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영은 눈이 동그래져서 굳어 있었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은 새하얬다.
도겸이 정말 그때 자신을 구해줬던 사람이었다니. 상상도 못 했던 일이라 당황스럽기도 당황스러웠지만, 도겸의 얼굴이 너무 가까워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코가 세영의 코끝을 닿을 듯 안 닿을 듯 간질였고 그가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그의 긴 속눈썹이 따라 움직이는 것이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그 속눈썹 아래에는 도겸의 눈동자가 있었다.
도겸의 눈동자는 올곧게 세영을 향하고 있었다. 세영은 그 시선이 부끄러우면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세영이 그저 자신의 가슴이 쿵쿵 뛰는 소리만 들으며 가만히 있자 도겸이 먼저 물러섰다.
“장난이야. 보답을 바라고 한 행동은 아니었어.”
그리곤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평소 같았으면 바로 밀어냈을 텐데 이상하네. 아무리 별 감정 안 든다고 해도 그렇지, 그렇게 가만히 있으면 내 쪽은 허락하는 건가 기대하게 된다고.”
그 말에 세영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도겸은 예상치 못한 세영의 반응에 머리를 긁던 자세 그대로 멈췄다.
“음?”
세영도 도겸이 얼굴을 들이민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그건 키스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런데도 세영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막아야 하겠지만 막을 수가 없었다. 딱히 막고 싶지 않았다.
막고 싶지 않았다니, 그건 허락이나 다름없었다. 나 민도겸과 키스해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
정말로?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세영은 혼란에 휩싸였다.
한편 도겸은 도겸 대로 당황하고 있었다.
자신이 한 장난이긴 하지만, 구해준 보답으로 키스를 바라는 건 도겸이 보기에도 그냥 파렴치한이었다.
그래서 도겸은 자신이 가까이 다가가면 분명 세영이 그를 바로 밀어낼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세영은 아무 말이 없었다. 밀어내지도 않았다. 이전 같았으면 단칼에 밀어냈을 텐데.
자신이 착각하기 전에 얼른 부정하라는 뜻으로 일부러 말했는데 반박은커녕, 세영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얼굴을 붉혔다.
설마……. 침착하게 판단하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도겸은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나 기대해도 돼?”
도겸의 말에 흔들리던 세영이 눈이 도겸을 향했다. 그리곤 도겸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세영은 바로 시선을 피했다.
혼란스러워 보이긴 했지만,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진짜로?
“뭐야, 나 이거 어떻게 해석해야 해?”
그제야 세영의 입이 열렸다.
“뭐, 뭘 어떻게 해석해.”
자신과 눈을 맞추지도 못하고 당황한 듯 말을 더듬는 세영이 귀여워 도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가까이 다가가도 밀어내지 않고, 기대해도 되냐고 해도 아무 말 없고. 혹시,”
“…….”
세영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겸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어쩔 줄을 모르며 듣고 있었다. 아예 자신에게서 등을 돌리고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세영을 보며 도겸이 말했다.
“이젠 나한테 좀 설레나?”
“설레긴 누가!”
세영이 버럭 소리 지르며 도겸을 노려봤다. 얼굴이 토마토처럼 빨간색이었다.
“네 얼굴은 아주 활활 타고 있는데.”
“윽.”
도겸의 말에 세영은 양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어쩐지 도겸은 자꾸 입꼬리가 올라갔다. 광대도 같이 올라가려는 것이 느껴졌다.
애써 참아보려고 했지만 웃음을 참는 것이 정말 힘들었다. 그래서 도겸은 그냥 웃어버렸다.
얼굴을 들이밀었을 때 바로 거절당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아니 오히려 고민하는 것처럼 보인 것만으로도 도겸은 뛸 듯이 기뻤다. 이렇게 조금씩, 거리를 좁혀 나가면 됐다.
세영은 히죽히죽 웃기 시작한 도겸을 째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참을 수 없이 귀여워 도겸은 당장 양 볼을 잡고 쪽쪽 뽀뽀하고 싶었다.
하지만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세영이 싫어할 만한 행동은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까.
