 다물었다.
* * *
방 안의 공기가 여느 때보다 차갑게 느껴졌다.
눈을 뜬 지 꽤 됐음에도 세영은 여전히 침대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도겸과 그렇게 헤어진 게 벌써 삼 일 전이었다.
그 사흘 간 학원에도, 어디에서도 도겸을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헤어지고 다음 날, 세영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학원에 나갔다.
“얘, 세영아. 도겸 씨한테 어제 연락이 왔는데 한동안 못 나올 것 같다더라. 너는 왜 그런지 알아?”
세영이 온 것을 발견한 이모가 가장 먼저 물은 말이었다.
그렇게 묻는 이모는 걱정스럽다기보다는 궁금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자세한 사정까진 말하기 좀 그랬겠지.
그래도, 한동안 못 온다니. 앞으론 오지 않을 거라는 정도는 말해도 괜찮았을 텐데.
도겸을 아끼는 이모라면 도겸이 언제 돌아올지 기다릴 거라는 걸 예상한 세영은 사실을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안 올 거야.”
“……어?”
세영은 그 말만 남기고는 이모를 지나쳐 교실 쪽으로 걸어갔다.
이모가 세영의 말뜻을 이해하기까지 잠시 시간이 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무슨 일이 있던 건데.”
무언가 둘 사이에 일이 있었다는 것을 직감한 이모가 세영의 뒤에서 물었다. 여전히 세영은 묵묵부답이었다.
“야, 류세영!”
연숙이 걱정스러운 듯 세영의 이름을 불렀지만 세영은 교실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교실 안에는 이미 학생들이 있었기 때문에 연숙은 더는 추궁하지 못하고 수업을 시작해야만 했다.
수업이 끝날 때까지 이모는 레시피를 설명하면서 틈틈이 세영의 얼굴을 살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세영은 그래서 일부러 더 괜찮은 척 평소와 같은 무표정으로 학생들 사이를 돌아다녔다.
그리곤 수업이 끝나고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뒷정리를 시작해서 되려 연숙이 눈치를 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주기 싫어?”
그러다 이모가 조심스럽게 세영에게 물었다. 행주로 조리대를 닦고 있던 세영은 닦던 것을 멈추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 모습에 연숙도 더는 묻지 않고 손을 움직였다. 하지만 그래도 마음이 좋지 않았는지 잠시 뒤에 다시 세영을 불렀다.
“세영아.”
자신을 부르는 이모의 다정한 목소리에 괜히 울컥한 세영은 더욱 무뚝뚝하게 굴었다.
“왜.”
“저번 일도 그렇고 이번 일도 그렇고 네가 말하고 싶지 않으면 이모가 더는 묻지 않을게. 네가 혼자서도 잘하는 아이라는 거 잘 알아. 그래도 네가 힘든 일이 있을 때면 언제든 이모는 옆에 있을 테니까. 너무 혼자서 다 끌어 앉으려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세영은 다물고 있던 입을 더 꾹 다물었다. 이모의 말에 예전 일이 생각났다.
대나무숲 일이 퍼지고 견디기 힘들어 학교를 갑자기 휴학하고 내려왔을 때도 지금과 같이 결국 아무것도 묻지 않은 이모였다.
이모는 항상 그랬다. 평소에는 고집스럽고 억척스럽게 굴면서 정작 이럴 때는 따져 묻지 않았다.
그저 곁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대해주고 세영에게 애정을 보여줬다. 그것이 이모 식의 배려였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로 홀로 남은 조카가 걱정스러웠는지, 항상 신경 써주고 있다는 걸 알았기에 괜스레 눈이 뜨거워졌다.
“알겠지?”
“……알겠어.”
울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세영이 끄덕였다.
그제야 연숙도 조금 안심이 됐는지, 웃으며 말했다.
“그래. 언제든 이모가 필요하면 말해.”
그 말에 세영이 조그맣게 연숙을 불렀다.
“……이모.”
“응?”
“고마워.”
