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롤로그 -
춥다. 춥다. 춥다. 춥다. 따뜻했다가도 얼어붙을 정도로 차가워진다. 어째서 이렇게 차가운 걸까. 온몸이 욱신거리면서 아프다. 귓가에 소란스러운 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흐릿한 시야 한가득 담기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코끝으로 비린 쇠 냄새가 들어왔다. 아아. 맞다. 그랬다. 차에 치였었지, 참.
퇴근길. 하루 일을 마치고 피곤에 쌓인 몸을 이끌고 집으로 향하던 길. 언제나의 신호등에서 갑자기 나타난 차에 들이박았다. 빨간 불이었다. 얌전히 신호를 기다리는 와중에 갑자기 차가 돌진해 왔고, 그대로 들이박아 수십 미터 밀렸다가, 다시 처박혀서 밟혔다.
이상하게도 내 몸의 상태가 아주 잘 느껴진다. 잔잔히 부서져있다. 다리도, 팔도. 몇 번이가 박히고, 밀리고, 밟혀서 그런 걸까. 집요하리만큼 나만을 노렸다. 뺑소니? 우발적인 사고? 아니면 고의적인 사고?
뭐든. 확실한 것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죽는다. 이대로. 차갑게. 차갑게. 아스팔트 위에 처참하게. 차갑게 식어 죽는다. 눈을 감았다. 흔히 죽기 전에 주마등이란 게 보인다고 하던데, 어째 된 게 나는 전혀 안 보인다. 그저 새까맣다. 어둡고, 차가운 고요.
‘그거는 마음에 드네.’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차 멀어지며 안 들리기 시작함과 동시에 눈꺼풀이 닫혔다. 고요한 어둠에서 커다란 아가리를 벌리며 나를 집어 삼키려는 것이 보였다. 저기에 물리면 이제 나는 없다.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인생이 끝을 내리는 거다. 물론 마지막은 좀 비참하긴 하지만.
끝난다. 그래, 끝나는 거다.
좋게 말해도 결코 좋지 않았던 태생. 그 후로 엉망진창으로 살았던 내 삶. 질척거리는 곳에서 더럽고 구차하고 치사하고 이기적이게 살다가 이십대 중반쯤에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살려고 노력했지만 그래도 인생은 시궁창이었다. 배신의 배신. 절망의 절망 밖에 없었던 삶. 이기밖에 없어서 끝없이 노력하고 노력했던 삶. 죽기에는 도망치는 것 같아 더럽고, 살기에는 살아가는 것이 더러웠던 내 삶.
서른 후반. 2년 후면 사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끝이 난다. 아쉬움도. 허무함도 없다.
어쨌든 도망치지 않고 나름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하니까.
이제야 쉴 수 있어. 이제야.
아아. 편안해. 이제야 끝이 나….
- [끝날 리가 있나.]
…뭐?
- [나, 참. 기껏 찾았다고 했더니만 이거 심하잖아? 귀하신 분의 삶이 이토록 엉망진창이었을 줄이야. 시작도 끝도 혀를 내두를 만큼 엉망이야.]
목소리… 아니, 누구?
- [이거 참. 심한데. 너무 심해.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멀쩡한 거야, 당신? 분하지도 않는 거야?]
무엇 때문에? 내가 왜 그래야하는 거지? 나는 지금 아주 만족해. 질척거리는 시궁창 같은 인생이 드디어 끝났다는 것에 아주 만족스러워. 아니, 근데 넌 누구냐고.
- […그거. 진심이지? 진짜?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정말 분하지 않은 거야? 당신을 그렇게 만든 인간이 원망스럽지 않아? 당신을 엉망진창으로 해놓은 인간들에게 한 톨의 원망도 없어?]
귀찮게 그래야하는 이유가 뭐야? 그런 건 이미 어릴 적에 다 끝냈어. 끝난 일에 왈가불가하지 않아. 그보다 너 진짜 누구야? 시끄럽거든? 좀 자게 해줘. 피곤하다고.
- [특이해. 정말 특이해. 어떻게 그런 꼴을 당하고도 한 점 더러움이 없는지 원. 귀한 분이라서 그런가? 뭐, 아무튼 좋아. 가볼까? 당신의 세계로.]
뭐?
- [말했잖아. 끝나지 않았다고. 아. 물론 이 세계에서의 당신은 끝났어. 귀하신 분이여. 하지만 진짜 당신은 끝나지 않았어. 원래 끝이란 없는 법이야. 특히 당신은 말이지. 여지 것 돌고 돌아서 계속 반복해온 영혼. 오로지 당신만이 가능해. 잊은 모양이지만 말이야. 아무튼 가볼까? 당신이 원래 있어야할 장소에.]
원래, 있어야할 장소?
- [그래. 고귀하신 당신이 원래 있어야할 세계. 당신의 영혼이 본디 있어야할 세계지. 본인은 랑그. 칸 샤이 이프리엔의 첫 번째 가지, 랑그. 자. 가자, 귀하신 분이여. 걱정하지 마. 칸 샤이 이프리엔은 당신을 줄곧 기다렸어.]
- [당신의 세계에 돌아온 것을 환영해.]
그 말을 끝으로 크게 입을 벌려 나를 집어 삼키려고 하던 검은 아가리가 사라졌다. 그 대신 눈부신 빛이 내 몸을 감싸 안았다. 따스하고도 어딘가 그리운 향기가 나는 빛이다. 나는 그 빛에 온전히 내 몸을 맡긴 채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