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락?”
도겸은 세영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응. 아버지한테서.”
“그럼 좋은 일 아니야? 아버지께서 한 수 접고 들어가시겠다는 의미라거나…….”
“그건……. 아닌 것 같아. 아니, 잘 모르겠어…….”
도겸의 표정은 농담으로도 좋다고 할 수가 없었다.
세영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도겸을 바라보았다.
그런 세영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채, 도겸은 생각에 잠겼다.
*
“회장님께서 찾으십니다.”
단정한 정장 차림에 무뚝뚝한 표정.
도겸이 잘 아는 남자였다.
김 실장. 그는 자신의 아버지, 민 회장의 유능한 수족이었다.
그는 회사일 뿐만 아니라 집안의 대소사에도 크게 관여해왔기에 도겸은 어릴 적부터 그를 자주 봐왔다.
“비서실장이나 되는 사람이 왜 굳이 나를 직접 찾아와요. 회사 일이 한가한가 봐요?”
도겸은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저 안 갑니다. 그러니 헛수고하지 말고 돌아가세요.”
단호하게 말하고, 도겸은 돌아섰다.
다시 대기실로 돌아가려 했다.
“도련님.”
그러나 김 실장의 목소리가 그를 붙잡았다.
도겸은 우뚝 멈춰 섰다.
“오랜만에 보는 건데 이렇게 가시는 겁니까?”
무뚝뚝한 얼굴과 달리, 김 실장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도겸을 오래 봐온 그는, 도겸이 정에 약한 것을 알고 있었다.
도련님이라는 호칭도, 어릴 적 생긴 두 사람 사이의 장난스러운 애칭이었다.
결국 도겸은 다시 몸을 돌려 김 실장을 마주했다.
“아무리 김 실장이 달래도 저 안 가요.”
도겸은 김 실장을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그는 요 몇 년 사이 흰 머리가 늘어 있었다.
그것이 괜히 더 자신의 마음을 약하게 만들어, 도겸은 머리를 저었다.
단호하게 거절해야 했다.
김 실장은 같은 자세, 같은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회장님이 보고 싶어 하십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도겸이 웃음을 흘렸다.
“아버진 내가 보고 싶었다면 왜 직접 연락하지 않고 김 실장을 시켰대요? 내가 어디 사는지, 전화번호가 뭔지 알아내는 건 손가락 튕기는 것보다 쉬웠을 텐데요.”
김 실장의 눈이 살포시 접혔다.
그에겐 다 큰 도겸이 여전히 어린 아이 같이 보였다.
그것도 아버지가 애정을 주지 않아 토라진 사랑스러운 아이처럼 말이다.
“표현이 서툰 거 아시지 않습니까.”
“하.”
표현이 서투니 네가 이해하라. 이건가.
도겸은 못마땅했다.
그 마음은 애꿎은 김 실장에게 표출이 됐다.
“배우 일을 할 거면 넌 이 집 사람이 아니라고 했잖아요. 설마 한 입으로 두말 하신답니까?”
끄응. 김 실장은 속으로 신음했다.
그가 보기에도 회장님이 심하셨다.
할 말이 있고, 안 할 말이 있지.
김 실장으로선, 회장님의 심정이 아주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도겸의 아버지이자 자신의 상사인 민 회장은 회사에 대한 애착이 굉장히 강했다.
가진 것 없이 자수성가하여 거대한 그룹을 일구어냈기에 더욱더 그러했다.
그 모습을 옆에서 봐온 김 실장 또한 민 회장의 애착에 공감했다.
문제는, 민 회장은 그렇기에 그의 자식도 자신의 뒤를 이어 그룹을 이끌어 나가길 바랐다.
그런데 도겸은 사업보다는 연기에 관심이 많았다.
민 회장은 아들이 제 뜻대로 되지 않자 벌컥 화를 낸 것이다.
결국 이리 후회할 것을, 대체 왜 그러신 건지.
“진심은 아니실 겁니다. 그저……. 도련님이 회사를 이어받길 누구보다도 원하셨으니까요.”
