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겸이 마침 약과 파스를 사고 약국을 나선 참이었다.
모르는 전화번호로 전화가 왔다.
보통이라면 받지 않고 무시했을 전화.
하지만 눈에 익은 번호에 도겸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도련님.”
“역시 김 실장이네. 왜. 어제 그렇게 따라다니면서 괴롭히더니. 오늘은 내가 어딨는지 몰라서 전화 걸었어?”
“압니다. 어디 계신지. 어떤 여성분과 계신다는 것도요.”
“뭐?”
도겸의 목소리에 당황이 묻어났다.
어제 결국 쫓아왔단 거야?
질문하기도 전에 김 실장이 다급하게 물었다.
“그것보다 도련님, 혹시 호텔 방으로 누가 오기로 약속되어 있었습니까?”
“무슨 소리야. 남자?”
“지금 막 방 안에 웬 남자가 들어갔습니다.”
김 실장의 말을 들은 순간 예재찬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가 세영이 묵고 있는 호텔 방도 알고 있었던가?
“어떻게 생긴 남잔데?”
“불법적인 일을 할 것만 같은, 얼굴에 큰 흉터가 있는 남자입니다. 아무래도 낌새가 이상해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가슴에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세영이는 그런 남자 몰라.”
불안감이 엄습했다.
“김 실장, 지금 당장 방문 억지로라도 열고 들어가!”
김 실장의 대답도 채 듣지 않고 도겸은 호텔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건만, 너무나도 멀게 느껴져 속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세영아.’
거친 숨을 내뱉으며 도겸은 호텔 로비에 당도했다.
도겸은 서둘러 엘리베이터를 확인했다.
두 대의 엘리베이터 모두 올라가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층마다 서서 올라가는 속도가 굼벵이 같았다.
“제기랄.”
세영의 방은 9층.
마냥 서서 기다릴 수 없었다.
도겸은 서둘러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쉴 틈 없이 뛰어 계단을 올랐다.
2층, 3층.
빠른 속도로 층을 올라갔다.
숨이 차올랐지만 도겸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수가 없었다.
세영에 대한 걱정으로 몸이 덜덜 떨려왔다.
아파서 끙끙 앓고 있던 세영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소중한 사람을 잃을 수 있다는 공포가 도겸을 덮쳐왔다.
그로선 생전 처음 겪는 감정이었다.
급한 마음에 제 다리에 걸리고 말았다.
계단 모서리를 짚은 손바닥은 피부가 벗겨지고 난간에 쓸린 뺨에는 생채기가 생겼다.
그렇지만 아픔도 느끼지 못한 채로 도겸은 다시 계단을 올랐다.
미친 듯이 올라간 덕분인지, 곧 9층에 다다랐다.
무거운 철문을 열자마자 세영의 방이 위치한 복도가 보였다.
아수라장이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고함이 오갔다.
큰 소란에, 방 안에 있던 숙박객들도 밖으로 나와 무슨 상황인지 살피고 있었다.
마스터키를 들고 왔을 호텔 직원과 김 실장이 데려온 사람들이 남자를 막 바닥에 눕혀 제압하고 있었다.
남자는 거칠게 저항했다.
건장한 남자들이 여럿 매달려 붙잡아야만 할 힘이었다.
도겸의 눈에 바닥에 떨어져 있는 칼이 보였다.
남자가 들고 온 것이 분명했다.
도겸은 서둘러 떨리는 걸음을 옮겼다.
필사적으로 세영의 흔적을 찾았다.
세영이 무사한지를 파악해야 했다.
열린 문틈으로, 김 실장이 여자를 안아 나왔다.
“세영아!”
움직이지 않은 채로 축 늘어진 세영의 모습에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세영아, 세영아.”
반쯤 정신이 나간 도겸이 달려들자, 김 실장이 물러섰다.
