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나는 주 3일 수업을 하기로 정했다.
그리고 오늘이 그 첫 번째 날이었다.
이모의 수업과 겹치지 않도록 잡아 이번엔 여자들이 교실 밖에 몰리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에게 앞치마를 건네고 나도 앞치마를 두른 뒤, 지난번 그에게 했던 질문을 이번에는 다른 대답이 나오길 바라며 다시 한 번 물었다.
“배우고 싶은 요리 있어요?”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런데 우리 나이도 비슷한 것 같은데 말 편하게 하는 거 어떨까요?”
동문서답이었다.
그가 반말을 해도 딱히 상관은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세요.”
민도겸이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너는 왜 반말 안 해.”
“전 이게 더 편해서요. 그것보다 배우고 싶은 요리 없어요?”
대답을 재촉하는 나의 말에 그도 말을 놓는 것에 대해서는 더 말하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계란프라이 어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너무 쉬운 메뉴가 나와서 조금 당황스러웠다.
“혹시 요리 해보신 적 없어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없어. 할 줄 아는 건 라면이나 인스턴트식품 요리 정도.”
요리라고 하기도 애매한 것들이었다.
“아니 그래도 계란프라이는 그냥 프라이팬에 올려서 뒤집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계란프라이는 이해가 되지 않아 그에게 물었다. 도대체 그 쉬운 계란프라이에서 무엇을 설명해야 하는가.
“내가 하면 맨날 팬에 들러붙더라고.”
덤덤한 그의 말에 나는 경악해서 물었다.
“혹시 계란프라이할 때 프라이팬에 기름 둘러야 하는 거 몰랐어요?”
그가 날카로운 눈을 동그랗게 만들면서 물었다.
“기름을 둘러야 해?”
그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 좀 알 것 같았다.
배경 지식이라곤 하나도 없어서 하나하나 다 설명해줘야 하는 굉장히 번거로운 수업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되돌릴 순 없었다.
빠르게 체념하고 나는 덤덤하게 말했다.
“혼자 생활할 때 필요한 요리 지식부터 쌓는 거로 시작하죠.”
“뭐, 그러든가.”
그는 뭐든 좋은 듯 어깨를 으쓱했다.
이 사람, 정말로 요리 배우러 온 사람 맞아? 뭐가 됐든 상관없다는 태도에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도 뭐 자신이 배우러 왔다고 하는데 계속 의심하기도 뭣하다.
“오늘은 계란프라이랑 계란말이로 해요.”
계란프라이만 알려주고 수업을 마치기는 좀 그렇기에 그와 비슷한 계란말이도 함께 넣었다.
“그럼 시작하죠.”
그는 생각보다 이해가 빨랐다.
암기력도 좋아 제대로 설명해주고 어떻게 하는지를 보여주면 곧잘 따라 했다. 순식간에 계란프라이를 마스터한 뒤 그는 지금 계란말이를 하기 위해 재료를 작게 썰고 있었다.
말이 작게이지 아무래도 칼질은 처음인지 지금 그가 자르는 당근은 크기가 다 달랐다. 게다가 자르는 폼이 아무래도 이대로 놔두면 자기 손가락을 하나 잘라버릴 것 같았다.
“비켜 봐요.”
남자는 순순히 칼을 내려놓고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칼을 쥔 손은 그렇다 쳐도 반대편 손을 그렇게 놔두면 다칠 위험이 높아요. 식재료를 잡을 때 손을 평평하게 펴는 게 아니라 손톱이 다 보이지 않도록 오므려야 해요.”
그렇게 말하면서 직접 시범을 보였다.
나는 손을 둥글게 말아 당근에 내 손바닥이 닿지 않게 만든 뒤 썰기 시작했다.
당근을 채썰기를 한 뒤 그것을 다시 한 번 썰어 작고 균일한 당근 육면체를 만들었다.
“이걸 깍둑 썰기라고 해요.”
계속해서 천천히 자르는 동작을 보여주었다.
그는 신기한지 옆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다 실수로 그가 도마를 건드려 내 손가락이 칼에 살짝 베이고 말았다.
“아!”
나는 작게 단말마를 냈다.
“다쳤어?”
민도겸이 당황했다.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피가 나는 손가락을 빨았다.
철을 먹는 것 같은 씁쓰름한 피 맛이 느껴졌다.
그는 내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어쩐지 그의 얼굴이 붉었다.
그의 얼굴을 보고 퍼뜩 민도겸의 앞이라는 것을 깨닫고 얼른 손가락을 뺐다. 다 큰 어른이 아이 같은 행동을 한 것이 조금 부끄러웠다. 그리고 내가 민도겸의 얼굴을 다시 봤을 때 그의 얼굴은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괜찮아? 나 때문에 미안해. 여기 약 없나? 밴드. 밴드는?”
