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은동은 이전부터 사람이 많은 동네였다. ‘나름’ 고가도로와 ‘나름’ 영화관과 ‘나름’ 백화점 등이 있는, 코딱지만한 이 도시에선 ‘나름’ 부유층에 해당하는 곳이다. 그 날 이후에도 여전히 사람은 많았다. 죄다 범죄자들이긴 해도.
“개판이구만.”
건호가 눈앞에 사람들을 향해 무심코 내뱉었다. 그러나 거리 군데군데를 차지한 채 쓰러져 있는 이들 중 대꾸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가만히 시체들을 살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모두 머리에 하나같이 구멍이 나있었다. 사냥은 아니다. 그보다는 배려, 아니, 뒷정리에 가깝다. 한바탕 전쟁이 끝난 뒤 죽거나 곧 죽을 가망 없는 놈들 머리통을 날려주는 거다. 그렇게 안 하면 곧 다시 일어날 테니.
전쟁의 현장이라는 건 시체들이 모두 범죄자라는 데서 알 수 있었다. 전날처럼 두 부류였는데, 검은 옷을 입은 쪽과 스카프를 머리에 두른 쪽이었다. 그는 검은 온 쪽이 수가 더 적다는 걸 확인하고선 이맛살을 찌푸렸다. 같은 녀석들을 연달아 보는 것도 찝찝한데 여기 전투에선 이기기까지 했다. 대체 세력이 얼마나 큰 거지?
고민해봤자 답은 나오지 않는다. 시체들이 대답해 줄 리도 없고. 애초에 그가 알려는 질문은 그게 아니다. 그는 다시 짐을 정리해 길을 떠났다. 짐이라고 해도 도끼랑 권총이 다다. 당일치기 정찰에 그 정도면 충분했다. 사냥 나오러 온 것도 아니기에 저격총은 승재에게 맡겨뒀다.
거리는 어느 쪽으로 걸어도 시체가 즐비했다. 다행히 걸어 다니는 시체는 없었지만, 그는 그게 대체 왜 다행인 건지 궁금해 하며 쓴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어제랑 같다는 게 다행이지. 그는 아내에게 그렇게 말하곤 했었다. 아내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미친 소릴 들었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내에겐 모든 게 걱정거리였다. 병에 걸릴까, 사고가 날까, 혹시라도 실수로 가스 밸브를 안 내렸을까, 깜빡하는 걸 깜빡했을까 등등.
그와 아들은 그런 아내를 보며 놀이를 하곤 했다. 아, 오늘도 회사 가는 걸 깜빡하면 어쩌니, 깜빡하면 안 되는데……. 물론 걸리면(걸린 적은 없었다, 정말로 다행히) 뒷감당할 자신이 없었기에 되도록 조심스럽게 했다. 첩보놀이 같다며 아들은 특히 더 마음에 들어 했다. 같이 007 볼 땐 재미없다고 하고선.
매일이 그랬는데. 따분함이 연속해서 흘러가는 나날들이었다. 피도 시체도 없던 날들. 모든 게 알아서 잘 굴러갔었다. 다행히.
그래, 당신 말이 맞아 여보. 어제랑 같다는 게 다행이라는 건 개소리야. 눈앞에 누운 시체를 발로 건드리며 그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시체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한동안 시체가 나오지 않다가 백화점 근처에서 다시 시체가 나왔다. 시체는 백화점 입구 앞에 거의 10평쯤 되는 마당에 있었다.
겨우 한 구뿐이었지만, 이전에 보지 못한 특이한 형태였다. 당연히 걸어 다니진 않았고(걸어 다닌다면 오히려 특이하진 않다) 어딘가에 매달려 있는 녀석이었다.
미친놈들. 형태를 제대로 파악하게 되자 곧장 든 생각이었다.
백화점 앞에는 이전부터 조각상이 하나 있었다. 기본적으로 십자가 형상에 조각가 특유의 이해하지 못할 기하학적 도형들을 달아 논 것이다. 시체는 거기 박혀 있었다. 상의가 벗겨진 채 십자가 형상에 팔 다리가 붙어 있었는데, 손발에는 못인지 나산지 알 수 없는 것이 박혀있었다.
