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들이 떠난 병실 안은 조용했다.
세영이 머물게 된 병실은 2인실이었지만, 옆 침대가 비어있는 탓에 혼자였다.
그녀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진술한 뒤임에도, 현실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누군가가 자신을 죽이려 했단 것도, 자신이 죽을 뻔했단 것도 말이다.
이런 일은 정말 뉴스에서나 보던 일이었는데…….
세영은 손으로 슬며시 목을 문질렀다.
누구나 그렇듯, 세영도 죽는다는 것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본 것은 아니었다.
막연하게 병으로 죽거나, 사고로 죽는 것을 생각했다.
호진과의 일로 힘들 때조차도. 죽겠다는 생각은 쉽사리 하지 못했다.
이모를 슬프게 할 거라는 것이 세영의 발목을 잡았다.
그러나 다행히 일이 잘 해결되었지.
대체 그 남자는 왜 하필 자신을 골라 죽이려고 한 것일까.
계속해서 같은 질문을 곱씹게 됐다.
세영은 그 이유가 궁금하면서도 궁금하지 않았다.
무슨 이유였건 간에, 그녀는 사람을 해하려 한 사람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다못해 돈이 없는데 가족이 아파서 사주를 받아 그녀를 죽이려 한 거라 해도.
뭐 그런 일이 생길 리는 없지만 말이다.
세영은 자신의 과한 상상력에 고개를 저었다.
그때 병실 문이 열렸다.
도겸이었다.
반갑게 그를 반기려던 세영은 흠칫 몸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는 도겸이 너무나도 싸늘하게 굳어있는 표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겸아……?”
“…….”
도겸은 세영을 가만히 바라보다 고개를 떨궜다.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땐, 평소와 같이 돌아와 있었다.
세영을 걱정하고 슬퍼하는, 다정한 도겸이었다.
도겸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다가온 도겸은 유리라도 다루듯 조심스럽게 세영의 손을 잡았다.
“세영아……. 괜찮아? 많이 아프지.”
“그렇게 보일 뿐이지 별로 안 아파.”
일순 당황했던 세영은 다시 안심했다.
자신이 조금 전 봤던 도겸의 표정은 착각임이 분명했다.
“그렇게 큰 상처가 아닌 부분도 뭘 과하게 많이 붙여두신 거라. 놀랬지.”
세영은 애써 밝게 대답했다.
링거에, 여기저기 붕대나 거즈가 붙어있어 자기 스스로 봐도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심지어 넘어질 때 골절됐는지 다리엔 깁스도 하고 있었다.
도겸이 걱정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아프면 아프다고 해도 돼.”
“아냐, 나 진짜, 정말 괜찮아.”
“세영아.”
그는 세영을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나한텐 약한 모습 보여도 돼.”
따듯한 온기에 괜찮다고 부정해보려 했지만, 목에 무언가 걸린 듯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결국 비죽 눈물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한 번 터진 눈물은 이내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사실은…… 무서웠어.”
“그래.”
“죽는…… 줄 알았어. 여기저기 다 아파. 졸렸던 목도, 아프고 다리도 아프고. 팔도,”
형사들 앞에서 침착하게 있었던 것처럼, 도겸 앞에서도 강하고 의연한 모습을 보이고 싶었는데.
“여덟 바늘이나 꿰맸대.”
그에겐 어리광을 부리게 됐다.
“아직도 무서워. 언제 또 누가 공격할까 봐.”
“……이제 괜찮아. 더는 네가 다치는 일 없게 할 테니까.”
도겸은 그녀를 도닥여주었다.
얼마나 울었을까.
꽤 시간이 지난 뒤, 조금 안정된 세영이 눈물을 닦아내면서 중얼거렸다.
“……그 남자, 어떻게 될까?”
“넌 어떻게 됐으면 좋겠어?”
도겸의 질문엔 세영은 멈칫 고민하게 되었다.
솔직하게 말해도 될지, 도겸이 어떻게 볼지 걱정스러웠다.
“음……. 너는? 내가 용서했으면 좋겠어?”
