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 축하해요 신가연 변호사님. 매번 듣기만 했지, 파티에 와 보기는 처음이네. 듣던대로 화려하구나-. 변호사님 처럼. 아, 대표님 이라고 불러야 되나? 애인 회사 대표니까?”
웃으며 인사를 건넨 여자는 가연과는 또 다른 느낌의 미인 이었다. 시원시원한 이목구비와 화려한 이미지를 가진 여자는 눈에 띄는 미모 만큼이나 화려한 몸매의 소유자 였다. 큰 키를 지녔음에도 높은 구두를 신어 가연보다 한 뼘이나 높이 있는 여자는 가연을 내려다 보는 모양새로 서있었다.
웃고 있는 입과는 별개로 여자의 눈에는 가연을 향한 경멸로 가득 차 있었고, 여자는 이를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제 생일에 저 보다도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보란듯이 차연우의 팔짱을 끼고 온 저 여자를 가연은 알고 있었다. 연우의 10년 된 여자친구 강미연.
“언제나 화려하죠 제 파티는. 근데 오늘은 언니가 제일 화려한 것 같네요. 예뻐요 오늘.”
여자의 인사치레에도 한참 동안이나 말없이 여자를 응시하던 가연이 입을 열었다.
‘언니’ 라는 친근한 호칭을 붙이며 말하는 가연의 얼굴에는 예의 그 가식적인 미소가 걸렸고, ‘언니’라 불린 미연 역시 웃는 가면을 벗지 않았다.
두 여자는 서로에게 적대감을 가감없이 뿌려 대면서도 솜씨 좋게 표정을 숨겼고, 그 모습에 인상이 찌푸려진 건 연우의 얼굴 뿐이었다. 파티장에 들어 설 때부터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던 연우의 표정이 가연의 입에서 나온 ‘언니’ 라는 한마디에 사정없이 찌푸려 졌다.
찌푸려진 연우의 얼굴을 본 가연의 눈썹이 꿈틀 거리는 것을 알아 챈 이는 정현밖에 없었다.
“내가 아무리 예뻐봐야 너 만할까-. 연우씨 가연이 오늘 너무 예쁘지?”
가연은 생각했다. 생긋 웃으며 말하는 이 여자의 얼굴을 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해서 한 대 치고 싶다고.
간신히 감정을 갈무리한 가연은 와줘서 고맙다는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며 웃어 보였다. 가연과 대화하는 주체는 미연 이었지만 대화 내내 가연의 시선은 연우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언제나 이런 저런 핑계로 연우와 마주칠 일을 만들어가며 따라다녔지만 오늘 이상할 정도로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이유가 이거 였나보다. 강미연을 달고 올 줄이야. 가연은 굳어지려는 표정을 가까스로 다잡으며 웃음을 유지했다. 차연우에게는 언제나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고 싶은 자존심 이었다.
“여기 오늘 핫해요. 제가 신경 많이 썼거든요. 재미있게 놀다 가세요. 가연이 이제 촛불 끄러 가야되서-.”
가연 만큼이나 이 상황이 불편했던 정현이 웃으며 마무리를 시도했지만 미수에 그쳤다.
미연 때문이었다. 자리를 뜨려는 둘을 잡아 놓은 미연은 생일 선물 이라며 자신의 클러치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내 가연에게 건넸고, 상자를 열어본 가연의 얼굴에서 억지로 붙잡고 있던 웃는가면이 기어코 떨어지고 말았다.
'웃어야 하는데. 차연우가 보고 있는데.'
미연이 건넨 선물 상자안에 있는 것은 립스틱이었다. 오늘 아침에 제가 연우에게 선물이라며 쥐어 준 것과 똑 같은.
굳은 표정으로 상자를 내려다 보던 가연은 미연에게 그 것을 집어 던지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손이 떨릴뻔 했다. 이를 참아내기 위해 가연의 온 몸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다.
“연우씨 한테 들었어 평소에 잘 바르는 거라며? 나도 너무 좋아하는 건데. 가연이는 나랑 취향이 정말 비슷한 것 같아. 그렇지 연우씨?”