그러고 보니 녀석들 중에 예수쟁이 무리가 있었던 것 같긴 하다. 한 손에는 성경책을 들고 한 손에는 창칼을 들고 엿 같은 찬송가를 불러대는 놈들이다. 예나 지금이나 민폐로군. 이놈은 뭐 때문에 이 꼴로 죽인 거지? 신을 위한 공물인가, 아니면 신을 믿지 않은 데 대한 화풀인가? 아무래도 후자겠지, 미친놈들이니.
그는 가까이 다가가 시체를 살폈다. 남자는 꽤 젊어보였다. 많아야 30대 초반일까. 죽은 지 얼마 안 된 건지 부패상태도 양호했다. 덕분에 얼굴도 말끔해 보였다. 머리랑 수염만 조금 가다듬고, 살아있기만 한다면 미남 소리가 아깝지 않다.
시체 주변을 배회하던 똥파리가 그의 얼굴에 달라붙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얼굴을 털어내며 다시 시체에 주목했다.
맨발이 된 시체 발치에 뭔가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들여다보니 옷가지들이었다. 노란색 파카, 해진 티셔츠, 신발. 아마 이 남자가 입고 있던 옷일 것이다. 가지런하지 못하고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게 꼭 역겨운 물건을 서둘러 치워 놓은 것 같았다. 마치 죽은 벌레가 손에 닿는 게 무섭다는 것처럼.
가장 아래에는 가방과 총이 있었다. 총은 조준경이 붙어 있었지만 저격총은 아니었다. 군인들이 사용하는 자동소총에 조준경만 붙인 것이다. 배낭에는 총알이 든 탄창 3개와 다른 옷가지들이 아무렇게나 섞여 있었다. 그가 막 배낭 안에 손을 넣으려던 참이었다.
“멈춰.”
앙칼진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여잔지 남잔지 구분하기 힘든 허스키한 목소리는 단호하게 명령했다. 사람을 많이 다뤄본 듯하다.
“누구야, 너?”
“글쎄, 뭐라고 해야 만족할라나? 일단 시체는 아니다만.”
건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뒤돌아보았다.
세 명이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중년 여자, 젊은 남자, 그리고 노인으로 구성된 무리였다. 그들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세 사람 다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추리닝, 다 헤진 정장, 남방 등 스타일은 제각각이었지만 모두 검은 옷이었다.
그들의 손에는 빗자루와 유리조각으로 만든 조잡한 창이 들려있었다. 잘 나가는 조직치곤 조잡한 무장이다.
“어디 소속이지? 처음 보는 복장인데?”
리더로 보이는 여자가 당황한 기색 하나 없이 묻는다.
“흰 옷 입고 다니는 조직은 없나 보지?”
그가 말하며 한 걸음 움직였다.
“움직이지 마.”
남자가 곧장 창을 들이댔다. 그의 팔뚝에 핏줄이 뛰는 것이 보였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바로 죽이겠어.”
설득력 없는 말이었다. 그에겐 총이 있는 반면 그들에게는 조잡한 창이 다였다. 게다가 셋 중 두 명은 여자에 노인이다. 저들이 마음먹는다고 뭘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대답해, 알아들어?”
“알겠어.”
그가 양손을 들어올렸다.
“알겠다고. 창 좀 내려놨으면 좋겠는데.”
“대답 먼저 해. 그래서 어디 소속이지?”
여자가 거칠게 말했다.
“무소속이야. 여기 들어온 지 얼마 안 됐거든.”
“거짓말 하지 마.”
“왜 거짓말이라고 그렇게 단정 짓지?”
“들어온 지 얼마 안 됐다는 놈이 ‘중심가’를 어슬렁거린다는 게 말이 안 되니까.”
이런, 그게 여기였나.
그때서야 노인의 뒤편으로 산에 박힌 크레이터가 보였다. 깊게 패인 크레이터는 여느 때보다 크게 보였다. 가까이서보니 흉터 자국 같아 더 징그러웠다.
운석이 박힌 곳. 모든 것의 시작, 중심가.
