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도겸은 의류 브랜드의 화보 촬영 중이었다.
“다은 씨. 조금만 더 도겸이한테 기대고, 가볍게 웃어주세요!”
다은도 함께였다.
원래는 도겸만 홀로 찍는 화보였다.
다은의 수작으로 커플 화보가 되어버렸다.
지금 두 사람은 롱패딩을 입고 촬영 중이었다.
다은은 사진작가의 주문에 맞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행히도 촬영은 순조로웠다.
웬일인지 다은이 얌전했다.
도겸에게 과하게 붙으려 하거나 자극하지도 않았고, 스태프들에게 성질을 부리지도 않았다.
말을 하지 않았지만, 촬영장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다은을 보며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중에는 도겸의 스태프로 따라온 민수와 미연도 있었다.
민수가 옆에 서 있는 미연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오늘 좀 이상하지?”
“네. 이상하네요. 왜 이렇게 순조롭지?”
“함다은 씨가 조용해서 그런 거지. 뭐.”
당연하다는 듯 민수가 말하자, 미연이 빠르게 말했다.
“그게 이상하다는 거예요. 너무 희한하게 조용하잖아요!”
살짝 높아진 언성에 주변 사람들이 두 사람을 흘끔 바라보았다.
목소리를 다시 가다듬으며 미연이 말했다.
“큼, 잘 생각해봐요. 함다은이 갑자기 활동을 쉰다는 건 분명 자기 의지로 생긴 일은 아니겠죠?”
민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갑자기 쉴 이유가 없는데 쉰다는 건……. 혼났다거나 저지당했거나 한 거겠지.”
“그쵸? 그러면 함다은이 저 성질머리에 화가 안 나 있겠어요? 전 그래서 오늘도 분위기 안 좋겠구나. 난장판이겠구나. 각오하고 왔다고요.”
그런데 이렇게 조용하다니.
미연이 불신의 눈초리로 다은 쪽을 바라보았다.
민수는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뭐,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마. 크게 혼나서 철 좀 들었나 보지. 정신 좀 차렸거나. 우리야 잘된 일 아니겠어?”
“나쁜 일은 아니지만…….”
미연이 말끝을 흐렸다.
왜 이렇게 불안하지?
미연은 다은이 얌전한 것이 걸렸다.
평화롭다기보다는, 마치 폭풍전야의 고요함 같았다.
곧 무언가 더 큰 사고가 벌어질 거라고 예고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미연을 보고 민수가 말했다.
“걱정되는 건 알지만. 너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 필욘 없어. 너만 스트레스받아.”
미연이 한숨을 푹 쉬고 말했다.
“맞아요. 제가 지금 과민반응하는 거겠죠?”
웃어 보였지만 여전히 찜찜함이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었다.
미연은 애써 머릿속을 비우려고 노력했다.
“도겸 씨! 집중!”
때 마침 사진작가가 외쳤다.
다은이 오늘따라 얌전하고 고분고분했다면, 도겸은 오늘따라 산만했다.
“죄송합니다.”
도겸은 얼른 사과하고 다시 촬영에 집중해서 임했다.
하지만 종종 무언가 딴생각이라도 난 것처럼 굴어 흐름에 방해가 되었다.
민수가 인상을 찌푸리며 안경을 치켜올렸다.
“문제는 도겸이네. 도겸이야. 저 녀석 오늘 왜 저래?”
“그, 그러게요. 거 참 이상하네. 하하.”
미연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녀는 원인을 알고 있었다.
오늘 아침, 민수가 없는 틈을 타서 도겸이 상담을 요청했다.
자신이 너무 짐승 같다나 뭐라나.
세영은 딱히 아무 생각이 없는 것 같은데 자신은 자꾸 세영과 더 붙어있고 싶어서 미치겠단다.
그래서 어제는 세영과 함께 있다가 도망쳤다고 도겸이 실토했다.
“사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내가 이렇게 자제력이 없는 줄은 몰랐어.”
도겸은 머리를 감싸 쥐고 고통스러워했다.