그는 여전히 피가 몽글몽글 나는 내 손가락을 보고 어쩔 줄 모르고 안절부절못했다. 뭐 이 정도 상처 가지고 그렇게까지. 나는 심드렁히 흐르는 물에 손가락을 헹구었다.
“그런 건 필요 없어요. 계속하죠.”
그러자 인상을 찌푸리며 그가 말했다.
“그러다 상처 벌어지거나 곪거나 하면 어떡해, 밴드 가져올게.”
그렇게 말하며 그는 성큼성큼 교실 밖으로 나가 사무실로 향했다.
“아니, 그렇게까지 깊게 베이지 않았어요.”
정말이었다.
종이에 베인 상처보다 살짝 깊은 정도였으니.
그의 등에 대고 말했지만, 그는 내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나가버렸다. 그리고 이내 약과 밴드를 들고 돌아왔다.
“손 이리 줘.”
내 손을 잡아 올리더니 먼저 그가 약을 발랐다.
아프진 않을까 조심스러운 행동이었다.
그리곤 그 위에 밴드를 붙였다.
“무슨 여자가 이렇게 상처에 무덤덤해?”
그가 투덜댔다.
살짝 베인 상처에 호들갑을 이렇게까지 떠는지.
나야말로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냥 다치게 한 죄책감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며 넘어갔다.
다시 시작해서 남자는 그가 고른 다른 채소들을 썰었다. 아까보다는 훨씬 안정된 자세였다.
모든 재료를 썬 뒤 그릇에 달걀을 몇 개 풀고 남은 재료도 넣어 섞어줬다.
“여기에 우유나 설탕을 살짝 넣으면 식감이 부드러워져요.”
과정 사이사이 몇 가지 팁을 계속해서 알려줬다.
나는 계란말이용 사각 프라이팬을 두 개 꺼내왔다.
“기름은 많이 두를 필요 없이 프라이팬 표면에 코팅될 정도로만 둘러줘도 충분해요.”
불을 약불로 맞춘 뒤 나는 그릇을 들어 내용물을 살짝 부었다.
“한 번에 많이 붓지 말고 조금씩. 아래가 어느 정도 익어간다 싶으면 돌돌 말아주세요.”
젓가락을 사용해 동그랗게 말아 한쪽으로 옮긴 뒤 다시 살짝 기름을 부어주고 또 한 번 내용물을 살짝 부어줬다.
“이렇게 몇 번 반복하면 계란말이는 완성이에요. 계란 물을 부었을 때 그 위에다가 치즈를 얹어주면 치즈 계란말이가 되겠죠? 그 외로도 깻잎을 올린다든가 안에 들어가는 채소는 원하는 대로 넣으면 돼요. 청양고추 같은 걸 넣으면 매콤해지고요. 이제 한 번 해보세요.”
얌전히 설명을 들은 남자는 큰 키에 어울리지 않게 작은 프라이팬을 신중하게 잡고 계란말이를 말기 시작했다.
남이 보면 웃었을 장면이지만 세영은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는 듯 가만히 지켜보았다. 조금 엉성하긴 하지만 나름 괜찮은 계란말이가 완성되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다음번에는 어떤 요리를 하고 싶은지 원하는 게 있으면 문자로 연락해줘요.”
수업 때 만든 계란말이를 챙겨주며 그에게 말했다.
“다음번에는 계란찜하고 싶어.”
“계란찜이요?”
어째 다 계란을 벗어나질 않는다.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그가 말했다.
“부드러운 계란찜 좋아해.”
계란찜 좋다는 말을 누가 그렇게 진지하게 하는지. 그런 생각을 하며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아 예, 그러신가요.”
“그 반응은 뭐야.”
이상하게 보는 걸 귀신같이 알아챈 민도겸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도대체 날 무슨 취급하는 거야? 지금 바보 취급 당한 것 같은데?”
계란말이가 든 쇼핑백을 들고 그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별로 그렇게 생각하진 않았어요. 다음 수업은 계란찜으로 하죠. 그럼 전 이만.”
귀찮은 일은 피하고 싶어서 그렇게 해명한 뒤 나는 그를 피해 문을 향해 걸어갔다.
“어딜 그냥 가.”
내가 학원 밖으로 나서자 그가 뒤를 따라왔다.
“난 어디 가서 이런 취급당할 사람이 아니라고. 애초에 말이야. 기억 못 하는 건 그렇다 쳐. 넌 어떻게 나에 대해서 알지도 못해?”
“TV를 안 봐서요.”
뒤도 안 보고 걸어가면서 말했다. 그런데 기억은 무슨 소리지?
내 시큰둥한 반응에 더 울컥했는지 그가 뒤에서 소리쳤다.
“아까 여자들 꺅꺅거리는 거 못 봤어? 그게 보통 사람들 반응이라고. 넌 무슨 원시시대 사람이야?”
괜히 나도 짜증나서 걸음을 멈춰 그를 돌아보며 툭 내뱉고 말았다.