“여기서 나오는 ‘빨간 눈’ 얘기는 아무리 처음 온 녀석들이라도 듣게 되기 마련이야. 어떤 경로로든지 말이야.”
여자의 눈이 날카롭게 그를 쫓는다.
“그런데 그런 녀석이 이런 곳을 어슬렁거린다고? 웃기지마. ‘교회’놈들처럼 맛이 간 놈들이 아니고서야 여길 돌아다니지 않아.”
정확하게 맞는 말이다. 게다가 이곳이 중심가라면 총은 사용하지도 못한다. 총을 쓰지 못하는 사냥꾼이라니.
“그럼 그쪽도 맛이 간 분들인가?”
하지만 그게 딱히 불리하다는 뜻도 아니다. 그는 웃으며 눈썹을 올려보였다.
“이런 씨-”
젊은 남자는 낮게 욕을 내뱉으며 그에게 달려들려 했다. 여자가 막지 않았다면 정말 덤볐을지도 모른다.
“농담은 그쯤하고 이만 대답해. 누구야, 너?”
“말했잖아, 무소속이라고.”
그는 태연하게 말했다.
“지금 당신들 하는 얘기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어. 빨간 눈? 교회는 또 뭐지?”
“끝까지 거짓말할 생각인가?”
“글쎄, 거짓말한적 없는데? 여기 들어와서 제대로 된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어서 말이야. 죄다 시체였거든.”
그가 입 꼬리를 올렸다.
“걷든 누워있든.”
“그 말을 지금 믿으라고?”
“의외로 진짜인거 아니야?”
젊은 남자가 불쑥 끼어든다.
“지금 서로 못 죽여서 난리잖아, 사냥꾼 잡겠다고. 딱히 이 아저씨한테 뭐 얘기해 줬을 놈이 없던 걸지도 모르지.”
“사냥꾼?”
잘못 들은 건가? 자신도 모르게 되물었다.
“그래, 사냥꾼. 그것도 못 들었냐? 며칠 전에 자기 스스로-”
“닥쳐!”
여자가 화를 낸다. 남자가 움찔한다.
“누군지도 모를 놈한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왜 그래? 사냥꾼이라니, 뭔 얘긴지 궁금한데?”
“닥치라고!”
이번엔 여자의 창이 그의 목으로 다가온다.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유리로 만든 창날이 빛을 발한다.
“좋아, 알겠다고.”
건호가 양손을 흔들어보였다.
“그럼 이제 어쩔 거지?”
“그건 당신 스스로에게 할 질문이지. 어쩔 거지? 끝까지 당신이 누군지 얘기 안 할 거야?”
“누군지 이미 얘기했는데? 저 친구도 말했잖아?”
건호가 젊은 남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뭔지는 몰라도 서로 죽이고 난리 중이라, 내가 아무것도 못 들었을 수도 있다며?”
“그럴 수도 있지. 근데 당신 태도가 아니야.”
여자가 더욱 창을 힘주어 잡았다.
“처음 온 놈치곤 너무 여유롭거든.”
“태도로 파악할 수 있는 건 그 사람의 인성이지. 그 사람이 하는 말의 진위까지 파악할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여자는 아무 말 없이 계속해서 노려보았다. 매서운 눈이다. 사람이든 시체든 숱하게 죽여 본 눈. 죽인다면 이 여자를 먼저 죽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까지 이럴 거야?”
젊은 남자가 지루하다는 듯 끼어들었다.
“교회 놈들이 없는 거 확인했으니까 이제 가자고. 계속 이러고 있으면 빨간 눈이 올 거야.”
그 말에 여자는 마침내 혀를 차며 창을 치웠다.
“따라와.”
“너희 쪽에 들어오게 해주는 건가?”
“착각하지 마. 널 어떻게 할지는 사장님이 정할 거니까.”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그 전에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
“아니, 그냥 닥치고-”
“아까 했던 사냥꾼 얘기, 더 듣고 싶은데?”
건호는 여자를 무시하며, 젊은 남자 쪽을 살짝 흘겼다. 예상대로 남자가 입을 열었다. 어디가 기쁜 건지 남자는 잔뜩 미소를 띄고 있었다.
