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아... 안 돼...”
허리를 잔뜩 구부린 채로 엎드려있는 그에게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측면에 서있던 승아의 시야 속에서 붉은 핏물이 뚝뚝 떨어져 고이고 있었다. 서둘러 신고를 해야만 했지만 휴대폰이 없었다. 떨어뜨린 가방을 돌아보다 그들에게 빼앗겼음을 깨달은 승아가 그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오지 말라고...”
간신히 입 밖으로 목소리를 쥐어짠 그가 한 움큼 붉은 피를 토해냈다. 바닥은 그가 뿜은 피와 복부에서 넘쳐흐르는 피로 흥건했지만 연신 그는 승아를 있는 힘껏 쏘아보며 접근을 막았다.
“죽을지도 몰라요. 당신 지금 피를 너무 많이...”
“제발 떨어져... 당장 떨어지라고!”
그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손 댈 생각 하지마...”
잠시 멈춰 섰지만 승아는 곧 남방을 벗어 손에 들고는 그에게 다가갔다. 밀어내려 떨리는 손을 내밀어도 승아는 그의 상체를 부축하며 안아들었다. 후드 티가 살짝 말려 올라가 드러난 복부에 선명하고 깊은 자상이 나있었다. 당장 치료를 받지 않으면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승아가 다시 주위를 살폈지만 좀처럼 지나치는 사람이 보이질 않는다.
“제발 가만히 좀 있어요! 죽고 싶은 거에요?!”
입술을 파랗게 질려 가는데도 쇼크 때문인지 몸부림치는 그를 놓치지 않기 위해 목을 더욱 꼭 받쳐 들며 껴안던 승아가 그에게 있을지도 모를 휴대폰을 떠올렸다.
“당신 휴대폰 가지고 있죠? 휴대폰 찾는 거니까 이해 좀 해줘요.”
후드 티의 주머니를 밖에서 더듬던 승아의 손에 멈추지 않고 쉴 새 없이 흘러나오는 뜨거운 핏물이 진득하게 묻어났다. 벌써 많은 양의 피를 흘려 이대로는 구급차가 도착하기도 전에 생사를 달리할 것만 같았다. 이미 의식을 잃어 가는지 풀려가는 그의 동공이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승아는 남자의 몸을 바닥에 눕힌 채 벗어 뒀던 남방을 들어 그의 상처위에 올린 채 한 손으로 힘껏 압박하며 다른 한 손으로 바지 주머니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그의 바지주머니에는 몇 알의 사탕과 휴대폰이 들어있었고 다이얼 세 개를 막 누르던 참이었다.
“압사라도 시킬 셈이야?”
의식을 잃은 줄 알았던 그의 또렷해진 목소리였다.
“아니라면 좀 떨어지고.”
풀려 텅 비어있던 그의 눈동자가 똑똑히 승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것도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너무도 멀쩡한 얼굴로.
“지금... 당신 지혈하고 있는 중인데요?”
“지혈? 무슨 지혈? 의료면허는 있고? 사람 살릴 수 있어?”
“아뇨, 그런 건 아닌데... 그쪽이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과다출혈보다 압사당해 죽을 것 같으니까 떨어져 달라고.”
쇼크로 인한 반응이라기엔 목소리와 눈빛, 혈색까지 그의 모든 것이 너무도 멀쩡하고 안정적으로 느껴졌다. 또 갑자기 느껴진 시건방진 기운까지...
그의 말에 승아가 조심스럽게 지혈 중이던 손과 흠뻑 젖은 남방을 들쳐 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선명하게 깊고 파고들었던 칼 자국이 있던 그의 배에는 핏물이 약간 묻어있기만 할 감쪽같이 상처가 아물어 있었다. 애초에 칼에 찔린 상처가 없었던 것 같은 그의 배를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승아가 물었다.
“당신 분명히 칼에 찔렸었잖아요...? 이거... 설마 당신이 그런거에요?”
“뭘?”
“아까까지만 해도 있던 상처가 사라졌잖아요. 당신 칼에 찔린 거 기억 안나요?”
“기억나지. 분해서 미칠 지경이야. 도망치는 거 귀찮아서 하루살이 같은 목숨 하루라도 더 연명하라고 봐줬더니 내 배에 칼을 꽂으려고 뒤를 밟아? 능구렁이같이 생긴 양두일이 윗대가리니 피라미 놈들도 얍삽한 짓이나 해대고...”
“당신이 한 거냐구요!”
살짝 벙쪘던 얼굴의 그가 재밌다는 듯이 빙긋 웃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아직도 119 번호가 떠있는 휴대폰과 그 맡에 떨어져 있던 사탕 한 알을 입에 집어 넣으며 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가 한 거지. 네가 했잖아? 난 이런 능력은 없어.”
그의 입에서 달콤한 바닐라냄새가 흘러나왔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픽 웃으며 그가 승아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래 이건 꿈이야. 곧 깨고 말 지독히도...”
“끔...찍한 꿈?”
그가 재밌다는 듯이 한참을 웃었다. 그리고 그의 그 웃음이 잦아질 때 쯤 그와 승아의 입에서 익숙한 말이 동시에 흘러 나왔다.
“그리고 이제 다신 꾸지 말았으면 하는 꿈...”
그의 입에서 달콤하고 진한 바닐라 냄새가 풍겨졌다.
“당신이 날 구했죠? 그날... 날 구하고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데려다 놓았던 그 사람... 아니, 사람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당신이 맞는거죠?”