“뭘 고맙다고. 이럴 때는 사랑한다고 해야지,”
장난스럽게 대답하는 연숙의 말에 그제야 세영도 웃으며 뒷정리를 할 수 있었다. 덕분에 그날은 조금 편안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이 될 때까지, 아무런 연락도 없는 도겸으로 인해 세영의 기분은 계속 가라앉았다.
그런 말을 했으니 당연한 일임에도 꽤 충격이 컸다.
도겸이라면 끈질기게 자신을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웃겼다.
자신이 끊어낸 관계면서, 매몰차게 그를 뒤로 한 채 돌아간 건 자신이었으면서 대체 무슨 염치로 그런 기대를 했는지. 그런 생각을 한 자신이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항상 밀어내도 다가오는 도겸이었기에 이번이 정말 헤어지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나 보다.
분명 얼마 지나지 않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세영은 괜찮지 않았다.
잊어가는 게 아니라 점점 더 도겸이 보고 싶어 졌다. 웃으며 세영을 내려다보던 도겸의 얼굴이 자꾸만 생각났다.
새삼스럽게도 제 안의 도겸의 존재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컸음을 느끼고 있었다.
도겸이 없었던 때에는 자신이 어떻게 하루를 보냈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매일 불쑥불쑥 나타나선 자기를 어딘가로 끌고 돌아다니던 도겸이 갑작스럽게 다시 나타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세영은 모처럼 쉬는 날인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침대에 앉아있었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다. 도무지 뭘 하면서 하루를 보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딱히 예전이라고 해서 TV를 보거나 노트북을 하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그때는 어떻게 그렇게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는지. 신기했다.
그때, 세영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번뜩 지나갔다.
노트북. 노트북으로는 도겸을 볼 수 있었다.
노트북으로는 연예인이니 도겸이 나온 드라마나 영화, 예능, 그리고 사진 같은 것을 찾을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래서는 도겸을 잊는 것과는 점점 더 거리가 멀어지는 것 같은데…….
세영은 망설여졌다.
한 번 그런 영상을 보기 시작하면 멈추지 못할 것 같았다.
세영은 일어서려던 것을 멈추고 도로 침대에 앉았다.
움직이지 못하도록 자기 주위로 이불까지 칭칭 둘렀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제 손은 노트북을 꺼내 들고 있었다.
도겸을 지워야 한다는 마음보다 지금 당장 그거라도 보지 않으면 미칠 것 같다는 생각이 컸다.
세영은 바빠서 생전 써본 적이 없던 스트리밍 서비스 사이트에 가입했다.
그리고는 포털 사이트에 도겸의 이름을 검색해서 도겸의 필모그래피를 훑었다.
도겸이 주연으로 나온 가장 최신작의 이름을 눈여겨보았다. 도겸이 재벌 집 아들로 나오는 로맨스 드라마였다.
세영은 곧장 그 이름을 스트리밍 사이트에 검색했다.
다행히도, 인기가 많았는지 페이지 최상단에 있었다.
클릭하니 바로 드라마의 간단 줄거리 소개와 함께 도겸과 어떤 여자의 얼굴이 들어간 사진이 보였다. 그 아래로는 20화까지의 동영상이 주르륵 나열되어 있었다.
세영이 한 번만 클릭하면 바로 1화부터 재생될 터였다.
세영은 잠시 망설이다 재생 버튼을 눌렀다.
드라마는 여주인공의 시점에서 시작되었다. 평범하게 광고 회사의 직원으로 일하고 있는 여배우의 모습이 세영의 눈에 들어왔다.
도겸이 좀처럼 나올 기미가 없자 세영은 조금 뒤로 넘겼다.
초반 십 분 정도를 넘기고 나서야 도겸의 얼굴이 보였다.
세영이 보던 것과 다르게 머리를 정갈하게 넘긴 정장 차림이었다.
그 모습이 낯설면서도 그리워서 세영은 가만히 앉아서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저 멍하니, 쪼그려 앉아서 노트북 화면 속 도겸을 바라만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