예전처럼 밀어내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이렇게 장난칠 수 있는 사이가 된 것. 그거면 됐다. 지금 당장은.
도겸이 웃는 걸 멈추지 않자 세영이 작게 말했다.
“그만 웃어.”
그렇게 말하자 도겸은 오히려 더 웃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얄미워 세영은 도겸을 버리고 야시장이 열리는 쪽으로 걸어 나갔다. 화가 났는지 세영은 평소보다 훨씬 빠르게 걸어갔다.
“어어, 같이 가.”
멀어지는 세영의 뒤를 쫓으며 도겸이 말했다.
세영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지만 도겸의 말을 듣고 약간 속도를 늦췄다.
도겸은 그것조차도 좋아서 경쾌한 걸음걸이로 세영을 쫓아갔다.
* * *
“거의 다 온 것 같아. 저쪽이지?”
도겸이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계속 웃던 것은 세영을 놀리다가 세영에게 몇 번 다리를 걷어차이고 멈춘 뒤였다.
야시장의 시작을 알리는 듯 거리에는 주황색의 빛을 내는 등이 달려 있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세영이 말했다.
“분위기 있네.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
겨울이기에 찾는 사람이 별로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마을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 도겸은 고개를 끄덕이며 얼른 주머니 속에서 검은 마스크를 꺼내 썼다.
야시장에는 다양한 노점들이 있었다. 음식을 파는 곳이 대부분이었지만 액세서리를 판다거나 장난감을 파는 등 다른 노점들도 많았다.
“어!”
무언가를 발견한 듯 도겸이 큰 소리를 내면서 한 노점에 다가갔다.
그리곤 매대에서 커다란 리본 핀을 집어 들었다. 그리곤 세영의 머리에 그 핀을 꽂아주었다.
“이야, 잘 어울리는데?”
그렇게 말하며 도겸은 쿡쿡 웃었다.
도겸이 고른 리본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자면 빨갛고 반짝이는 스팽글로 만들어진, 트로트 가수를 연상시키는 그런 리본이었다.
아이도 아니고 다 큰 어른이 그런 리본이 어울릴 리가.
게다가 크기는 어찌나 큰지, 사람 얼굴만 한 것이 무게감도 있어 세영의 고개가 기울 정도였다.
세영은 눈으로 빠르게 매대를 훑었다. 그리고 가장 눈에 띄는 화려한 분홍색 왕관 모양 머리띠를 발견했다. 세영은 그것을 집어 들어 까치발까지 들어가며 민도겸에게 씌웠다.
“아이고, 공주님. 네가 더 잘 어울리십니다.”
커다란 덩치에 검은 마스크를 껴서 얼핏 보면 경찰서에 잡혀 온 범죄자처럼 보이는 민도겸이 아동용 왕관 머리띠를 하고 있는 것은 세영 만만치 않게 우스꽝스러웠다.
세영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웃었다.
그런 세영을 보면서 도겸도 킥킥거리며 웃었다. 그러다 좋은 생각이 났는지 도겸이 말했다.
“이거 누가 먼저 벗을지 내기할까?”
“좋아. 뭘 걸 건데?”
“진 사람이 이긴 사람 소원 들어주기.”
도겸의 말에 세영이 중얼거렸다.
“딱히 바라는 게 없는데.”
“그렇게 단호하게 말하다니 너무해. 상처받았어.”
도겸이 몸을 베베 꼬면서 말했다. 상처받았다고 말하면서 말투에는 장난기가 넘쳐나서 세영은 코웃음을 쳤다.
“그럼 내가 이기면 앞으로 수업은 이모랑 하는 거다.”
그 말에 순간 도겸이 멈칫했다. 어제의 수업이 기억이나 급격히 피곤해지는 기분이었다. 등 뒤로 소름이 돋았다.
도겸이 잠시 고민하다가 승낙했다.
“좋아. 고개 숙이거나 얼굴 가리기 없기야.”
“콜.”
세영은 도겸에게 소원을 묻지도 않고 내기를 받아들였다. 어차피 자신은 벗지 않을 테니깐. 세영은 자신이 있었다.