“아니?”
생글거리며 바닥에 떨어진 나머지 사탕들을 하나씩 집어 주머니에 찔러 넣은 그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리곤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뒤 엄지와 중지를 맞붙인 손을 허공에 들어 보였다.
핑거스냅임을 직감한 승아가 소리를 낼 수 없게 손을 꼭 붙잡아 막으며 물었다.
“이번엔 뭘 또 되돌려 놓으려는 거죠? 날 어디에 또 데려다 놓으려구요?”
“글쎄... 이번엔 기억을 되돌려야 하지 않을까? 오늘의 기억은 특히나 내게 불리한 기억들이니까.”
“어떤 게 당신에게 불리하단 거죠? 칼에 찔린 게? 날 구해준 게 당신인 걸 내가 알아버려서요? 아님... 당신의 상처를 낫게 한 것?”
더 이상 생글거림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표정을 지운 그가 승아를 빤히 응시했다.
“모든 것들이? 네가 평범한 다른 인간들과 다르단 사실을 자각하게 된 것과 네가 인지하게 된 내 존재와, 그리고 그로인해 애써 유지해온 내 배려가 수포로 돌아가면서 비틀어놨던 너의 운명이 그의 뜻대로 다시 흘러가 버리게 되는 것. 그래. 그가 감아놓은 태엽대로 네가 다시 그 지옥으로 빠져든다면 나에게 그보다 큰 유감은 없을 테니까.”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설명이 됐냐는 듯 한 얼굴로 승아의 손을 털어내며 다시금 손가락을 맞붙이는 그에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 손을 다시 붙잡는다.
“난 내가 다른 사람들과 뭐가 다른 건지도 모르고 내 운명이 어떻다는건지 당신이 말한 모든 게 무슨 말인지도 알 수 없어요. 난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데 당신 뜻대로 난 알지도 못한 채 지워지고 잊히고 되돌려져야만 하는 건가요? 어째서 난... 내 삶이고 내 운명인데 선택권이 없는 거죠?”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대신에 그와 함께 마주서있는 우리의 세상이 점차 어두워져 갈 뿐이었다. 아마도 그의 내면이 드러나고 있는 듯 했지만 승아는 모른 척 그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기만 했다.
“내가 너에게 설득이란 걸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준비해놓은 대답은 없지만 적어도 나만을 위한 건 아니었다는 걸 말해줘야 할 것 같지만... 내가 왜 이런 낯 뜨거운 변명을 너에게 해야 하는 거지?”
“날 위해서 였다구요?”
그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급히 승아의 손아귀에서 손을 빼냈다. 다 녹아 비어버린 입 안에 주머니에서 꺼낸 사탕 하나를 물고 도륵거리는 소리를 내며 굴려 녹여먹던 그가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회피했다.
“역시나 난 당신이 멋대로 정한, 날 위해서였다는 핑계 때문에 다시 당신을 잊어야만 한다는 거죠?”
“지금처럼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는 편이 그나마 편할 테니까.”
“아무것도 모른 채 평범한 척 살아가는 편이 당신에게도, 내 인생에도 풍파 없이 원만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거겠죠. 그런데 그 풍파라는 건, 그분 뜻대로 흘러갈지도 모를 내 운명이란 건 어차피 내 기억이 온전하든 그렇지 않든 어차피 내게 닥쳐올 시련인거 아닌가요? 난 까맣게 잊은 채로 다시 고비를 맞이하고 당신은 내 앞에 나타나 고비를 넘겨주고 지금껏 그렇게 무한의 굴레를 지나온 거 아니냐구요.”
그의 어깨너머 칠흑같이 어둡던 세상 끝이 동이 터오듯 붉게 타오르고 그의 눈동자마저 이질적으로 함께 타오르고 있었다.
“난 언제나 네가 원하는 바를 들어줬을 뿐이야. 약속을 이행했을 뿐이고.”
“그럼 지금도 내가 원하는 바를 들어줘요.”
“원한다면. 하지만 그 마음을 다시 번복해 날 다시 찾지 않기를 바래.”
미간을 좁히며 그는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한 채 등을 보이며 돌아섰다. 그리고 곧 자취를 감추며 사라져버렸고 동시에 일상으로 돌아온 승아는 그가 머물러있던 흔적으로 서둘러 시선을 옮겼다.
지워지지 않은 핏자국과 손에 늘러 붙은 채 굳어버린 핏물들을 보며 안도하던 승아가 또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타의의 관여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아닌 자연스레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안도의 울음을 터뜨리던 순간이었다.
“정승아! 이 피가 다 뭐야?!”
숨을 헐떡이며 달려온 미윤이 놀란 눈으로 승아를 일으켜 세우고 몸 곳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아마도 이 피들이 승아의 것이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새 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냐. 아무 일도... 누굴 좀 도와줬어.”
“정말? 넌 안 다친 거 맞지? 제발 걱정 좀 그만 시켜라. 제발...”
안도하며 미윤이 승아를 품속에 끌어안았다. 가슴팍에 얼굴을 부딪치며 안긴 승아 역시 미윤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그렇지 않아도 기운이 쫙 빠져나간 탓에 다리가 후들거리던 참이었다.
“잘리더라도 오늘은 정말 출근 못하겠다. 꼴도 이 모양이고...”
포근한 섬유유연제 냄새에 코를 박으며 승아가 두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