가연의 심상치 않은 반응에 정현이 상자안을 슬쩍 들여다 봤고, 상자안의 립스틱을 본 정현의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뭐 하자는 거야-. 정현은 제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은 채 연우를 노려 보았지만, 눈을 아래로 내리고 있는 연우는 무심한 표정만을 짖고 있었다.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언제나 무심한 연우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거슬려-. 매번 저런 무신경한 태도로 가연을 상처입힌다.
정현은 연우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가연의 손에서 빼앗듯 상자를 채왔다. 가연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제 행동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그런 그녀의 모습에 정현의 속은 화산 폭발 하기 전의 용암이 들 끓듯 부글부글 끓었다.
저런 인간이 뭐가 좋다고-. 가연대신 두 사람의 속을 한껏 긁어 놓기위해 정현이 머리를 빠르게 굴리며 말을 골랐고. 마침내 답을 찾은 듯 차분하던 정현의 눈동자가 반짝인 그 순간. 가연이 한 템포 빠르게 정현의 팔짱을 끼며 화사하게 웃었다.
“그럼 이건 언니가 주는 선물이 아니라, 차변호사님이 주시는 선물이네요. 잘 쓸게요.”
가연이 정현을 말리려는 듯이 다급하게 말을 꺼냈고, 그런 그녀의 행동에 벌어지려던 입술을 꾹 깨물어 말을 삼킨 정현이 차가운 눈으로 가연을 내려다 본다.
정현이 내려다 본 가연은 웃는 얼굴로 미연을 보고 있었고, 미연은 굳은 표정으로 연우의 표정을 살폈다. 그리고 등장 이 후, 한번도 가연에게 향하지 않았던 연우의 시선이 가연에게 닿았다.
그렇게 누구와도 마주치지 못한 네 남녀의 시선이 각자 다른 방향으로 얽혀 들었고, 정리되지 못한 시선들은 마치 그들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네 사람은 인지하지 못했지만, 이 들이 서로에게 촉각을 세우고 있는 사이 파티장의 수 많은 시선들이 모두 그들을 향해 있었다.
큰 소리로 웃고 떠들던 게스트들의 말 소리는 비밀을 이야기하듯 은밀해 졌고, 시끌벅적 하던 루프탑은 어느새 차분해져 있었다. 루즈한 째즈의 선율만이 수면위로 퍼지며 한층 고요함을 더해가는 루프탑 안에서 파티의 분위기만은 기묘하게 들뜨는 느낌 이었다. 조심스럽게 행동 하고 소근거리며 말을 주고 받지만, 시선은 점점 노골적으로 치정의 주인공들에게 달라 붙기 시작한다.
모두가 호기심이 가득한 눈을 하고 귀를 쫑끗 세워가며, 풀(pool) 옆에 선 네 남녀가 형성하는 오묘한 분위기를 주목했다.
신가연을 중심으로 한 10년 간의 사각관계.
지겨울 법도 했지만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이 들에게 그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최상의 안주거리 였다. 남 부러울 것 없고, 비쥬얼 마저 흠 잡을곳 없는 그 들의 치정은 지지부진 했지만 흥미로웠다. 그리고 오늘 신가연의 서른 한 번째 생일파티에서 그 절정을 맞이하고 있었다.
신가연의 생일파티에 처음으로 강미연이 등장 함으로 새로운 장면이 연출 된 것이다.
“오늘 드디어 끝을 보나? 강미연이 신가연 생일파티에 온건 처음이잖아?”
“끝이 아니라 시작 일 지도. 선전포고. 뭐 이런건가?”
“야. 넌 선전포고를 전쟁 중에 하냐? 쟤들 십년째야. 그리고 사실 상 십년동안 신가연이 따라다닌거지. 차연우랑 강미연 10년 만나는 동안 흔들리기는 커녕 둘이 싸웠다는 말도 한번 들은 적 없다 나는. 나 같으면 이미 넘어 갔을텐데-. 난 신가연쪽이 더 취향이라. 흐흐.. 오늘 치정 끝나는 거면 내가 자빠뜨린다. 조막만한 기집애가 야들야들- 한게 아주 색기가 흘러넘쳐.”
“지랄하네. 꿈깨 새끼야-. 신가연은 너 취급도 안해. 혹여 차연우 제끼더라도 다음은 윤정현인데 감당 가능하냐? 난 윤정현이 더 강적이라고 본다.. 최후의 승자는 윤정현 일지도 몰라-. 그래도 신가연 색기 넘치는건 인정. 몸매로 보면 강미연이 승리긴 한데, 신가연은 어쩐지.. 험하게 다뤄서 울려보고 싶달까.”