노점에 돈을 지불하고 세영과 도겸은 왕관과 리본을 낀 상태로 야시장을 돌아다녔다.
두 사람에 희한한 꼴에 사람들의 시선이 도겸과 세영에게 향했다. 세영은 조금 부끄러워졌지만 내기의 조건을 잊지 않았다. 다행히 도겸을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야시장 안에서는 흥겨운 90년대 노래가 들려왔다. 도겸은 배가 고팠는지 길 양옆으로 쭉 늘어져 있는 가게마다 그냥 지나치지 않고 뭘 하나씩 사 들고 왔다.
두 사람의 손에 음식이 가득할 때 즈음에야 도겸은 더 사는 것을 포기하고 구석에 있는 간이 테이블에 앉았다.
차가운 바람이 불었지만, 히터가 테이블 바로 옆에 있어 추위를 덜어주었다.
“잘 먹겠습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도겸은 테이블에 놓인 강정과 문어탕수육 같은 음식들을 천천히 하지만 쉬지 않고 먹기 시작했다.
“너 진짜 잘 먹는구나.”
그가 먹는 모습을 보며 세영이 감탄했다.
사실 세영은 이걸 다 먹을 수나 있을까 걱정하고 있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도겸은 꽤 많은 양을 먹었음에도 배부르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도 그럴 게 배가 부르면 먹는 속도가 느려지기 마련인데 지금 그는 처음의 속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가? 아직 성장기라서 그래.”
“누가 24살을 성장기라고 그래요.”
세영이 코웃음을 쳤다. 도겸도 그 반응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런데, 나 작년보다는 1cm 컸어.”
그 말에 세영의 입이 벌어졌다.
“거짓말!”
“진짠데.”
도겸은 이런 반응에 익숙한 듯 다시 고개를 숙이고 먹기 시작했다.
도대체 저 얇은 배에 어떻게 그 많은 음식이 들어가는지 세영은 정말 감탄스러웠다.
“그래도 배운데 몸매 관리 같은 거 걱정 안 해도 돼?”
그렇게 물었더니 고개를 저으며 그가 말했다.
“살이 잘 안 붙어서.”
그는 자신은 오히려 살이 없어서 근육이 잘 붙지 않는 체질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드라마나 영화를 찍기 전에 몸을 만들기 위해 식단 조절과 운동을 남들보다 배는 많이 한다고 트레이너가 무섭다고 투덜댔다.
“그거 부럽네.”
세영이 중얼거렸다.
“살 안 찌는 게?”
“응. 다이어트 걱정은 없겠다 싶어서.”
그러자 도겸은 먹던 것도 내려놓고 세영과 눈을 마주하고 진지하게 말했다.
“살 걱정하지 마. 넌 지금 그대로도 괜찮아. 나야 역할에 따라 찌웠다 뺐다 해야 하니까 하지만, 솔직히 급격하게 살 빼는 게 몸에 좋을 리가 없잖아. 건강하기만 하면 됐지. 신경 쓰지 마.”
그 말에 세영이 쓰게 웃었다.
지금은 살이 찌는 것에 대해 별 신경을 쓰지 않지만 학교에 다닐 때는 세영도 몸매에 신경을 많이 쓰곤 했었다.
그 당시에는 바빠서 제때 끼니를 챙겨먹지 못하거나, 급하게 라면이나 인스턴트식품으로 때우는 일이 잦았다.
식습관이 불규칙하고 건강에 좋지 음식을 급하게 먹다 보니 세영은 항상 위가 좋지 않았고 먹는 양에 따라 몸무게가 왔다 갔다 했다.
기억 속의 선배는 세영이 무언가를 먹고 있을 때면 눈살을 찌푸리며 또 그런 걸 먹냐고 타박하곤 했다.
그때는 선배가 자신을 걱정해주는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그 눈빛은 절대로 지금 도겸처럼 걱정하는 사람의 그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래. 제대로 관리를 못 하고 살이 찐 것에 대한 질책이었다.