“아냐, 그런 게 아니라……. 네 솔직한 심정을 듣고 싶어. 그 남자가 어떻게 됐으면 좋겠어?”
“나는…….”
세영은 잠시 망설이다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그런 범죄자,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우연히 지나가는 호텔 직원과 사람들 덕분에 살았다고 들었다.
정말 운이 좋았다고밖에 할 수가 없었다.
그 직원이 근처에 없었더라면……. 생각만으로도 소름이 끼쳤다.
“평생 감옥에서 썩었으면 좋겠어. 사회에 돌아오는 일 없이. 혼자서 외롭게.”
도겸은 천천히 세영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 손길이 어느새 떨고 있던 세영을 다시 안정시켜 주었다.
“그래도 법에 따라 처벌을 받아야 하는 거니까.”
침착함을 되찾은 세영이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형량이 최대한 길었으면 좋겠어. 내가 정할 수 있는 게 아니지만…….”
“꼭 그렇게 해줄게.”
“응?”
“꼭 그렇게 되게 해줄게.”
도겸의 진지한 표정에 세영은 약간 당황하고 말았다.
하지만 도겸이 별다른 말이 없기에 그녀는 가볍게 해본 말이라 생각하고 넘겼다.
“그런데 도겸아, 들어봐. 웬 정장 차림의 아저씨가 나를 계속 챙겨주시는 거 있지. 경찰도 아니고, 병원 사람도 아닌 것 같은데 대체 왜 챙겨주시는 건지 모르겠어. 설마 기잔가?”
“……그래? 누구지? 내가 한 번 만나볼게. 걱정하지 마. 기자는 아닐 거야. 그보다 피곤하진 않아? 간호사 선생님 부를까?”
“아냐. 나 아직 괜찮아. 조금만 더 옆에 있어 줘.”
“그럴게.”
도겸은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그나저나 너 스케줄은? 제대로 끝내고 온 거지?”
“응, 걱정하지 않아도 돼.”
“다행이다.”
그의 거짓말을 알아차리지 못한 세영은 그제야 살짝 미소를 지었다.
* * *
그 뒤로 대화가 조금 더 이어졌지만, 세영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많은 일이 있었으니 피곤할 터였다.
도겸은 세영이 잠들 때까지 곁을 지키다 병실을 나섰다.
병원 복도를 걸어가는 도겸은 발걸음이 천근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해야 할 얘긴 많았지만 도겸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결정을 지을 수가 없었다.
남자가 왜 세영을 공격했는지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이번 일은 다 도겸의 잘못이었다.
그가 다은에게 무르게 대처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하지만 세영은 그런 말을 하면 분명 그의 탓이 아니라고 할 터였다.
그렇기에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도겸은 그런 식으로 세영의 용서를 받고 싶지 않았다.
받아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저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누구보다도 도겸이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이 일은 그가 계속해서 마음의 짐으로 가지고 가야 할 일이었다.
그때 복도 맞은편에서 재찬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서둘러 달려오기라도 한 듯 거친 숨을 내뱉고 있었다.
“예재찬 씨.”
도겸을 그제야 알아챈 재찬이 다가와 물었다.
“세영 씨 지금 괜찮습니까?”
“예. 지금 막 잠들었습니다. 재찬 씨는 어떻게 알고 이 병원에…….”
“선생님께 연락받았습니다. 도겸 씨한테도 연락했는데 답이 없었다고 하시더군요.”
“아.”
도겸은 핸드폰을 확인했다.
연숙의 이름으로 몇 통인가 부재중 전화가 남아있었다.
“그렇네요.”
보호자에게 연락이 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 당연한 일조차 생각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나가 있었다는 걸, 도겸은 깨달았다.
“제가 먼저 연락을 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그럴 수 있죠. 선생님께서도 이해하실 겁니다. 선생님도 지금 오고 계신다고 합니다.”
연숙이 얼마나 걱정을 했을지.
도겸은 죄송스러워 고개를 숙였다.
재찬이 머리를 쓸어넘겼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도겸 씨는 뭐 들은 게 없습니까?”
도겸은 죄책감에 저도 모르게 얼굴을 굳혔다.
