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서거 후부터 적측에서는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어서 모두가 의아해 하면서도 긴장을 멈추지 않았다.
세이나가 깊은 잠이 들고 벌써 일주일이 흘렀다.
전쟁보다도 거의 매일 일어나는 재해에 자신들이 있는 곳도 시시때때로 위험해지고 있었다.
바이안은 매일 밤 세이나가 자는 모습을 지켜보는 중에 그녀의 몸 주위에 피어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기운들에 손도 잡지 못하고 있었다.
하루 빨리 눈을 떴으면 하는 바람을 안고 오늘 밤도 그녀의 근처에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그러다 엄청난 지진이 대지를 흔들기 시작하면서 튼튼하게 세워 올린 막사가 무너질 정도로 폭풍우에 가해지는 압박과 엄청난 소음에 서둘러 세이나의 위를 상체로 덮어 그녀를 보호했다.
한참의 시간이 흘러도 멈추지 않는 재해 속에 막사 밖에는 기사들의 고함 소리가 폭풍우 소리에 섞여 희미하게 들려왔다.
이제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이 온 몸으로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정말 다행인 것이, 그동안 세이나의 몸에서 격렬하게 움직이던 기운들이 잠잠해졌다는 것이기에 오랜만에 세이나의 온기를 느꼈다.
불편하게 의자에서 쪽잠을 잤던 바이안은 그녀의 옆에 몸을 뉘여 품에 안고 자는 인형처럼 세이나를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꺄르륵~~’
‘꺄하하~’
‘남편아~’
몽글몽글 폭신한 구름 위를 걷다 웃음소리에 고개를 드니, 흐릿하지만 그녀임이 분명한 목소리가 자신을 반가이 부른다.
어서 이리 오라는 손짓에 걸음을 빨리하여 달려가다 무언가의 기운이 자신을 한차례 감싸고 떨어져 나갔다.
저절로 발이 멈추고 그 기운에 취해 눈을 감고 다시 느끼려 하니, 자신의 생각을 들었는지 기운이 한 번 더 자신을 감싸 안았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자신에게 무어라 상냥하게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눈을 뜨니 아침이 되어 밝은 태양빛이 막사 안으로 세어 들어왔다.
신비롭고 신기한 꿈속을 노닐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바이안은 코 자고 있는 세이나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투박한 손으로 쓸어 정리해주고 자리에 일어나 막사를 벗어났다.
“이제 마지막이 보이는 구나.”
제로드는 비록 현자의 돌을 잃어 힘이 줄었지만, 오랜 세월을 돌의 영향을 받아왔던 탓인지 세상의 마지막이 느껴졌다.
멸망을 목전에 둔 이들이라고 하기에는 그의 말에도 모두는 덤덤했다.
“그동안 재미있었느냐?”
거의 모든 간부들이 죽고 제로드의 곁에 제임스와 페르디난드 단 둘뿐이지만, 둘은 그의 질문에 자신들 나름대로 대답했다.
“적당히 놀았습니다.”
“주인님의 곁에 함께 했다는 것만으로도 소인은 이미 만족해하고 있습니다.”
둘의 만족스럽다는 말을 귀담아 들은 제로드는 가만히 눈을 감고 턱을 괴었다.
“그러하더냐.”
목적한 바를 곧 이루게 되지만, 이미 텅비어 공허한 제로드가 마지막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자 이상하게도 하나의 소녀가 아른거렸다.
비뚜룸하게 웃던 제로드의 입가가 피식하며 순수하게 균형을 그렸다.
둘은 그의 생소한 미소에 조금 놀랐지만, 못 본 것으로 정리했다.
“일주일 남았구나. 마지막 날을 축하하는 의미로 그날 놀아볼까 한다.”
느리게 떠진 그의 눈동자는 멀리 있는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는 오직, 그만이 알기에 둘은 그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세이나가 말을 해주지 않아도 상석에 앉아 있는 바이안을 중심으로 모여 있는 모두에게도 마지막이 곧 도래함을 느꼈다.
케리프가 적들이 조용한 이유로 세상의 마지막 날을 강조했고, 그 의견에 이견은 없었다.