잊고 있다가 다시금 그 생각이나 미연은 썩은 표정을 지었다.
미연은 도겸을 인간적으로 참 아꼈지만, 오늘 아침의 도견은 참 꼴불견이었다.
이게 고민을 상담하는 건지 자기들 알콩달콩하다고 자랑하는 건지.
사귀고 행복해 죽겠어요! 세영이가 너무 좋은데 어떡하죠?
미연의 귀에는 딱 이렇게 들렸다.
아주 난리도 난리가 아니어서, 미연은 들고 있던 퍼프로 도겸의 이마를 다 때리고 싶었다.
“하하.”
미연의 마음속 불안을 몰아내는 데 도겸이 큰 도움을 주었다.
미연은 메마른 웃음소리를 내뱉었다.
다은에 대한 경계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 * *
호텔 로비에는 언제나 그랬듯 사람이 많았다.
이제 12시였다.
세영은 로비에서 재찬의 연락을 기다렸다.
그가 차를 끌고 온다고 했으니, 전화나 문자가 오면 맞춰서 나갈 생각이었다.
밖에서 기다리기엔 날이 추웠다.
세영에게 누군가가 뒤에서 서서히 다가왔다.
“세영 씨.”
세영은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재찬이 그녀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가 로비로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세영은 눈을 깜박였다.
재찬은 깔끔한 정장 차림이었다.
“어, 안녕하세요.”
반면 세영은 청바지에 후드티, 그리고 패딩이었다.
너무 편하게 입고 나왔나?
당황스러워진 세영이었다.
재찬은 세영 앞에서 멈춰 섰다.
“연락해주셨으면 제가 나갔을 텐데요.”
“혼잡해서 제가 오는 편이 효율적이라 판단했습니다.”
“그으렇군요.”
아무래도 재찬에게 자신은 길치로 낙인찍혀 있는 게 아닐까.
방송국에서 길을 심하게 헤매긴 했지. 하하.
세영은 한숨을 쉬었다.
재찬은 세영의 정수리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밖에 차를 세워뒀습니다. 가시죠.”
세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재찬의 뒤를 따라갔다.
세영이 호텔 밖으로 나가는 것을 뒤에서 한 남자가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다은의 돈을 받고 세영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문제는 세영이 도통 호텔 밖을 나오질 않는다는 점이었다.
남자는 한참을 대기하다 결국 호텔 안으로 들어왔다.
운 좋게도 세영이 오랜만에 밖에 좀 나오나 싶었더니, 동행인이 있었다.
남자는 곤란함에 턱을 긁었다.
기다란 흉터의 감촉이 손끝에 느껴졌다.
수를 쓰기는커녕 아직 시도조차 못 했다니.
남자는 이미 돈의 절반은 받았고, 다은은 빠른 처리를 바랐다.
다은은 세영이 없어지길 바랐고 남자에게 합당한 돈을 지불했다.
양심이 있지, 돈 받은 만큼은 일하자는 것이 남자의 신조였다.
이번 일은 남자에게도 조금은, 아니 아주 많이 위험한 것 같았지만.
게다가 남자가 봤을 때도 아무 죄도 없는 세영이 불쌍하긴 했지만.
약속은 약속이었다.
그런데 세영이 방 밖으로 나오길 기다려서야 끝이 없을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남자는 비릿하게 웃었다.
나오지 않는다면 제가 들어가는 수밖에.
이내, 그는 사람들 틈에 행적을 감췄다.
세영은 재찬의 차를 타고 음식점으로 향했다.
그녀가 지금 가는 음식점이 어딘지 묻자, 재찬은 이름과 위치를 알려주었다.
유명한 곳인가?
언젠가 들어본 것 같은 이름에 세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화는 그게 끝이었다.
세영도 딱히 무언가 말을 걸려 하지 않았고, 재찬은 원체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다.
침묵이 아주 불편하진 않았기에 세영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학교 종강과 함께 연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크리스마스도 며칠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덕분에 창밖은 온통 크리스마스 분위기였다.
도겸과 처음으로 맞게 되는 이벤트였다.