“기절하셨습니다. 이곳저곳 다치시긴 했지만, 다행히 목숨에 지장은 없으신 듯합니다.”
그제야 세영의 팔에 감긴 흰 천이 도겸의 눈에 들어왔다.
지혈을 하기 위해 묶은 천 위로, 피가 붉게 스며들어 있었다.
칼에 의한 상처였다.
머리는 헝클어졌고 보이는 피부 이곳저곳에도 벌써 멍이 들어있었다.
목에는 누군가 조른 듯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도겸의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누가 말릴 틈도 없이, 도겸이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이 개자식!”
“어억.”
도겸은 남자에게 주먹을 내질렀다.
남자의 멱살을 잡은 채로 계속해서 내리쳤다.
저 칼이 세영의 목에 향할 수도 있었단 사실이 도겸을 돌게 했다.
“크억.”
“감히 이 쓰레기 같은 자식이!”
깜짝 놀란 사람들이 도겸을 뜯어냈다.
이성을 잃은 도겸이 몸부림쳤다.
쓰고 있던 모자는 어느새 반쯤 벗겨졌다.
“이거 놔! 이거 안 놔?”
“침착하세요!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자신의 부하에게 세영을 맡긴 김 실장이 도겸의 앞을 막아섰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정신 차리세요. 상황 무사히 종료됐습니다.”
도겸이 눈을 부릅떴다.
“저게 어떻게 무사히 끝난 거야. 까딱하면 세영이가 죽을 뻔했다고! 이거 놔! 내가 저 새끼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라고!”
“도련님. 저 여성분께서 도련님이 이러시길 바라셨을까요?”
세영을 언급하자 도겸의 반항이 조금 줄어들었다.
김 실장이 차분하게 도겸을 설득했다.
이 일에 도겸이 연루됐음이 알려져선 곤란하다.
도겸의 입장에서도. 기업의 입장에서도.
“더는 소동을 키워서는 안 됩니다. 제게 처분을 맡겨주시면 부족함 없이 처리하겠습니다.”
도겸은 이를 으득 갈았다.
분했다.
눈앞에 세영을 해치려 한 놈이 있는데 손끝 하나 댈 수 없다니.
법에 따라 무른 죗값을 치르게 되리라는 것이라는 것이 화가 났다.
살인미수였다.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을,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죽이려 했다.
남자는 죽여도 쌌다.
그리고 도겸은 남자를 제 손으로 죽여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세영이 싫어할 일임을, 누구보다 도겸이 제일 잘 알았다.
김 실장이 도겸의 모자를 좀 더 깊게 눌러 씌우며 말했다.
“나머지 일도 제가 정리하겠습니다. 얼른 자리를 피하시지요.”
띵.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경찰들과 구급대원들이 내렸다.
김 실장이 도겸을 뒤로 물러나게 했다.
마치 도겸도 구경꾼 중 하나인 것처럼 그를 숨겨 버렸다.
구급대원들은 세영을 들것에 실어 옮겨 갔다.
경찰들은 일사불란하게 남자에게 수갑을 채우고 설명을 듣기 시작했다.
자신이 나서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지만, 도겸은 좀처럼 화를 삭일 수가 없었다.
그 뒤로 민수도 따라 내린 것이 보였다.
김 실장이 호텔에 도착한 민수에게 연락을 취한 것이었다.
그가 이곳을 강제로라도 떠나게 하기 위해 말이다.
“너……. 도대체가…….”
“…….”
민수는 일단 도겸을 보면 화를 내려 했었다.
하지만 돌아가는 상황과 도겸의 표정을 보니 화를 낼 수가 없었다.
민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나가자. 도겸아, 응?”
도겸은 더는 고집부리지 않고 민수를 따라나섰다.
도겸이 자리를 떠나는 것을 본 뒤, 김 실장은 경찰들에게 자신이 누군지 소개하고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물론, 모든 것을 말한 건 아니었다.