아직 잠에서 깨지 않고 있는 세이나의 막사 안에서 주변을 정리하고 나온 히데아는 자신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는 론에 의아해했다.
론은 그런 히데아의 반응에 더는 못 참겠다 싶었던 것인지, 그녀의 손을 잡고 그대로 끌고 사람들이 뜸한 곳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저.. 카시어스님.”
“아무 말 하지 말고 따라와라 좀.”
쩔쩔 매며 당황해하는 히데아를 짜증 섞인 음성으로 말을 내 뱉자 조용히 따라왔다.
어느 한 곳으로 들어간 론은 어찌할 줄 모르는 히데아에 뒷머리를 벅벅 헤집어댔다.
“히데아.”
“네. 네? 네.”
아래 입술을 구겨 물고 입을 오므린 채로 우물쭈물 하고 있자, 그녀의 머리 위에 론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싫다면 뒤로 물러나. 그렇지 않으면 허락한 것으로 알거야.”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의아해져 숙인 얼굴을 들자, 론의 진지한 얼굴이 갈수록 더 가깝게 들이밀어졌다.
세상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해서 일까, 열심히 대놓고 자신을 들어내고 있음에도 반응이 저조한 히데아에 론은 밀어붙이기 전법을 시전 하기로 결심했다.
히데아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려고 하는지 알지도 못하고, 그저 지금 상황에 놀라 멍하게 있으니 론이 가만히 히데아의 턱을 손으로 올려 잡고, 그대로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에 조금 거친 자신의 입술을 붙였다.
머리카락으로 덮여진 커튼 사이로 큰 눈이 꿈벅꿈벅 감았다 뜨면서 날카롭게 자신의 눈동자를 직시하는 론의 눈과 마주쳤고, 입술이 떨어지자 온 몸이 빨간색으로 물들었다.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알고 있지? 게다가 너도 나 좋아하고.”
론은 희석하지도 않고 직구를 던졌다.
신분을 차이를 따지면서 속으로만 좋아하려 했던 자신의 마음을 들켜버린 히데아는 눈이 뱅글뱅글 돌면서 열이 올라 쓰러질 것처럼 현기증이 일었다.
론은 그런 히데아의 팔을 살짝 잡아 당겨 자신의 품에 넘어지게 하여 끌어안았다.
“너, 분명 안 피했다. 오늘부터 사귀는 거야.”
“카 카카카..”
더듬다 못해, 정확한 발음을 하지 못하는 히데아에 론은 큭큭큭 웃었다.
“히데아.”
“네? 네. 네네.”
귀엽긴 한데, 말더듬이가 된 건가 싶어, 잠시 히데아를 말끄럼하게 내려다보다가 히데아의 얼굴을 다시 가슴에 묻었다.
“전부 끝나고, 평화로워진 세상에서 살아남으면, 결혼하자. 거부는 거부할거니까, 대답 안 해도 돼. 아니, 하지마라. 그냥 내 마음대로 하련다.”
뻣뻣하게 빠짝 서서 양 손만 파닥이던 히데아의 두 손이 소심하게 론의 등으로 이동했고, 옷자락을 엄지와 검지로 꼬옥 잡는 그녀의 귀여운 허락에 기분이 달떴다.
꿈에서 느꼈었던 따뜻한 속삭임에 바이안은 하던 일을 멈추고 서둘러 세이나의 막사로 달려 들어가니, 천천히 눈을 뜨고 방긋 미소지어주는 세이나에 마주 웃었다.
이제 모든 것을 마무리하고 새롭게 시작할 때가 되었다.
바이안은 황제가 머물었던, 지금은 황후만이 쓰고 있는 막사 안에서 검과 망토를 들고 서 있는 자신의 어머니께 고개를 숙여보였다.
“이제 이것은 그대의 것입니다.”
황후는 의젓하게 받아들이는 아들에게 다가와 망토를 펼쳐 손수 달아주었다.
황제에게만 사용할 수 있는 금색 수실로 황가의 문장이 수 놓여진 붉은 망토를 두른 바이안은 그가 쓰던 검을 마지막으로 받아 허리에 찼다.