선물을 준비하는 게 좋을지. 준비한다면 무엇이 좋을까.
순간 들떴던 세영이었지만, 곧바로 기분이 착 가라앉았다.
크리스마스 날엔 도겸과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 아직 몰랐다.
어쩌면 도겸은 그날도 바쁠지 몰랐다.
인상을 찌푸리고, 세영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곧 도착할 건지 차가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풍경은 낯익은 듯하면서도 처음 보는 곳 같았다.
이내 도착한 듯 차가 멈춰 섰다.
세영은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어! 여기.”
안전벨트를 풀면서 재찬이 물었다.
“와 보신 적 있으신가요?”
“네.”
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도겸과 미연, 승완과 함께 왔던 바로 그곳이었다.
신기한 마음에 세영이 크게 웃음을 지었다.
“우와. 여기 유명한가 봐요.”
재찬은 자신을 만나고 처음으로 웃는 세영을 보며 작게 웃어 보였다.
“유명하기도하고. 제 지인이 하는 곳입니다.”
“헉.”
재찬을 따라 차에 내리던 세영은 차 반대편에 서 있는 재찬을 바라보았다.
그가 새삼스럽게 다시 보였다.
재찬과 세영은 안으로 들어갔다.
재찬이 오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 사장이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사장은 재찬이 데려온 세영과도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는 세영이 연숙의 조카라는 것을 듣고 두 사람이 어떻게 같이 왔는지 납득한 것 같았다.
화기애애하게 안부 인사를 건네며 그가 직접 재찬과 세영을 자리로 안내했다.
메뉴 선택도 빠르게 이어졌다.
두 사람만 남게 되자 세영이 말했다.
“잊고 있었어요. 재찬 씨 실력이 출중하고 유명한 요리사였죠.”
“아직 그렇게 칭찬받을 정도는 아닙니다.”
“아니에요. 이모도 칭찬하셨는걸요. 그리고 그때 요리도 맛있었고요.”
“……맛있었다면 다행입니다.”
재찬이 와인 잔에 담긴 물을 마시며 미소 지었다.
그날, 세영의 맛있다는 말에 재찬은 그녀를 다시 보았다.
재찬은 그녀 또한 자신을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아니, 분명 싫어했다.
그가 먼저 호의적이지 않게 행동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자신의 요리는 솔직하게 인정하고 칭찬하는 모습이 의외였다.
그리고 자신이 그녀를 섣불리 판단해, 편견에 사로잡혀 보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서 재찬이 질문을 던졌다.
“세영 씨는 진로를 정하셨습니까?”
“진로요?”
“네. 한연숙 선생님께 듣기로는 세영 씨도 요리를 좋아한다고 들었습니다만. 혹시 요식업에 관심이 많으신가 해서요.”
“아……. 글쎄요…….”
재찬을 바라보고 있던 세영은 고개를 숙여 식기를 바라보았다.
진로라…….
“진로에 대해선…… 아직까진 생각해보지 않은 것 같아요. 말씀대로 요리를 좋아하긴 하지만, 이모처럼 실력이 좋거나 한 것도 아니고요.”
세영이 씁쓸하게 말했다.
학교를 휴학하고 마냥 틀어박혀 지냈던 1년이 이제야 아깝게 느껴졌다.
그동안 그녀는 진로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모의 학원 일을 도우며 그저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냈다.
분명 진희나 다른 동기들은 그녀보다 먼저 진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나름의 결정을 지었을 텐데.
그 1년 동안 놓치고 있었던 것을 재찬의 질문으로 확연하게 느낀 기분이었다.
세영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재찬이 세영의 기분을 살피곤 말했다.
“괜찮아요. 늦지 않았어요. 인생 깁니다.”
무뚝뚝하고 투박한 말이었지만 세영은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마치 재찬이 그녀를 위로하는 것 같았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세영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의외예요. 예재찬 씨한테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어요.”
“…… 세영 씨한테 제 첫인상이 좋지는 않았겠죠.”
“제 첫인상도 좋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처음부터 날카롭게 대하셨잖아요.”