저 때문에 세영이 다쳤다니, 가슴에 무거운 돌이 얹어져 있는 듯했다.
하지만 재찬에게 모든 걸 말할 필요는 없었다.
“……저도 뉴스에 나온 정도의 정보만 들었습니다.”
재찬은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습니까. 그나마 범인이 현장에서 잡혔다니 다행입니다. 범행을 저지른 이유도 곧 밝혀지겠지요.”
“…….”
재찬은 한숨을 푹 내쉬곤 말했다.
“잠들었다고 하니 일단 지금은 그냥 돌아가야겠네요. 선생님께서 오시면 다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예, 그럼.”
지난번과 달리 자신에게 날을 세우지 않는 도겸에게 재찬은 묵례를 해 보이고 자리를 떠났다.
그가 떠난 후에도 한동안 도겸은 굳은 얼굴을 풀지 못했다.
얼마나 그렇게 가만히 서 있었을까 싶어질 즈음.
그는 다시 발걸음을 옮겨 병원을 나섰다.
* * *
연숙은 몇 시간 뒤인 밤에야 병원에 당도했다.
이번에는 세영에게는 이모부인 그녀의 남편도 함께였다.
연숙이 혼비백산하여 운전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또한 세영을 걱정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둘러 세영의 병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재찬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재찬은 눈물로 얼룩진 연숙의 얼굴을 보고 눈이 가라앉았다.
그녀는 서 있는 것도 힘들어 보일 지경이었다.
이내 표정을 갈무리한 그는 연숙과 그녀의 남편에게 깍듯이 인사했다.
“아이고, 안 와도 되는데. 아까도 왔었다면서.”
“아닙니다. 당연히 와봐야죠. 그리고 세영 씨가 자고 있다고 해서 병실엔 들리지 않고 돌아갔습니다.”
“일도 바쁘고 고생스러울 텐데……. 정말 고맙네.”
“전혀 고생스럽지 않습니다. 세영 씨 병실, 618호실이라고 합니다. 가시죠.”
재찬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연숙과 그녀의 남편을 모시고 병실로 향했다.
병실 안, 세영은 여전히 잠들어있었다.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이 무색하게, 그들이 들어오자 세영은 눈을 뜨고 말았다.
연숙은 그만 세영의 얼굴을 보자마자 참고 있던 눈물이 다시 터지고 말았다.
“이모…….”
누구보다도 대장부 같은 연숙이었는데.
세영이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말했던 때와 다르게, 연숙은 욕을 하거나 강한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세영은 어쩔 줄을 몰랐다.
“이모, 왜 울어. 울지 마.”
세영의 이모부는 묵묵히 연숙의 얼굴을 자신의 가슴팍으로 끌어당겼다.
그러는 이모부의 표정 또한 좋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 품에 안기다시피 한 채로 끅, 끅 소리를 죽이려 애썼다.
이미 한 차례 시원하기 울어서일까.
세영은 의연하게 연숙을 달랬다.
“이모, 나 괜찮아. 하나도 안 아파. 그러니까 울지 마.”
“속도 편하다. 지금 그런 말이 나오니? 까딱하면 죽을 뻔했으면서……, 아이고…….”
“그럼 힘든 척 울상 짓고 곡이라고 해?”
얄미운 말에 연숙이 울다 말고 세영을 흘겨보았다.
“이모, 나 정말 괜찮아. 그 사람도 바로 잡혔잖아. 이제 더 걱정할 일도 없다니까?”
“그렇게 말한다고 내가 안심할 수 있겠니? 왜 하필 너한테 자꾸 이런 안 좋은 일이 생기는지…….”
“이번 일은 운이 안 좋았던 거지.”
세영은 어색하게 뺨을 긁었다.
연숙은 눈물을 훔치며 남편의 품을 벗어났다.
그리곤 단호하게 말했다.
“안 되겠다. 이모랑 같이 내려가자.”
“뭐어?”
“병원에서 퇴원해도 된다고 하면 바로 내려가자. 불안해서 더는 혼자 못 두겠어.”
“어…….”