“내 아들.”
황후는 가만히 바이안의 얼굴을 쓰다듬고 아직도 자신을 걱정해하는 그에게 괜찮다 다독여주었다.
“이제 그대가 모든 이들의 아버지입니다. 성군이 되세요. 높이 비상하여 밝게 비추는 태양이 되세요. 오늘부로 그대가 황제폐하이십니다.”
황후, 이제는 황태후가 되어 사랑했던 자신의 남편의 뒤를 이은 아들의 등을 밀어주었고, 바이안은 그런 어머니에게 허리를 숙여 황제가 되면 하지 못할 마지막 예를 보이고 밖으로 나갔다.
막사 앞에 서 있는 세이나와 짧은 입맞춤을 한 뒤에 둘은 서로 나란히 섰다.
공백의 기사단들은 바이안이 걸어갈 때마다 툭툭 그의 어깨를 한 번씩 쳤고, 내려간 손바닥을 짧게 마주 쳐가기도 했다.
바이안과 세이나의 뒤로 두 궁의 호위 기사들이 한 명씩 짝을 이루듯이 도열하며 따라갔다.
모든 병력들이 도열해 있는 곳, 단상에 다다르자 모두 목청을 높여 함성을 내질렀다.
하늘에서 뜨겁게 내리쬐는 작약의 태양의 열기와 그들의 열기가 섞이며, 새로운 황제의 탄생과 이 날에 모든 미래를 걸은 이들의 소리는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손을 들어 올려 그들의 함성을 죽인 바이안의 시선이 그들을 주욱 훑고 지나갔다.
“모든 것을 끝낼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세상이 시작 될 것임을, 나 엘라이어 진 바이안. 황제의 이름으로 모두에게 알리는 바이다.”
황제의 연설이 짧아도 너무 짧아서 공백의 기사단들은 저 성격은 어디 안 간다며 속으로 피식 웃었고, 그의 연설이 끝나자마자 하늘이 요동칠 정도의 함성이 다시 한 번 크게 울려 퍼졌다.
그동안 방어전을 펼치며 막았던 전력을 크게 수정했다.
지켜야할 많은 목숨들을 위해 수비를 했다면, 이제는 세이나 한 사람을 지키기 위한 수비 진영을 짰다.
적들도 혹시라도 멸망을 막을 수도 있을지 모를 세이나를 집중적으로 노릴 것이 당연했다.
게다가 세이나가 힘을 사용하기 시작하면 아무리 그녀라고 하더라도 날카로운 검 날들이나 눈먼 화살에 무방비하게 당할 수밖에 없다.
세이나는 바이안의 손을 잡고 자신이 시작할 장소에 다다랐다.
도착하고 나서도 바이안은 세이나의 마주 잡은 손을 차마 놓지 못했다.
이 손을 놓았을 때, 이 것이 제발 마지막이 아니기를 소원하면서도 다시는 잡지 못할까 덜컥 겁이 나 그를 괴롭혔다.
“남편아.”
오빠라는 호칭보다 이제는 남편아라는 호칭으로 더 많이 불러주는 그녀의 목소리에 담긴 뜻을 모를 바이안이 아니었기에 어렵게 그녀의 손을 놓았다.
“이 후에 다가올 미래가 그 어떤 것이라도, 혹여 너와 함께 하는 순간이 지금이 마지막이라 할지라도...”
맹세했었던 말을 되짚어 꺼내던 바이안의 말끝이 흐려졌다.
그런 바이안을 가만히 기다려 주고 있는 세이나의 상냥한 미소에 바이안은 다시금 자신을 고쳐 잡았다.
“지킬게. 꼭 지켜 보일게.”
“응.”
“너와 내가 원하는 모든 것들을 위해서 이길게. 그러니까 아무 걱정 하지마.”
전방에 적들의 움직임을 포착한 상태이기에 서로 껴안고 느끼는 온기는 짧았다.
“다녀올게.”
검을 빼들고 모두를 호령하며 멀어지는 바이안의 등을 바라보며 세이나는 가만히 자신의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나도, 다녀올게 오빠. 아빠야가 힘내고 있으니까, 우리도 힘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