눈을 내리깔고 있는 재찬을 보면서 세영이 지적했다.
“그건, 죄송합니다. 제가 무례했습니다.”
선선히 사과하는 재찬에 세영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장난스럽게 말한 것이었는데 재찬은 진지하게 사과했다.
그녀는 재찬이 자존심 세고 거만한 사람일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그의 진심 어린 사과가 더 놀랍게 다가왔다.
“용서하겠습니다. 그날 재찬 씨도 저 찾아다니느라 짜증 나셨을 거고요. 그땐 저도 정말 죄송했어요.”
두 사람을 둘러싼 분위기가 한결 편해졌다.
오기 전까진 재찬과의 식사가 마냥 불편할 것 같았는데 다행이었다.
좀 더 편하게 밥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윽고 주문한 메뉴가 나오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두런두런 음식에 대해 얘기를 하면서 식사를 시작했다.
이야기는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요리라는 공통된 관심사 덕분이었다.
재찬은 한식, 양식, 중식, 일식 가리지 않고 해박했고, 세영은 연숙을 통해 배우게 된 지식이 많았다.
또한 재찬이 직접 음식점을 운영하면서 생겼던 해프닝이나, 고안한 레시피들은 정말 흥미로웠다.
모든 접시를 깨끗이 비우고 디저트가 나오고서야 두 사람은 잠시 대화를 멈췄다.
세영은 재찬에 대한 평가를 180도 바꿨다.
그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세영의 입가엔 자연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재찬이 입을 열었다.
“세영 씨. 진로, 요리 쪽은 어떠신가요.”
“요리 쪽이요?”
세영이 고개를 들어 재찬을 바라보았다.
재찬이 눈을 마주해왔다.
“네. 세영 씨는 잘하실 것 같다는 감이 옵니다.”
진지한 재찬의 눈빛에 왠지 부끄러워진 세영은 볼을 긁었다.
“하지만……, 저는 이모나 재찬 씨처럼 요리에 대한 열정이 가득한 것도 아니고요.”
“제 눈에는 충분해 보입니다만.”
“요리를 전문적으로 배운 것도 아니고요.”
“배우면 되죠. 그리고 선생님 아래에서 자라셨으니, 기본기가 없지 않으실 겁니다.”
“게다가 전공은 경영인데요.”
“그거 잘됐네요.”
세영이 말하면 차례차례 재찬이 반박해왔다.
왜 이렇게 열성적으로 반박하는 건지.
자신을 너무 좋게 포장해주는 재찬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왜 굳이 그렇게까지…….”
“그러게요. 제가 왜…….”
자신의 질문에 재찬이 오히려 의문을 가졌다.
“네?”
“아닙니다. 그냥, 세영 씨랑 같이 일하면 좋을 것 같아서요.”
그냥 사람이 마음에 들어서. 일을 같이 하고 싶다.
재찬은 자신의 마음을 그렇게 단정지었다.
“네. 취향도 잘 맞고, 같이 일하면 세영 씨 일 잘할 것 같습니다.”
재찬의 호평에 세영의 눈이 커졌다.
“그렇게 까지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제든 생각 생기면 연락 줘요.”
세영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렇게 식사는 끝났다.
세영은 얼른 계산대에 가 자신이 계산하려 했지만 재찬이 막았다.
“오늘은 제가 뵙자고 한 거니까요.”
세영이 뭐라 하기도 전에 재찬이 계산을 마쳐버렸다.
사장은 재찬에게 카드를 다시 건네주면서 재찬에게 물었다.
“재찬아. 같이 오신 분이 방송 쪽 일하셔?”
“뭐?”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재찬이 되묻자 사장이 말했다.
“우리 애들이 그러는데 함께 온 여자분께서 며칠 전에 배우 민도겸 씨랑 승완 씨랑 다른 스태프까지 네 명이 함께 우리 가게를 방문해주셨다고.”
재찬은 확인을 바라는 듯 세영을 돌아보았다.
사장도 대답을 기다리며 흥미롭다는 듯 세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