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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그럽다고 하더니 아예 방치하기로 작정한 건가?’
한바탕 퍼부을 줄 알았는데 여자는 그저 날 완전히 방치 하고 있었다.
아예 없는 존재로 무시하기로 작정한 것처럼 내가 아무리 호박 안에서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도 그냥 지나가기 일쑤였고, 껄렁한 말투로 시선을 끌어 봐도 그저 무심하게 흘깃 쳐다보고는 제 할 일에 여념 없었다.
여자는 뭐가 그리 바쁜지 하루 온종일 이리 ‘동동’ 저리 ‘동동’ 뛰어다니기 일쑤였고, 그 때마다 여지없이 험악한 인상이 되어 누군가에게 날카롭게 쏘아붙이고 히스테리를 부리곤 했다.
‘누구한테 저렇게 따지는 걸까?’
여자의 모습은 항상 분함을 참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최대한 성질은 참는 것 같았다.
성격이 그렇게 온순하진 않지만 한계까지는 끝없이 참다가 폭발할 때쯤, 자신도 어쩌지 못하고 분해서 방방 뜨는 그런 타입이라고나 할까?
대단히 분기탱천 해 있을 때는 사납기가 100년 전 일본 앞잡이마냥 가차 없었지만 그럼에도 진짜로 화를 내는 것으로 누군가를 해할 것 같지는 않은 분위기였다.
기본적으로 순한 성격의 여자라는 느낌.
한 번은 목이 타는지 물을 마시다 사 레가 들린 적이 있었는데 한참을 콜록거리다가 물통을 벽에 던져 버리는 통에 호박이 물통에 패여서 찍혀나간 적이 있었다.
구덩이에서와 마찬가지로 난 호박 속에서 피를 흘리며 눈물을 줄줄 흘렸는데 그 광경을 처음 목격한 그녀는 그예 사색이 되어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나보다 더 아파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게 이 집에 들어 온 뒤에 가장 처음으로 그녀가 날 투명인간 취급하지 않았던 일이라 사실 난 아픈 와중에도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기분이 좋았다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르지.’
많이 아파? 연고 발라야 하는데…….
호박 안에서 어떻게 연고를 발라. 그쪽은 거기 있고 난 여기 있는데……. 당신이 재주라도 부려서 이 안으로 들어온다면 모를까.
입만 살았지?
장난스러운 대꾸에 그녀는 곧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가서 또다시 날 무시했지만, 그 일로 인해서 난 그녀의 본성이 너무 순하고 착한 여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난 그녀가 참고 넘기는 것이 너무나 답답해 보였다.
차라리 구덩이 안에서 만났을 때처럼 만나자마자 미주알 고주알 하소연을 늘어놓고 자신의 분을 참지 못해서 할퀴는 것이 낫다고 여길 정도로.
아마 100년 전의 나였다면 오히려 지금의 그녀를 더 편하게 생각 했을지도 모르지만, 100년 후의 난 아무래도 구덩이 속 원혼들에게 길들여져도 단단히 길들여진 듯 했다.
‘지금처럼 이렇게 참기만 하는 여자가 마음에 안 드는 걸 보면.’
앞으로도 여자가 저렇게 한계치까지 참기만 한다면 나도 더 이상 가만 있을 수만은 없을 것 같았다.
다치고 아픈 것은 오히려 구덩이 안에서와 별반 다를 것 없으니 새삼 그런 것 때문에 화가 나고 답답할 일은 아니다.
그저 그녀가 화를 제대로 표출 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썩어 문드러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동동거리는 게 마음에 안 든다는 것. 단지 그것 말고는 이유라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화를 내라고. 나한테라도, 어서!”
나는 여자가 지나칠 때 그렇게 말 했지만 그녀는 또 날 투명인간처럼 무시하는 태도만을 고수했다.
‘짜증스럽군. 답답한 여자 같으니라고.’
어째서 저렇게 쩔쩔매기만 하고 제대로 성질을 내지 못하는지, 할 수만 있다면 저 뇌를 꺼내서 조사라도 하고픈 심정이었다.
“화를 낼 상대가 필요하잖아? 화....안 낼 거야?”
다시 구슬려 봤지만....
“흥!”
콧방귀만 뀔 뿐이었다.
“흥?”
“징그러워.”
‘작게 혼잣말 해 봤자 다 들린다고. 어이! 차라리 크게 말을 해! 성질을 부리라니까?’
없는 존재로 볼 거라면 차라리 실컷 화라도 내고 실속 챙기는 여자라도 되던가.
그것도 제대로 못하는 여자가 100년동안 봐 온 원혼보다 못마땅했다.
“숫가락을 떠 줘도 못 받아먹는 여자 같으니라고.”
“흥!”
“또, 흥?”
지나쳐 간다. 속이 썩어 문드러져 가는 것도 무시한 채.
“어이! 화를 내라고, 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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