도겸에 대한 부분은 교묘히 숨겼다.
숨겼을 뿐, 어쨌든 거짓을 고한 건 아니었다.
김 실장은 자신의 직원들에게 구경꾼 입단속을 시켰다.
그들이 도겸의 정체를 알아차린 것 같진 않았지만, 신중히 행동해서 나쁠 건 없었다.
김 실장은 두 번 세 번 확인하도록 한 뒤 경찰들과 함께 서로 향했다.
* * *
“대체 어떻게 된 거야?”
“…….”
민수가 벌컥 화를 냈다.
소속사 회의실 안. 도겸과 미연이 민수의 앞에 앉아있었다.
민수는 도겸이 촬영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 판단하고 광고 촬영을 연기했다.
촬영 펑크. 광고 계약에, 그리고 도겸의 이미지에 큰 타격을 줄 일이었지만 하는 수 없었다.
사건이 있던지 채 몇 시간도 되지 않아, 도겸의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민수는 양손에 얼굴을 묻고 있는 도겸을 노려보았다.
“민도겸, 너 대답 안 해? 너 세영 씨랑 방송국에서 마주친 날 이후로 계속 나 몰래 연락해왔던 거냐?”
민수는 도겸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설마 도겸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줄은 몰랐다.
게다가 세영과 만나지 말라고, 너의 커리어에 타격을 줄 수 있다고 그렇게 말을 했는데.
그의 말을 듣지 않아 이 사달이 났다.
미연은 슬쩍 민수의 눈치를 살피다 민수와 눈이 마주쳤다.
“미연이, 너. 설마 너도 알고 있었어?”
“어, 아니, 그게요.”
“하……! 이것들이 단체로 짜고……!”
미연은 변명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민수가 이마를 짚었다.
“민도겸, 너. 파파라치라도 있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어떻게 겁도 없이 여자애가 혼자 묵는 호텔에 막 들어가?”
“…….”
“오늘 일도 그래. 어쩔 수 없는 사고인 거 알지. 네가 화날 수밖에 없다는 거 알지만. 사람을 그렇게 패? 네가 깡패야? 예전에 선배 배우랑 폭행 관련 루머가 있었던 만큼 조심해야 하는 거 너 알아, 몰라?”
민수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따졌다.
“우리야 억울한 루머란 거 알고 오해도 다 풀렸지만, 이런 일 있으면 다시 의혹, 논란 생길 수 있다는 걸 정말 몰랐어?”
도겸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민수는 답답함에 가슴을 치며 말했다.
“도겸아, 네가 아무리 지금 잘 나가고 인기가 많아도, 이거 다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는 거 알잖아. 사람들 돌아서는 거 순식간이야. 지금껏 잘해오다가 갑자기 왜 그래!”
민수의 언성이 점점 높아지자, 드디어 도겸이 입을 열었다.
“……형.”
도겸이 손에 묻고 있던 얼굴을 들어 올렸다.
여전히 그의 표정엔 분노가 서려 있었다.
잠긴 목소리로 도겸이 말했다.
“세영이 오늘 죽을 뻔했어. 어쩔 수 없는 사고건 뭐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잘못한 것도 없는데 칼 맞고 죽을 뻔했다고. 내가 그럼 그 상황에서 눈이 안 돌아가?”
세영이 죽을 뻔했다는 말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몰랐던 미연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대중들 돌아서는 거 순식간인 거 나도 잘 알아. 조심해야 하는 거 안다고. 근데 그렇다고 내가 배우라서. 내 소중한 사람이 위험한 상황에서 그냥 등신같이 멀거니 보고만 있어야 해?”
“…….”
“그건 아니잖아. 나 연기하는 거 좋아해. 배우가 내 천직이라고 생각했어. 그래도 이건 아냐.”
설마. 민수는 도겸이 다음에 할 말이 두려웠다.
“이런 게 배우라면 나는 배우 그만둘래.”