곧 돌아가겠다 말했었지만, 도겸과 떨어지게 되는 것이 못내 아쉬워 세영이 대답을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재찬이 연숙을 설득했다.
“선생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설마 이런 일이 또 있겠습니까. 그리고…….”
망설이던 재찬이 말을 이었다.
“세영 씨의 남자친구분도 계시지 않습니까. 분명 잘 지켜주실 겁니다. 세영 씨만 괜찮다면, 저도 있고요.”
“그래. 시골이라고 위험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너도 언제까지나 이모랑 같이 지낼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다시 복학도 해야 하고…….”
재찬까지 그렇게 말하자 연숙이 한발 물러섰다.
현실적으로 서울을 영영 떠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세영이 여전히 걱정스러운지, 표정을 풀지 못했다.
바로 돌아갈 일은 없겠구나.
안심한 세영은 재찬에게 감사한 마음을 담아 웃어 보였다.
재찬은 고개만 끄덕였다.
마주 웃어 보일 수가 없었다.
그는 세영의 일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없는 위치임을 뼈저리게 느꼈다.
연인이 아니기에. 아무 사이도 아니기에.
그녀를 지키는 일은 도겸이 해야 할 일이었다.
나머지 사람들의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재찬은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피는 행동만 반복할 뿐이었다.
* * *
한편, 도겸이 그다음 바로 향한 곳은 그의 아버지가 있는 집이었다.
한남동에 위치한 그의 집은 웅장한 저택으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위압감을 느끼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도겸이 직접 운전하고 있던 차가 대문 앞으로 다가오자 경비원이 다가왔다.
그가 집을 떠나기 전엔 보지 못했던 걸 보면, 새로 고용한 사람인 것 같았다.
경비원이 차의 창문을 두드렸다.
도겸은 천천히 창문을 내렸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상투적인 말을 내뱉으며 경비원은 귀찮은 듯 도겸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는 얼굴을 흘끔 확인한 뒤, 놀라서 다시 자세히 도겸의 얼굴을 살폈다.
“혹시 배우 민도겸 씨 아니셔유……?”
“네. 맞습니다.”
“아니, 여긴 어쩐 일로…….”
대체 배우가 이런 곳엔 왜?
경비원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도겸이 민 회장의 아들인 것을 모르는 듯했다.
도겸은 속으로 웃고 말았다.
예상은 했지만, 그의 아버지는 정말로 그를 없는 존재로 만들려 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도겸은 자세히 설명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회장님께 배우 민도겸이 왔다고 하면 열어주실 겁니다.”
“약속을 잡으신 겁니까?”
“뭐, 그런 셈입니다.”
경비원은 아리송한 대답에 긴가민가하면서도, 일단 순순히 저택 안으로 연락을 넣었다.
설마 이름도 얼굴도 널리 알려진 사람인데, 문제를 일으키겠어.
그런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잠시 후, 육중한 대문은 큰 소리를 내며 열렸다.
도겸은 그에게 인사를 한 뒤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고 보면 참 희한했다.
민 회장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긴장을 안 한 사람이 없었다.
아무리 날고기는 자들이라 해도 말이다.
매일 이 집에서 일을 하는 그조차도 민 회장이 나설 때면 바짝 긴장하게 되곤 했다.
그런데 도겸에게선 그런 긴장감, 떨림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뭐, 배우니까.’
경비원은 긴장을 잘 숨긴 거겠거니 생각하고 넘겨버렸다.
가장 먼저 그를 반겨준 사람은 그의 어머니, 나겸이었다.
“도겸아.”
“어머니.”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도겸을 껴안았다.
도겸은 미소지으며 어머니의 등을 토닥였다.
나겸은 포옹하던 것을 풀고 도겸의 양 뺨을 손으로 감쌌다.
“이게 얼마 만에 보는 얼굴이야.”
도겸이 집을 떠나고 벌써 몇 년이 흘렀다.
물론 TV를 통해 볼 수는 있었지만, 그녀로서는 안 보는 것만 못했다.
더욱더 아들을 보고 싶게 만들기만 할 뿐이었다.
“이제 다시 돌아오기로 한 거야?”
