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영은 이번엔 저번처럼 단호하게 그럴 일 없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세영은 내색하지 않으려고 하면서 툭 말을 뱉었다.
“불도저 같아.”
세영의 감상이 재밌는지 도겸이 씩 웃으며 말했다.
“내가?”
“응.”
“그럼 어떤 사람이 좋은데?”
도겸이 바싹 다가앉으며 말했다.
“차가운 남자? 아니면 다정다감한 사람? 말을 험하게 하는 사람? 묵묵한 사람? 말만 해. 뭐든 다 맞춰줄 수 있어.”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세영은 어안이 벙벙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타입에 맞출 수 있다니.
세영이 하라고만 한다면 뭐든 하겠다는 태도에 당황스러웠다.
“설마 내 얼굴이 맘에 안 드는 건 아니겠지. 이렇게 잘생겼는데?”
도겸이 큰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면서 얼짱 각도를 만들어 보였다. 세영은 그 모습에 도겸을 골려주고자 끔찍해 하는 척하면서 말했다.
“와, 진짜 느끼해.”
세영의 말에 도겸은 아주 큰 충격을 받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럴 리가 없어. 좀 더 자세히 봐봐. 이래도? 이래도 맘에 안 든다고?”
그리곤 믿을 수 없다는 듯 멈추지 않고 손 키스를 날리고 윙크를 날리는 등의 행동을 했다.
잘만 하면 멋지게 보일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도겸은 윙크를 못 했다.
한쪽 눈만 감아보려고 해도 계속 양쪽 눈이 같이 감기는지 어설프게 찡그렸다. 게다가 윙크하는 데 집중해서 그런지 입이 벌어져서 바보 같은 표정이었다.
그 모습에 세영은 큰 소리로 웃었다.
흔치 않은 세영의 웃음에 도겸이 신나서 더 하기 시작했다.
일 더하기 일은 귀요미. 이 더하기 이는 귀요미.
흔히들 알고 있는 애교였지만 도겸은 박자에 맞춰 귀여운 표정이 아니라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어디서 저런 건 배운 건지. 세영은 뒤로 몸을 젖히면서 웃었다.
도겸은 아주 세영이 웃다가 울 때까지 멈추지 않겠다는 듯 계속해서 움직였다.
세영이 한참을 웃고 나서야 도겸이 자세를 바로 하며 말했다.
“좋다.”
“뭐가 좋아?”
너무 웃어서 진이 다 빠진 세영이 헐떡이면서 물었다.
“네가 웃는 걸 보는 게 좋아. 얼굴에 아무 표정 없었을 때보다 훨씬 낫다.”
세영은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웃는 일이 잦아졌다는 것을 말이다.
웃는 일뿐만 아니라 예전처럼 감정을 표현하는 데 스스럼없어졌다는 것을 자신도 느낄 수 있었다.
도겸에게 솔직하게 자신이 느낀 것을 말할 수 있었고 남에겐 일절 관심을 두지 않아 묻는 것도 바라는 것도 없었던 자신이 지금은 도겸이 어떠한 사람인지 궁금했고 그에게 정을 주기 시작했다.
세영이 말이 없자 도겸이 말했다.
“난 네가 화내는 것도 짜증 내는 것도 좋아.”
“그 말만 들으면 이상하게 들리는 거 알지?”
확실히 도겸을 만나고 세영은 변하고 있었다.
세영의 가슴을 옥죄고 있던 일이 도겸의 네 잘못이 아니라는 말로 가벼워졌기 때문이리라.
세영이 빙그레 웃으며 도겸에게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러게. 이렇게 잘 웃다가 네가 더 반하는 건 아닐까 몰라.”
“응. 더 반한 것 같아.”
도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젠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는 패턴이었다. 머리를 쓸어넘기며 세영이 말했다.
“너……. 이런 점이 불도저 같은 거라고.”
이래서야 장난도 장난이 아니게 되잖아. 세영이 중얼거렸다.
“뭐 나쁜 짓 한 것도 아니고.”
어깨를 으쓱이면서 도겸이 말하자 세영이 진심으로 감탄했다.