“너……!”
“미안. 나 오늘은 이만 가볼게. 다음에 얘기해.”
대답을 듣지도 않고, 도겸은 회의실을 나섰다.
쾅.
“하…….”
문이 닫히자 민수는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미연아. 내가 잘못한 거냐? 저 녀석이 저렇게 말할 정도야?”
미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저……, 서로의 입장이 달랐을 뿐이었다.
양쪽의 입장 모두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이해할 수 있었다.
미연은 민수의 등을 살짝 토닥여줬다.
민수는 피곤한지 안경을 벗고 관자놀이를 짚었다.
* * *
회의실 밖으로 나선 도겸은 곧장 세영이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아쉽게도, 세영을 바로 볼 수는 없었다.
병실에는 자초지종을 듣기 위해 경찰들이 먼저 자리하고 있었다.
“우선 이리로.”
김 실장이 경찰과 마주치지 않도록 도겸을 안내했다.
도겸은 순순히 따라가면서도 병실 문에 난 창을 바라보았다.
의식을 되찾은 세영은 피곤하고 정신이 없어 보였다.
김 실장은 도겸이 세영을 보는 것을 알아차렸다.
“많이 놀랐을 텐데 차분하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설명하더군요. 도련님보다도 침착하니 괜찮을 겁니다.”
김 실장은 도겸을 안심시키고자 노력했다.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절차였다.
도겸이 걱정할 만한 일은 없었다.
“그보다는 도련님이 조심하셔야 합니다. 사건이 벌써 기사화가 됐습니다. 병원에 기자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고는 있지만, 어떻게 숨어들어올지 모릅니다.”
“그 새끼는 어떻게 됐어요.”
“지금 조사 중입니다만. 이상한 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이상한 점?”
도겸의 눈이 형형히 빛났다.
“그게…….”
김 실장이 뜸을 들였다.
“말해봐요.”
“……조사해보니, 전과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전과 목록이 전부 성범죄가 아닌 절도, 폭행죄 등등이었습니다. 세영 씨를 겁탈하려고 한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도겸은 가만히 김 실장의 말에 집중했다.
“그렇다면 왜 죽이려 했냐고 형사가 직접 물어봤습니다만. 비죽비죽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를 않더군요. 협박도 하고 살살 구슬려도 봤지만, 자기는 말 못 한다는 태도였습니다.”
김 실장이 망설이다 이어서 말했다.
“여기서부턴 제 생각입니다만. 애초에 그저 단순히 누군가를 죽이고 싶었다면 굳이 호텔에 들어와, 도망치기 쉽지도 않은 9층에 숙박하는 류세영 씨를 목표로 삼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김 실장님 말씀은 그 남자가 애초에 세영이를 노렸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까?”
도겸의 인상이 험악해졌다.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예. 그렇습니다.”
“대체 왜?”
“그 이유까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소지품 중에 대포폰이 있더군요. 지금 사용 내역을 경찰 측에서 조사하고 있는데, 만약 류세영 씨를 노렸다면 어떠한 증거가 남아있을지도 모릅니다.”
때마침 김 실장의 핸드폰이 울렸다.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한 김 실장이 말했다.
“경찰 쪽의 전화입니다.”
“받아 봐요.”
“예. 어떻게 됐습니까.”
전화 반대편의 사람이 말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설명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김 실장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윽고 전화가 끝난 뒤에도, 그는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답답한 마음에 도겸이 먼저 물었다.
“경찰 쪽에서 뭐래요. 무슨 단서라도 찾았답니까?”
“……그게.”
이윽고 천천히 이어진 김 실장의 말에 도겸의 표정이 굳어졌다.
“대포폰으로 요 며칠간 연락한 상대가 딱 한 사람뿐인데, 그 상대가…….”
김 실장이 마른침을 삼켰다.
“함다은 씨라고 합니다.”
도겸은 숨을 들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