“아뇨. 오늘은 다른 일 때문에 왔어요.”
“다른 일이라니? 그럼 집에 돌아온 게 아니라고?”
“…….”
도겸은 말을 아꼈다.
오랜만에 온 집은 이전과는 약간 달라져 있었다.
새로 산 장식품들과 가구들이 눈에 띄었다.
전부 그의 어머니의 취향에 맞춘 것이었다.
그때 묵직하면서도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똥고집만 부리던 놈이 집엔 뭐 하러 기어들어 왔어?”
도겸의 아버지, 민 회장이 계단 위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계단을 내려오면서도 영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아버지.”
둘 사이 반갑다거나 환영한다는 인사말은 오가지 않았다.
예상하던 반응이었다.
도겸은 주저하지 않고 바로 본론을 꺼냈다.
그는 천천히 아버지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아니, 얘가. 왜 그래. 얼른 일어서.”
나겸은 깜짝 놀라 그를 일으키려 하였지만, 민 회장은 눈 하나 꿈쩍이지 않았다.
“아버지, 도와주세요. 함 회장의 딸, 함다은이 살인 청부교사를 했습니다.”
“살인 청부교사? 얘, 그게 무슨 말이야?”
“…….”
아직 아무것도 듣지 못했던 나겸과 달리 민 회장은 김 실장에게 언질을 받은 참이었다.
“이대로는 함 회장이 묻으려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 전에 아버지께서 압력을 실어주세요.”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민 회장이 코웃음을 쳤다.
“예쁜 놈도 아니고, 제 아비 말도 안 듣는 녀석을 위해 내가 왜?”
“여보!”
나겸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민 회장을 노려보았다.
도겸은 그의 말에 개의치 않았다.
“……함다은이 더는 제 주변 사람들에게 해를 가할 수 없도록 해주세요. 부탁입니다.”
“아, 싫다니까.”
“당신 진짜 이럴 거예요?”
결국 나겸이 벌컥 화를 냈다.
그녀는 민 회장이 도겸에게 까칠하게 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애초에 도겸이 나가게 된 원인 제공자도 민 회장이었다.
결국 나겸이 못 참고 그를 닦달하여 도겸에게 김 실장을 보내도록 했었다.
그런데 몇 년 만에 온 귀하디귀한 내 새끼 다시 가버릴라, 저런 태도라니.
하여튼 하는 짓이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왜 나한테만 뭐라 그래? 내 말이 틀려? 저 필요할 때만 기어들어 오는 놈이 뭐가 그렇게 예쁘다고 그래?”
“그러는 당신은 뭘 잘했다고 애한테 그래요? 먼저 굽히고 온 걸 감사하게 여기지는 못할망정, 애한테 왜 그런 식으로 말해요?”
“너 나보다 애가 더 소중해? 도겸이 나간 이후로 계속 바가지만 긁더니. 나 당신 남편이야. 남편!”
“너? 지금 너라고 했어요?”
나겸이 싸늘하게 말하자 민 회장은 깨갱, 찍소리도 못했다.
그녀는 원래 민 회장의 고등학교 선배였다.
민 회장이 자신보다 두 살 많던 나겸에게 첫눈에 반해 계속 쫓아다녀 사귀고 결혼하게 된 것이다.
더 좋아하는 쪽이 지는 거라고.
결혼하고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민 회장은 나겸에게 항상 질 수밖에 없었다.
나겸은 그를 처음엔 성가셔했지만, 그의 지극정성에 마음을 연 것이기에 더더욱 그랬다.
그래서일까, 사실상 이 집안의 실세는 나겸이었다.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민 회장에겐 강하게 자신의 의견을 밀어붙이던 나겸이, 도겸에게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도 속 끓였던 날들을 생각하면 아들이 밉긴 했지만, 무릎을 꿇고 제 앞에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이 더 속이 탔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딱 그 짝이었다.
“도겸아, 일단 일어나서 얘기하자.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야?”
계속 무릎을 꿇은 채로 있던 도겸은 그제야 일어섰다.
거실의 소파에 마주 앉아. 그는 차분히 그간 있었던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