“신가연이 이기면 차연우는 둘다 먹는거네. 부러운 새끼. ”
“저런 새끼들이 뭐가 좋다고.. 그 잘난 신가연 강미연도 어쩔 수 없구만. 겉만 번드르르한 새끼들인걸 모르고-. 인성은 쓰레기들인데.. 사실 저 새끼들, 기집애들 수저보고 달려 드는거 아니냐고. 신가연이 JS 유일무이한 상속자 인거야,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고. 대경기업도 사실상 강준규가 실세 아니야. 강미연 아빠.”
“그렇긴한데, 재들 집안도 꿀리는거 아니잖아. 한 놈은 지검장 아들에, 한 놈은 외과장 아들.”
"윤정현은 차남이고. 차연우는 입양이고."
“야 이 새끼들아-. 다 떠나서 급이 다르지! 돈 이라고 돈-. 까놓고 말해서. 잘나봤자 기집애들 인데, 자빠뜨리기만하ㅁ..”
- 촤아아아악 !!
“악!! 뭐야 이거 !!!!!! ”
쥐 죽은 듯 조용하던 파티장 에서 별안간 큰 소리가 났고. 치정이 한창이던 가연 무리에게 고정되어 있던 시선이 소리가 난 방향을 향해 일제히 돌아간다.
소란의 주체는 구석에 박혀 여자들이나 힐끔 거리던 양복쟁이 남자들 몇몇이었다. 중앙은 커녕 어느 한 군데 자리잡지도 못하고 구석진 곳으로만 몰려다니며 주인공들의 치정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음담패설을 섞어 그들을 깎아 내리기에 열을 올리던 남자들에게 별안간 물벼락이 날아 든 것이다.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듣기 싫어도 들리던 남자들의 저급한 대화에 눈썹을 찌푸리던 주변 사람들이 어쩐지 고소하다고 생각하며 자리잡고 구경 하는 것을 시작으로, 어느새 사람들이 몰려들어 원숭이쇼를 관람하는 양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 들을 둘러 싸고 있었다.
불시에 맞은 물벼락으로 얼이 빠져있던 이들은 현 상황을 인지 하지 못한 채 멍청한 표정으로 서 있었고, 남자들의 반대편에는 가죽재킷을 입은 멀끔한 남자가 한 손에 얼음 바스켓을 들고 서 있었다. 운동선수를 연상케 하는 다부진 체격과 큰 키가 무척이나 인상적인 남자였다.
무표정하던 남자의 얼굴에 불시에 능글맞은 웃음이 떠 오르자 어쩐지 이목구비가 낯이 익다.
“어이쿠 죄송합니다. 제가 손이 미끄러워서. 아닛! 이게 누구야? 우리 영감님들 아니십니까?!?”
누가 보더라도 일부러 한 일 이었다. 손이 미끄러진다 한들 어느 누가 얼음 바스켓을 사람 머리위에서 쏟는 단 말인가. 심지어 와인병이 대여섯병은 들어갈 법한 대형 바스켓을.
빙글빙글 웃으며 빈 바스켓을 어깨에 처억- 하고 걸친 남자는 양복쟁이들의 눈을 일일히 맞춰가며 진심 빠진 사과의 말을 건넨다. 아이고 이거 죄송해서 어쩝니까? 입에서 나오는 말과는 다르게 남자의 표정에는 미안한 기색이 전혀 없었고, 서늘한 눈으로 입꼬리만 올려 비웃 듯 자신들에게 사과를 건네는 남자의 모습에 양복쟁이들은 몸을 파들파들 떨며 열을 올렸다.
머리부터 얼음물을 뒤집어 쓴 남자들은 물에 빠진 생쥐 꼴 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내뱉는 말에는 그 어떤 교양도 위엄도 없었다. 그러나 변죽을 떠는 남자의 입에서 나온 영감님 이라는 호칭에 구경꾼들이 의아한 눈으로 남자들의 행색을 살폈고, 그 들의 목에 달랑달랑 메달려있는 검찰청 목걸이를 발견했다.
“이..! 이..!! 너 이새끼 뭐하는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