“넌 정말 밀고 당기기에서 당기기만 하는 사람이구나.”
“몇 번이나 말하지만, 누구한테 먼저 들이댄 적 없어.”
“진짜 거짓말하지 마.”
별 웃기는 말을 다 들었다는 듯한 세영의 태도에 도겸이 툴툴댔다.
“다 거짓말이래. 그나저나 배고프다.”
도겸은 그새 소화가 다 됐는지 배를 감싸 쥐었다. 세영은 자신이 방금 들을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배고프다고? 아까 그렇게 먹고서?”
“별로 먹은 것 같지도 않은데.”
이 정도 가지고 뭘. 도겸이 어깨를 으쓱했다.
“진짜 대단하다.”
진심으로 배가 고프다는 도겸의 태도에 세영은 도겸의 저 얇은 뱃속에는 사실 블랙홀이 있는 건 아닐까 진지하게 생각했다.
“넌 배 안 고파? 뭐 좀 더 사러 가자.”
“난 괜찮아. 가자. 잊지 말고 마스크 써.”
먼저 자리에서 일어선 세영이 도겸에게 주의를 줬다. 학원에서도 그렇게 난리였는데 사람이 더 많은 이곳에서 도겸이 들킨다면 정말 피곤해질 거라는 건 안 보고도 뻔했다.
“아차.”
잊고 있었는지 그냥 일어나려던 도겸이 주머니에서 마스크를 꺼냈다.
도겸이 다시 검은 마스크를 쓰자 도겸의 머리 위를 장식한 분홍색 영롱한 왕관이 더욱 도드라졌다.
세영은 문득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대왕 리본의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왜지? 주위를 살펴보니 자신이 앉았던 의자 뒤에 리본이 떨어져 있었다.
대체 언제 떨어졌던 건지. 당황한 세영은 도겸을 살폈다. 도겸은 아직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왕관 만큼이나 번쩍번쩍 빛나고 있는 리본을 지금껏 눈치 못 챈 도겸이 대단할 지경이었다.
저걸 어떻게 안 들키고 줍지. 세영은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저기 봐봐. 저기에 회도 판다.”
“어디?”
“저기 말이야. 저기. 보여?”
의자 맞은편을 가리키면서 세영이 도겸의 시선을 돌렸다. 도겸이 세영이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홱 돌리자마자 세영은 재빨리 리본을 주워 머리에 꽂았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도겸에게 말했다.
“가자.”
“아, 응.”
세영이 부르자 회를 파는 쪽을 보고 있던 도겸이 고개를 돌리곤 세영의 옆으로 붙었다.
옆에 있는 노점을 둘러보면서 도겸이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다.
“아~. 그나저나 소원은 뭐로 할까?”
세영이 걸음을 멈추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도겸을 바라봤다.
안심하고 있던 터라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너……, 알고 있었어?”
도겸은 세영이 걸음을 멈춘 걸 알았지만 멈추지 않고 계속 걸어 나갔다.
“떨어질 때부터 알고 있었는데.”
그럼 그 생난리를 처음부터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보고 있었다는 것 아닌가!
가자미 눈으로 세영이 자신의 뒤통수를 아주 뚫어지라 노려보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도겸은 신나선 경쾌한 노래에 스텝을 맞추며 걸어갔다.
“아~ 고민되네. 뭐로 해야 할까? 어떡해야 소원을 잘 썼다고 소문이 날까?”
도겸이 빙글 돌아 세영을 바라보며 흥겹게 어깨를 들썩였다.
얄밉다. 얄미워. 세영은 도겸이 얄미워도 너무 얄미웠다. 저 동그란 뒤통수에 딱밤을 딱 한 대만 쥐어박고 싶었다.
쪽을 바라보며 도겸이 말했다.
“소원은 킵. 아껴뒀다가 정말 쓰고 싶어지면 쓸래.”
마스크로 입은 가려져 있었지만 휘어진 눈이 도겸이 웃고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일단 오늘은 맛있는 거 많이 먹고 놀러 다니자.”
도겸은 그렇게 말하며 덥석 세영의 손을 잡고는 잡아당겼다. 도겸을 노려보고 있던 세영도 눈에 힘을 풀고는 하는 수 없는 척 도겸의 손에 이끌려 노점을 둘러보았다.