“…….”
삼촌과도 같은 김 실장이 계속 달래자 도겸의 마음이 흔들렸다.
도겸도 제 아버지가 얼마나 회사를 아끼는지 알고 있었다.
또 얼마나 자신이 회사를 이어받기를 원했는지도.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김 실장이 말했다.
“회장님께 사과할 기회도 주지 않으실 겁니까?”
김 실장의 말은 도겸을 크게 흔들어놨다.
하지만 그 말이 그간의 설움과 불만을 해소해주지는 않았다.
거기다 김 실장의 말이 꼭 사실이라는 보장도 없었다.
회장의 진심인지, 아니면 그저 그를 달래기 위한 말인지, 도겸은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의 아버지는 배우 일을 계속해도 좋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도겸의 표정이 다시 차가워졌다.
“적어도 오늘은 아니에요. 그만 돌아가세요.”
김 실장은 도겸의 단호한 표정에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알겠습니다. 그간 스케줄 중 저랑 마주쳐 불편하셨을 텐데 죄송합니다. 회장님의 말을 전했으니 앞으로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김 실장이 허리를 굽혀 사과했다.
그가 원해서 한 일도 아닌데 뭘 그리 미안해하는지, 도겸은 괜한 죄책감이 들었다.
도겸은 괜찮다고 말하려다 관두고 돌아섰다.
마음만 더 약해질 것 같았다.
그렇게 억지로 용서하고 싶지는 않았다.
먼저 돌아선 도겸을 바라보며 김 실장이 말했다.
“연락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가족에 대한 대화 후, 도겸은 우울한 기색을 떨친 것처럼 행동했다.
세영에게 장난도 스스럼없이 쳤으며, 세영의 반응을 보며 즐겁게 웃었다.
받아온 대본으로 자신이 직접 연기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세영은 가족에 대한 대화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어쩐지 웃고 있는 도겸이 진심으로 웃는 것 같지 않았다.
세영은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말했다.
“도겸아, 아까 너희 아버지께 연락이 왔다는 얘기……. 한 번 만나서 대화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도겸에게서 간략한 이야길 들었다.
세영은 어쩌면 그의 아버지가 사과하고 싶어 하는 것일 수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예상외로, 도겸은 크게 불편해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렇게 생각해?”
“어쩌면 아버지와 화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꼭 화해하는 게 아니더라도 서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터놓고 대화하는 게 좋지 않을까.”
“…….”
“그냥 내 개인적인 생각이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고. 미안,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은 것 같은데 내가 괜한 오지랖을 부린 것 같아.”
도겸이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아니야. 내가 침울해하니까 걱정해준 거잖아. 고마워.”
“아냐. 뭘. 나야말로 들어줘서 고마워.”
감사 인사가 오가고, 두 사람 사이엔 잠시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나! 그 드라마 봤어. 네가 주연으로 나온 드라마.”
세영이 불쑥 말했다.
도겸의 눈이 크게 떠졌다.
말해놓고 세영은 아차 싶었다.
“진짜로? 언제?”
“네가 가고 나서. ……그냥 어쩌다 보니, 봤어.”
“흐음.”
절대 안 볼 것처럼 굴어놓고 그와 떨어져 있던 사이에 봤다니.
도겸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참았다.
세영이 부끄러워하는 것이 훤히 보였다.
대신 세영의 손을 부드럽게 쥐고 물었다.
“나 어땠어? 괜찮았어?”
망설이다 세영이 말했다.
“……응. 멋지더라.”
화면 속, 연기하는 도겸이 얼마나 멋있었는지.
드라마를 보는 내내, 도겸만 눈에 들어왔다는 것과 다른 여자에게 사랑을 속삭일 때 질투가 났던 것도.
세영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비록 횡설수설에다가, 띄엄띄엄 더듬으며 말하긴 했지만 말이다.
도겸은 그런 세영의 이야길 끊지 않고 들었다.