입이 방정인 녀석이군.
“며칠 전에 자기가 사냥꾼이라고 하는 놈이 사고를 쳤어. 연구원 다리 하나를 권총으로 날려버렸거든. 그거 때문에 솟대 놈들이 이번 일은 넘어가기 힘들다고 그 놈을 잡아다 일주일 내에 바치지 않으면 이 근방을 싹 날려버리겠다고 난리야.”
이상한 기분이다. 남이 자신의 이야기를 면전에 대놓고 한다는 것은, 언제나 그렇다.
“근데 이상한데. 연구원 한 명이 좀 다쳤다고 솟대 놈들이 직접 나섰다고?”
“글쎄, 바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몰라도 뭐 언론 같은데 나왔나보지 뭐. 안 그래도 지금 우리들 때문에 말이 많다고 들었으니까 말이야.”
“이제 그만 움직이지?”
여자가 남자를 쏘아보며 말했다.
“한 가지만 더. 당신들은 교회 사람들이 아니지?”
“당연하지, 우리가 그런 미친놈들처럼 보여?”
무슨 자신감이냐? 그렇게 묻고 싶은 걸 애써 참으며, 그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럼 왜 여기 있는 거지?”
“그걸 왜 대답해 줘야 하지?”
여자가 말했다.
“뭐 어때?”
젊은 남자가 다시 끼어든다.
“어차피 이 아저씨 혼자서 뭘 할 리도 없잖아.”
여자가 말없이 노려보지만 남자는 상관하지 않고 계속해서 이야기 했다.
문득 어떻게 이런 녀석이 아직까지 살아 있나 궁금해졌다. 하지만 쿤 의문거리는 아니었다. 이런 녀석이니까 곧 있으면 죽는 거다.
“여기서 교회 놈들이 사냥꾼을 찾아서 죽였다고 하더라고. 그 시체를 찾으러 온 거야.”
“그 사냥꾼이 이 녀석이라는 건가?”
건호가 십자가 쪽으로 턱짓해보였다.
“눈치가 빠르군. 맞아, 그 녀석이야.”
남자가 창대를 들어 어깨에 올렸다.
“그래서 이제부터 우리가 그 시체를 가져갈 거지. 그 녀석을 잡은 쪽은 앞으로 솟대놈들이 안 걸드린다고 했으니까. 당신 아직 무소속이랬지? 좀 도와-”
“뭔 소리를-”
여자가 나서지만 금세 남자가 막아선다.
“괜찮잖아. 어차피 일꾼 하나 있으면 좋지 뭐. 어때, 아저씨? 만약 도와주면 사장님이 받아-”
“이상한데.”
건호가 중얼거리는 척했다.
“뭐가?”
“사냥꾼을 찾는 놈한테는 분명 그 뭐랬더라.”
“앞으로 안 건드린다고.”
“그래, 맞아. 근데 그 정도 되는 시체를 이렇게 방치해 둬?”
“아, 그건 교회 놈들 사상 때문이야.”
“사상?”
“모든 죄인의 물건에는 죄가 담긴다나. 죄인이 죽어서도 그렇대. 만약 그런 물건을 건들면 그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로 죄가 스며들고. 그래서 지금 세상이 이 꼴이 된 거라고 하더라고.”
시체들이 모두 죄인이라는 의미인가.
“그러니 그 죄가 일정기간 빠져나갈 동안 함부로 건들지 말라는 거야. 그래서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거지.”
그게 교리인 듯하다. 헛소리 한 번 끝내주는 사이비군.
“물론 평소보다 훨씬 조용하지만. 다들 어디 간 건가?”
“이제 그만 가지.”
여자가 창대를 바닥에 두들겼다. 냉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꽤 초조해보였다. 빨간 눈 때문인가.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가면서 해.”
“근데 교회 놈들은 이 녀석이 어떻게 사냥꾼이란 걸 안 거지?”
건호는 여자를 무시한 채 다시 남자를 바라보았다.
“저격총을 가지고 있어서래.”
“응?”
“사냥꾼 특징이거든. 거기 있는 남자가 마침 저격총을 가지고 있었대.”