밤이 깊어 야시장이 끝날 때까지, 도겸과 세영은 손난로 대용으로 뜨뜻한 호떡을 손에 쥐고서 정말 신나게 야시장을 누볐다.
* * *
“으으.”
세영은 계속 신음을 흘렸다.
전날 도겸과 놀던 당시에는 몰랐는데, 그거 좀 움직였다고 세영의 근육들은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이쯤 되면 도겸과 만난 다음 날은 근육통을 앓는 것이 당연히 예정된 절차가 되는 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몸 상태가 어떻든 해야 할 일은 해야 했다. 세영은 아픔을 꾹 참고 서둘러 재료를 정리했다.
이럴 줄 알고 평소보다 일찍 온 것은 현명한 판단이었다. 덕분에 제시간에 맞출 수 있었다.
서둘러 일을 마치고 세영은 사무실에 앉아서 차를 마셨다. 날씨가 추워져 따듯한 차를 마시며 휴식을 가지는 일이 잦아졌다.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서둘러 일어나 사무실 밖을 확인해보니 언제나 그렇듯, 도겸이었다.
그러나 평소와 다르게 항상 밝았던 그의 표정이 오늘은 우중충했다.
무슨 일이 있었나 싶어 세영이 물었다.
“왜 그래? 표정이 안 좋은데.”
기운 없이 축 늘어진 채로 도겸이 입을 뗐다.
“나…….”
좀처럼 뒷말이 이어지지 않아 혹시 말하기도 힘들 정도로 많이 안 좋은 일이 있었나 싶어 걱정이 된 세영이 도겸에게 다가갔다.
“뭔데? 무슨 일인데?”
그제야 도겸이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나 스케줄이 생겨서 서울 가야 해…….”
“뭐야. 좋은 일이잖아.”
걱정했던 것이 허탈해져서 세영이 싸늘하게 뒤돌아 사무실로 돌아갔다. 세영을 뒤따라가면서 도겸이 말했다.
“좋지 않아.”
“불러주는 사람이 있다는 거면 좋은 거 아니야? 너 배우 일이 즐겁다고 했잖아. 말이랑 행동이 다른데.”
세영이 원래 앉아있었던 테이블 안쪽으로 자리해 찻잔을 들었다. 도겸이 그 반대편 자리에 앉으며 투덜거렸다.
“그러면 널 못 보잖아.”
“풉.”
그 말에 세영은 들이켰던 차를 뱉을 뻔했다. 간신히 뱉는 꼴은 면했지만, 사레가 들려버렸다.
“콜록콜록.”
“괜찮아?”
“괜, 괜찮아. 그냥 있어.”
자신을 살피고자 일어서는 도겸을 한 손으로 막으며 다른 한 손으론 얼굴을 가렸다.
휴지. 휴지가 필요했다. 얼른 테이블 위에 있던 휴지로 입가를 닦으며 조금 진정했다.
도겸의 직구에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하지만 그건 예상치도 못한 타이밍이었다.
‘배우 일보다 내가 좋다는 거야 뭐야.’
속으로 생각하면서 세영은 차를 들이켰다.
도겸이 저런 말을 할 때면 세영은 도무지 뭐라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그중에서도 오늘이 제일이었다.
“수업하러 갈까.”
그래서 세영은 그냥 수업하러 가는 것을 선택했다.
* * *
수업은 무난하게 흘러갔다.
도겸은 고분고분하게 수업을 잘 따라왔고 이모와의 수업이 도움이 됐던 건지 이전보다 훨씬 능숙하게 요리했다.
모든 것이 더할 나위 없이 매끄럽게 흘러갔다. 딱 하나, 도겸이 삐져서 아무 말이 없었다는 걸 빼면 말이다.
어느새 수업은 끝을 향해 가는데 도겸은 꼭 필요한 대답이 아니면 하질 않았다. 그리고 그것마저도 ‘응’, ‘알겠어’ 와 같이 단답형이었다.
