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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진액과 내가 혈투를 벌이고 있을 때였다.
은행원이 알 수 없는 주문 같은 것을 쉴 새 없이 중얼거리며 구덩이 아래를 잠시 들여다보더니 다시 아무렇지 않게 돌아서는 것이 보였다.
‘아직 간 게 아니었어? 분명히 아까 발자국 소릴 들은 것 같은데.’
그 순간,
놈의 주문을 따라 이리저리 출렁이던 액체가 빠르게 고체화되기 시작했다.
난 그런 놈의 주문 때문에 액체와 함께 굳지 않기 위해 더욱 더 몸을 발버둥 쳤다. 그러나 그럴수록 액체는 더욱 단단하게 굳어져갔고, 발아래의 흙은 질척한 늪이 되어 더욱 몸을 흙 아래로 빨아들였다.
이상한 것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흙과 나무 진액이 뒤범벅으로 섞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둘이 섞이지 않고 물 위의 기름처럼 분리 된 것과, 이 진액에 꽁꽁 묶인 채로 발버둥 치는 내가 흙으로 된 벽을 만지려 할수록, 흙벽의 틈에서 돌을 찾아내어 위로 올라가려 발버둥을 칠수록, 이 액체가 얇은 막처럼 나를 막아서고 있는 것이었다.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
질척한 흙구덩이 벽에서 딱딱한 돌 몇 개만 찾으면 올라가기가 훨씬 수월해지련만 벽 틈에서 돌을 찾는 일도 그리 녹록치는 않았다.
‘이럴 리가 없을 텐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단단하던 흙벽조차 물컹한 생물처럼 내 손을 핥고는 물컹하게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용암이 떨어지듯, 핏물이 흘러넘치듯 붉은 빛을 내며 바닥으로 고인 흙벽은, 이미 내 몸을 꽉 잡고 놓아주지 않는 흙바닥과 고체가 되어가는 나무 진액과 마찬가지로 나를 얽어 매기 시작했다.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나는 곧 체력적인 한계를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죽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여기까지가 나의 한계였다.
‘정말 죽고 싶지 않은데…….죽을 수 없는데…….’
머릿속으로 그동안 있었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치고 있었다.
내가 그동안 보지 못하고 지나친 것들까지 포함한 모든 순간들이. 제때 내가 철이 들었더라면 막을 수 있었던 날들.
반성하고 고치려 했더라면 그녀와 지금 난 아이 하나쯤 낳고 평온한 날들을 보내며 공방을 운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안타깝게 눈앞을 지나쳐갔다.
더 이상 꿈 꿀 수도, 꿈 꿔서도 안 되는 나날들이.
나는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포기하고 싶지 않았지만 더 이상 힘을 낼 수가 없다. 힘을 내서도 안 된다.
그럴 염치를 부리기엔 그동안 내가 해 온 짓들이 너무나 엄청나다.
그녀를 핍박하며 의심하고 다그친 나날들.
폭력을 행사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그건 날 기분 나쁘게 한 그녀에게 당연하게 가할 수밖에 없었던 벌이었고, 연인인 그녀의 의무이기도 했다.
모든 것은 내 기분 위주로 움직이고 있었다.
난 분명히 나 하나만을 소중히 여겼다.
사랑하는 여자라면서 그녀를 제대로 사랑해 주지 않았다. 소중히 여긴 적이 없었다. 타자의 시선으로 내가 한 행동들을 들여다보는 이 순간,
나는 내가 얼마나 쓰레기 같은 인물이었는지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런 인간이었음에도 사랑해 줬던 거였어. 누나…….너는, 날 포기하지 않고 함께 아파해 줬어. 그런데 난……. 난 널 죽이고, 여전히 증오해 온 거야.’
이제는, 다시 만난다면 그녀에게 정말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손을 뻗어 그녀에게 다가서려 해봐도 그녀는 잡히지 않고 뿌옇게 흐려진다.
눈앞이 하얗게 바래어 간다.
그렇게 내가 모든 걸 포기한 채로 숨조차 놓아버린 그 순간,
내 주변을 감싸고 있던 나무 진액이 하나로 뭉쳐져 둥근 원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저건……. 호박?’
나는 빠르게 호박의 형상이 되어가는 호박 안에 갇힌 것이다.
나의 죄업으로 인하여 그 곳에 갇힌 거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그 벌에 순응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다, 내가 자초한 일이니까.”
나는 몸의 힘을 빼고 호박에 몸을 맡겼다.
‘나를 가두려거든. 그래…….가둬. 이걸로 모든 걸 끝낼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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