“그게 다야?”
“그래, 아쉽게도 그게 다야. 뭐 녀석들이 확신했으니까 맞겠지.”
어이가 없군. 겨우 그것 때문에, 심지어 확실하다고도 할 수 없는 특징 때문에 사람을 죽이다니. 그는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씁쓸함이 입안으로 퍼져간다.
“왜 웃지?”
여자가 묻는다.
“이 남자는 아니야.”
“뭐?”
“이 남자는 사냥꾼이 아니라고. 이 총은…….”
그가 허리를 숙여 총을 집어들려 하자 세 명 모두 움찔하며 창을 그에게로 내밀었다. 그가 아무런 꿍꿍이가 없다는 뜻으로 총구를 잡고 들어보이자 그제야 소란이 가라앉았다.
“이 총은 저격총이 아니야. 우리나라 군바리들이 기본적으로 쓰는 총에 스코프 하나 달아놓은 거지.”
“그럼 이 남자가 군인이라는 거야?”
남자가 허탈감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그거야 나도 모르지. 다만 이 남자가 너희들이 찾고 있는 녀석이 아니란 건 확실하지.”
“그, 그 남자가 잘 못 본 걸 수도 있잖아?”
젊은 남자가 소리쳤다. 무슨 어린애가 내는 것 마냥 볼멘소리다. 자기가 찾은 게 보석이 아니라 그냥 돌멩이라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징징거리는 것만 같다.
그저 그것 뿐에 내뱉는 허탈감.
“그 남자라면 총 맞았다는 연구원 얘기?”
“그래, 교회 놈들도 그게 저격총이라고 착각했다면, 그러면 그 총 맞은 놈도 그랬을 수 있잖아? 얼떨결에 저격총이라고 생각하고서 말이야.”
“아, 어떤 심정인지 알겠는데, 아니야.”
“뭘 믿고 그렇게 확신하지?”
이번엔 여자다.
“이 남자한테는 권총이 없더라고.”
“권총도 다 쓰고 버렸을 수 있잖아?”
남자가 다시 매달린다. 끈질기군.
“물론 그럴 수도 있지. 근데 아니야.”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지? 뭘 알고 있는 거야?”
여자가 다시 창날을 갖다 댄다.
“처음 왔다는 거 역시 거짓말이었어. 당신, 정체가 뭐야?”
“아이고야, 이런, 들켰네.”
건호가 능청스럽게 웃어 보였다.
“지나가던 장의사야. 아주 평범한.”
“그것도 못 믿겠는데.”
“믿거나 말거나 그건 당신 자유지.”
“왜 거짓말한 거지?”
“거짓말 한 적 없어. 장의사니까 무소속이고, 온 지 얼마 안 된 것도 맞아. 의뢰 받고 다시 여기로 돌아온지 얼마 안 됐거든.”
“이 새끼, 지금까지 우릴 가지고 놀아?”
젊은 남자가 금세 얼굴이 벌개져서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생각된다면 미안해. 사과하지. 대신 좋은 정보 하나 줄게.”
“또 무슨 개소릴 늘여놓으려고?”
여자가 말했다.
“개소리라니, 진짜 괜찮은 정보라고. 사냥꾼의 현 위치거든.”
그 말에 여자의 손에서 힘이 조금 풀리는 것이 보였다.
침묵과 함께 바람이 불었다. 가을바람. 금방 터질 듯한 긴장보다도 더 차갑게 느껴진다. 가을바람은 언제나 그렇다.
“사기 치지 마.”
불현 듯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여자도, 남자도, 그리고 노인도 아니었다. 조각상 맞은편에 있던 식당가로부터 누군가가 걸어왔다.
“사냥꾼이 어디 있는지는 벌써 알고 있거든.”
키는 그보다 작았지만 왜소한 체격은 아니었다. 근육질로 벌어진 어깨 위에 도끼가 얹어져 있었다. 청색의 다 헤진 양털 재킷에, 한 쪽 눈에는 안대를 하고 있었다.
나머지 한 쪽 눈이 건호를 꿰뚫어보았다.
“안 그래, 형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