세영의 말이 끝났을 때 도겸은 잡고 있던 손을 당겨 세영을 끌어안았다.
허리에 팔을 감고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말해준 세영이 사랑스러워 참을 수 없었다.
가벼울 것 같던 입맞춤은 길게 이어졌다.
“으응…….”
세영은 가빠오는 숨에 달뜬 신음을 내뱉었다.
저돌적인 도겸으로 인해 어느새 세영은 소파에 등을 대고 기대있었다.
도겸이 팔을 풀지 않아 두 사람은 여전히 몸이 밀착되어있었다.
세영은 여느 때보다도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이대로 오늘 진도를 더 나가게 될 것만 같았다.
아니, 나가고 싶다.
도겸이라면 그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이모가 걱정할 그럴 일은 없다고 호언장담했던 과거의 자신이 떠올랐다.
‘이모 미안……. 이모는…… 날 걱정할 게 아니라 도겸일 걱정해야 했어.’
입 안 속을 헤집는 도겸의 혀에 화답하면서, 세영은 도겸의 목에 두르고 있던 팔을 당겼다.
자연스럽게 몸이 더 밀착되면서, 도겸의 가슴팍에 세영의 가슴이 눌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조금은 답답한 그 감각마저 세영에겐 희열로 다가왔다.
동시에, 도겸의 몸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도겸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입맞춤은 갑작스럽게 끊겼다.
세영은 당황한 채로 소파에 앉아있었다.
도겸은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로 말했다.
“어, 어. 미안. 나 가봐야겠어. 급한 일이 있었는데 잊고 있었네.”
“갑자기? 이 시간에?”
“응. 일. 있었는데 내가 깜박했다.”
정말로? 세영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고개를 돌리고 있어 도겸의 표정을 알 수가 없었다.
어딘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도겸이 서둘러 문 쪽으로 향했다.
도겸이 이대로 떠날 것 같았다.
세영도 도겸을 따라 소파에서 일어났다.
“잠깐만!”
세영이 도겸의 팔목을 잡아당겼다.
반동으로 시뻘게진 도겸의 얼굴이 드러났다.
일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지만, 도겸이 얼른 눈을 돌렸다.
“미안. 진짜 미안. 붙잡지 마, 이러면 나 못 참아. 이건 고문이잖아. 아니, 탓하려는 게 아니라. 미안. 나 갈게.”
뭐라 횡설수설한 도겸은 세영의 손을 조심스럽게 놓았다.
그리건 그대로 문밖으로 달려나갔다.
방 안에 홀로 남은 세영은, 허망하게 문만 바라보았다.
* * *
어느새 아침이었다.
잠에서 깬 세영은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모두 다 뒤숭숭한 꿈 때문이었다.
꿈에서 도겸은 세영만 봤다 하면 도망 다녔다.
세영은 그를 붙잡고자 필사적으로 쫓아갔지만 계속해서 놓쳤다.
재빠른 게 아주 토끼 같아 한 끗 차이로 잡을 수가 없었다.
이게 다 어젯밤 일 때문이야.
세영은 속으로 성질을 냈다.
그녀가 싫어서 도망간 게 아니란 걸 세영도 잘 알았다.
도겸이 세영을 소중히 하려고 한 걸 이해했다.
머리론 이해했는데, 감정이 마음대로 조절이 안 됐다.
꿈은 말 그대로 꿈일 뿐이지만, 찝찝했다.
오늘 밤이면 또 볼 텐데, 왜 이렇게 기분이 이상한지.
♩♪♫
전화벨이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도겸인가 싶어 세영은 서둘러 핸드폰을 확인했지만, 발신자는 재찬이었다.
내키지 않았다.
못 본 척 무시하고 싶었다.
하지만 연숙과의 전화가 생각나, 잠긴 목을 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자고 계셨습니까?”
“아뇨. 그냥 일어난 지 얼마 안 돼서요.”
아, 그렇군요. 재찬이 중얼거렸다.
“오늘은 일정이 어떻게 됩니까? 바쁘지 않다면 점심 식사 같이하죠.”