뺨에 닿는 차가운 바람이 세영을 현실로 끌어내주는 것 같았다.
선배를 좋아할 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지금은 보였다.
이젠……. 선배가 정말 자신을 좋아하긴 했던 건지, 그것마저도 자신 있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고마워.”
때아닌 세영의 감사 인사에 도겸이 세영을 이상하게 봤다.
어쩐지 세영의 표정이 씁쓸해 보여 도겸은 왜 그런지 묻고 싶었지만 세영이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서 관두고 다시 먹기 시작했다.
나쁜 생각을 지우고 싶어 세영은 화제를 바꿨다.
“너는 배우라는 일을 정말 좋아하는 것 같아.”
아무 말이나 생각나는 대로 뱉은 것이긴 하지만 세영은 지금까지 도겸을 보면서 정말 그렇게 느꼈다.
긴 시간 전화했던 때도 도겸은 과거에 맡았던 배역에 대해 열성적으로 이야기했다. 자신이 그 인물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연기 도중 어려웠던 부분이 뭐였는지, 등등. 그가 정말 즐겁게 얘기해서 듣는 세영도 지루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도 도겸은 트레이닝이 힘들다고 하면서도 그 눈에는 즐거움이 담겨 있었다.
세영의 말에 도겸이 들고 있던 음식도 내려놓으며 말했다.
“즐겁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 본다는 게. 그리고 내 연기에 사람들도 몰입해서 봐준다는 게 너무 좋아.”
연기에 관해 얘기하는 도겸의 눈은 반짝반짝 빛났다. 그 모습이 멋져 보여서 세영은 턱을 괴고 도겸의 얘기를 들었다.
“오늘도 매니저 형이 와서 대본 뭉치를 주고 갔어. 갈수록 대본이 많아져서 읽는 것도 일이라니까.”
투덜거리면서도 도겸의 목소리에는 흥분이 가득했다. 간이의자가 작게 느껴질 정도로 다 큰 성인이면서 크리스마스 날 바라던 선물을 받은 아이 같이 귀여워 세영이 미소 지었다.
“그래서 읽다가 나왔는데 이번엔 또 무슨 역할을 연기하게 될지 기대돼. 좀 더 많은 역을 해보고 싶은데 동시에 여러 가지 작품을 찍기엔 한계가 있는 게 아쉬워.”
“좋아하는 일을 찾았다니 다행이네.”
세영의 맞장구에 도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운이 좋았어. 혼자만의 힘으로 여기까지 온 건 아니거든.”
도겸이 세영 쪽으로 몸을 기대면서 말했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지금까지도 연기할 수 있는 것도 네 덕분이고.”
세영이 눈을 깜박였다.
“그때 말했던 고마웠단 일이 이거야?”
“응. 근데 넌 기억도 못 하는 것 같아서 서운해.”
도겸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면서 세영을 바라봤다.
“뭘까, 왜 하나도 기억이 안 날까.”
이쯤 되면 기억날 법도 한데 세영은 정말 도겸은 커녕 비슷한 사람과 만난 일도 기억나지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세영이 기억해내지 못하자 도겸이 포기하고 웃으며 말했다.
“뭐, 네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내가 기억하고 있으니까.”
“뭔가 미안해.”
어쩐지 세영은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도겸은 정말 소중하게 간직해온 추억인 것 같은데 정작 본인은 기억도 못 하고 있으니…….
“됐어. 내가 쉽게 잊힐 정도의 사람이었던 거겠지.”
도겸의 말에 세영의 고개가 더욱더 숙어졌다. 그런 세영을 보면서 도겸이 진지하게 말했다.
“기억 못 하는 것 정도야. 전혀 신경 쓰지 않아. 앞으로 잊지 못하게 만들면 되는 거니까.”
방금까지도 서운하다고 했으면서. 그 말에 세영이 고개를 들어 도겸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렇게 같이 웃고 떠드는 것부터 시작해서.”
도겸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서서히 나한테 익숙해지게 만들고.”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것처럼 세영만을 바라보며 도겸이 말했다.
“결국엔 네 입으로 내가 좋다고 말하게 만들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