평소라면 설명하고 있는 자신보다 수다스럽고 이게 뭔가요, 저게 뭔가요? 질문을 시도 때도 없이 계속했을 도겸이 아무 말도 없으니 당황스러웠다.
대체 왜 갑자기 삐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은 전날 야시장에서 흘러가듯 닭찜을 좋아한다고 했던 말에 일부러 닭찜으로 수업을 준비했는데 말이다.
기뻐할 줄 알았는데. 왠지 세영도 마음이 토라졌다.
요리하는데 사용한 프라이팬과 조리도구를 씻고 정리하면서 두 사람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교실 안에서는 식기가 부딪혀 덜그럭거리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그렇게 모든 정리가 끝나고 헤어질 시간이 됐을 때도 두 사람 사이에는 서먹한 공기만이 흘렀다.
이렇게 헤어지기엔 이상하니, 마음을 너그럽게 가지기로 한 세영이 먼저 인사했다.
“일 열심히 하고 와.”
“…….”
도겸은 어딘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세영을 바라봤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아무 말도 안 하다니. 세영의 한쪽 눈썹이 올라간 순간 도겸이 입을 열었다.
“넌 나를 못 보는 게 하나도 안 서운해?”
그제야 세영은 지금껏 왜 도겸이 삐져있던 건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렇게 뚱해 있던 거야?”
“…….”
경악한 듯한 말에 도겸이 세영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원하던 반응이 아니었는지 입이 툭 삐져나온 게 보였다.
아니 하지만 애도 아니고, 며칠 못 보는 걸 못 참을 리가.
그때 세영의 머릿속으로 어떤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아예 안 돌아오는 거야?”
설마 그럴 리가 있나. 라고 생각하면서도 세영은 도겸의 대답을 기다렸다.
고개를 돌리고 있던 도겸이 세영을 보며 물었다.
“그렇다고 하면?”
세영은 숨이 턱 막혔다.
“그럼 넌 서운해할 거야?”
놀란 눈으로 도겸을 바라봤다. 정말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건가?
그냥 자신을 떠보는 거겠지? 아니, 하지만.
이대로 이게 마지막이라고 하면,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세영의 머릿속에 온갖 질문과 감정들이 소용돌이쳤다.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판단조차 못 할 정도였다.
“나는…….”
세영이 아무 말이 없자 도겸이 세영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지금 당장 영영 서울로 간다는 건 아니야.”
지금 당장은 아니라는 말에 세영은 안심이 됐다.
“하지만 만약 내가 아예 떠난다면? 내가 영영 이곳을 떠난다면 넌 어떻게 할 거야?”
세영의 눈이 떨려왔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결국, 언젠가 도겸과 헤어지게 되는 것은 정해져 있는 일이었다.
도겸은 배우 일을 하러 다시 서울에, 그리고 세영은 이곳에 남을 테니까.
물리적인 헤어짐뿐만이 아니었다.
지금은 이렇게 도겸과 장난치고 웃으며 지내고 있지만, 시작이 있으면 그 끝이 있듯이, 둘 사이의 관계에도 끝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세영은 너무 즐거워서 잊고 있었다.
도겸의 말은 그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이번에는 직접 네 입으로 들을 거야. 전처럼 넘어가지 않아.”
도겸의 생각은 달랐다. 도겸은 세영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관계의 끝이 오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잠시의 헤어짐이라도 일말의 서운함도 비치지 않는 세영의 모습에 도겸은 궁금해졌다.
만약 자신이 일로 아예 서울로 떠나게 된다면 세영은 어떻게 반응할까. 지금처럼 자주 보거나 연락을 계속할 수 없게 된다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했다.
자신에게 세영이 가지는 의미만큼은 아니더라도, 자신이 세영 안에서 얼마만큼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세영은 분명 자신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예전과는 다른 태도로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예상이 아닌 그녀의 말로 직접 듣고 싶었다.
대답하는 것이 세영에게는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라는 건 알았다.
그래도 자신이 언제까지고 이곳에 있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기에 세영이 아주 조금만, 그 용기를 내줬으면 했다.
“이건 네 대답 듣고 싶어. 이 정도는 말해줄 수 있잖아.”
고개를 숙이고 망설이고 있던 세영이 긴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