“아, 그거 말인데요.”
세영이 황급히 재찬의 말을 막았다.
“이모한테 들었어요. 괜한 부탁을 하셨더라고요. 그, 불편하실 텐데 굳이 저 챙겨주려고 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 그래요? 알겠습니다.
이게 세영이 예상한 대답이었다.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은데요.”
매끄러운 목소리로 재찬이 이어 말했다.
“선생님께서 부탁하셔서 연락드린 거 아닙니다.”
“……네?”
세영은 자신의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제가 분명 다음번에 식사 한 번 하자고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요.”
분명 그랬다.
연숙과 셋이서 식사를 하고 난 뒤에.
“그거, 이모가 부탁해서 제안하신 게 아니었나요?”
“아닙니다만.”
“……아니었군요.”
아니었다니!
세영은 당연히 그 또한 연숙의 부탁으로 인한 거라고 생각했다.
부탁 때문이 아니라, 재찬이 밥 먹자고 제안한 거였다니.
거절하기 더욱더 어려워졌다.
세영이 말이 없자 재찬이 입을 열었다.
“그렇게 싫으십니까? 저와 식사하는 게.”
“아, 아니에요. 그건 아니고요! 저 별로 안 좋아하시는 것 같던데 왜 밥 먹자고 하시나 싶어서요.”
세영은 그냥 솔직하게 물었다.
정말로 의문이었다.
자신에게 전혀 호의적이지 않던 상대가 갑자기 식사 제안을 하다니 말이다.
무슨 꿍꿍이가 있나 싶었다.
재찬은 명쾌하게 대답했다.
“그냥 인간적인 호기심입니다.”
“호기심이요?”
“네. 호기심. 류세영 씨. 제가 처음 생각했던 이미지랑 다른 것 같아서요.”
“아…….”
세영이 말을 흐렸다.
잘은 몰라도 그가 처음 생각했던 이미지가 좋은 건 아닌 것 같았다.
아니, 거의 확신할 수 있었다.
세영이 재찬이 맘에 안 들었던 것처럼 재찬도 비슷했을 것이다.
그 첫인상이 어쩌다 바뀌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러니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네?”
딴 생각 중이던 세영은 듣지 못했다.
“아닙니다. 그럼 언제가 괜찮으신지요.”
“어……, 잠시만요.”
엉겁결에 밥을 먹게 생겼다.
세영은 속으로 생각해보았지만, 마땅히 거절할 핑계도 없었다.
재찬이 나쁜 생각을 하거나 그녀에게 이성적 호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딱히 약속이 바쁘게 잡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때 재찬이 말했다.
“전 오늘 당장도 괜찮습니다.”
세영은 솔깃했다.
이대로 온종일 혼자 있으면 도겸에 대한 생각만 하며 꿍해 있을 것 같았는데 잘됐다.
“저도 괜찮아요.”
“그럼……. 양식 좋아하시나요?”
“네. 저 가리는 거 없이 잘 먹어요.”
재찬에 질문에 세영이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어쩐지 작게 웃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다행이네요. 그럼 제가 데리러 가겠습니다.”
“어, 아니에요. 번거로우실 텐데 약속 장소에서 만나죠.”
“괜찮습니다. 대중교통으로 가기엔 불편한 곳이라 차로 가는 게 빨라요.”
뭐, 재찬만 불편하지 않다면야.
세영은 차를 얻어 타는 것이 더 편했다.
“그렇다면야……. 감사합니다.”
선선히 감사하다고 인사하는 세영에 재찬은 핸드폰 너머로 미소 지었다.
“12시에 데리러 가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세영은 나갈 준비를 하면서도 도겸에 대해 생각했다.
세영의 마음을 온통 헤집어 놓은 도겸이 얄미워 답장도 안 하고 있었지만, 재찬과 점심을 먹게 됐다고 문자도 제대로 남겨뒀다.
시간은 흘러 12시가 되었다.
세영은 호텔 로비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