“뭐, 저한테 민도겸 씨는 그저 생활 능력이라곤 하나도 없는 사람이네요.”
“사람이 어떻게 뭐든 잘해? 뭐 하나 못 할 수도 있는 거지.”
“보통 그래도 계란프라이는 할 줄 알거든요.”
정곡을 찌르는 말에 그가 할 말이 없는지 조용해졌다.
다시 뒤돌아 걸어가려는데 그가 앞을 막아섰다. 그리곤 쇼핑백을 들지 않은 손으로 내 손을 붙잡았다.
“어릴 때부터 배우 일을 시작해서 집안일을 해본 적이 없었어. 그래서 지금이라도 배우려고 온 거고.”
그렇게 말하며 나와 눈을 맞추는 민도겸의 얼굴은 진지했다.
확실히 잘생긴 얼굴이었다. 가까이서 보니 왠지 기분이 묘했다.
그의 얼굴에 감탄하다가 과연 어릴 때부터 일했다면 모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사과했다.
“미안해요. 무시하는 말을 해서.”
순순히 사과하자 이상했는지 그가 한쪽 눈썹을 찡그린 채로 웃었다.
“왜 갑자기 순순히 사과해? 가까이서 보니 설렜냐?”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를 보았다.
“뭐라고요?
“뭐 그럴 수밖에 없겠지. 이해해. 나한테 두근거리지 않을 여자는 이 세상에 없어.”
고개를 치켜들며 민도겸이 말했다. 너무나도 자신만만한 태도였다. 뭘 믿고 이렇게 자신만만하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싱숭생숭했던 기분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여기 있네요. 두근거리지 않을 여자.”
심드렁하게 내가 그의 손에서 내 손을 빼내며 말하자 민도겸은 웃음을 거두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웃기지 마. 그런 여자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
“민도겸 씨가 뭘 하든 설레지 않을 것 같은데.”
더더욱 담담하게 말하자 민도겸이 눈을 빛냈다.
“확신해?”
그가 내게 더 다가오면서 말했다.
“류세영.”
내 이름은 또 언제 알았는지. 자꾸만 다가오는 그의 얼굴이 부담스러웠다.
“…….”
“정말 확신해?”
“그렇다니깐요.”
무뚝뚝하게 말했다.
내 앞을 가로막는 그를 피해가려고 했지만 뭘 하려는 건지 민도겸이 계속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불편해 계속 피하다 보니 어느 순간 발이 벽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낭패다.
곁눈질로 벽을 확인하고 있을 때 민도겸이 손을 뻗어 벽을 내리쳤다.
“어딜 도망가려고.”
당황해서 눈을 깜빡이며 바라보다가 기분이 확 상했다.
도망가긴 누가.
괜히 욱해서 민도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노려보며 말했다.
“제가 뭘 도망가요?”
“정말 이래도 안 흔들려?”
키가 큰 민도겸이 다른 한 손도 뻗어 그와 벽 사이에 나를 가두었다. 그리곤 허리를 숙였다.
자연히 그의 얼굴도 내게 가까워졌다.
과연 누구라도 설렐 것이라 자신할 정도로 잘생긴 얼굴이었다. 가까이에서 봐도 흠잡을 데 하나 없었다. 하지만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표정없는 얼굴을 유지하며 말했다.
“네.”
조금 더 얼굴이 가까워졌다. 숨결이 느껴지는 거리였다.
이래도? 라고 묻는 듯한 민도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 봤다.
이래도.
내가 반응이 없자 그의 얼굴은 계속해서 가까워졌다.
그의 기다란 속눈썹이 보이는 것 같더니 어느새 그의 코와 내 코가 닿아있었다.
그리곤 그의 입술이 아주 살짝 맞닿았다. 닿았는지 확신도 못 할 정도로 아주 약한 입맞춤이었다.
민도겸이 평소보다도 낮은 목소리로 귓가에 대고 말했다.
“이래도?”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그에게 속마음을 들키고 싶진 않았다.
그는 분명 장난이었을 텐데 나는 거기에 설렜다는 걸 안다면…….
어쩐지 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좀 더 세게 나가기로 한다.
충동적으로 그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내가 당길 줄은 예상 못 했는지 그의 몸이 쉽게 당겨져 왔다.
그대로 그와 입술을 포갰다.
놀랐는지 그의 입술은 벌어져 있었다.
틈을 놓치지 않고 그의 입안을 훑었다.
어지간히도 당황했는지 그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의 놀란 표정을 차분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계속 그와 입을 맞췄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그를 밀쳐냈다.
어울리지 않게 그의 얼굴은 새빨개져 있었다.
마주한 민도겸의 눈동자가 맥없이 흔들렸다.
적잖이 놀란 모양이다.
나는 그와 시선을 마주한 채 냉정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설레지 않아.”
“…….”
“전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