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사람들... 죽었다는 거야?”
죽 집에 들러 승아가 먹기 좋게 후후 불어 죽을 식히던 미윤이 승아의 시선을 쫒아 티비를 봤다. 소리 없이 영상만 틀어놓은 티비에서는 간밤에 있었던 폭력 조직 간의 영역다툼이 막 보도되고 있었다.
“글쎄 앵커멘트가 안 들려서 모르겠지만 자막에 10여명 사망했다고 나오는 걸 보니 죽었을 수도?”
다시 죽 식히기에 여념 없던 미윤이 불현듯 스치는 생각에 다시 티비로 시선을 옮겼다. 마침 뉴스의 하단부에 ‘양두일파 10여명 사망‘이라는 자막이 뜨고 있었다.
“저 사람도... 죽었을까?”
끝이 떨리는 승아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얼굴만 모자이크 된 채 붉은 머리카락만이 바람에 흩날리는 남자의 과거 체포 영상 자료를 함께 보던 미윤이 들고 있던 수저를 내려놓고 동기에게 전해 받았던 리스트를 다시 확인했다.
양두일파의 요주의 인물 중 중간 보스 급으로 분류된 양재혁의 트레이드마크가 저 붉은 머리였다. 승아의 두 눈에 두려움이 실리고 곧 창백하게 온 얼굴이 질려갔다.
“기억해?”
승아의 시선이 미윤에게로 옮겨졌다.
“그 자식 얼굴 기억하냐고.”
다시 티비로 향하려는 승아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막으며 자신을 보게 한 미윤이 다시 물었다.
“널 거기까지 데려다 놓은 자식이 저자식이야?”
승아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럼 퇴근하던 널 납치한 게 저자식이야?”
승아는 섣불리 대답도, 고개를 끄덕이지도 못했다. 단지 겁에 질려선 풀린 두 눈으로 미윤을 마주하고 있을 뿐이었다.
“저새끼든 아니든 내가 기필코 찾아낼거야. 찾아내서 아직 살아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가 죽여 버릴게. 두 번 다시 네가 이런 얼굴 할 일 없게, 다신 이런 일이 너에게 벌어지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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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 다툼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당장 뉴스에서 재혁이 영상 내리게 해. 어느 방송이건 간에 재혁이 사진도, 영상도 못 싣게 만들라고!”
이성을 잃지 않으려 밤새 발버둥 쳐왔던 두일이었다. 밤새 응급수술을 받고 나온 의식 없는 재혁을 바라보며 천운으로 깨어날지라도 두 번 다시 두 다리로 일어설 순 없을 거라는 의사의 말을 곱씹으면서도 이 악물고 평정을 유지하려 했다지만.
생명유지 장치에 의존 중일지라도 아직 살아있는 재혁을, 그런 세상 유일한 피붙이를 죽은 것 마냥 보도하는 뉴스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던 두일이 이를 바득바득 갈며 한 손에 꽃병을 쥐어 들었다.
“형님...”
수하인 동석이 고개를 저으며 두일의 손에 쥐어진 꽃병을 조심스럽게 빼앗아 들었다.
“언론사는 인맥을 동원해 당장 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분노에 번뜩이는 두일의 두 눈과 마주치자 동석이 급히 시선을 내리깔며 고개를 숙였다.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베어버릴 듯 한 살기에 오랫동안 그를 모셔왔던 동석이었음에도 다리가 후들거려왔다.
“찾아내. 두 번이나 우리 애들을 몰살시키고 또 몰살시키려했던 그년... 그년이 그랬든 배후가 그랬든 간에 이젠 고객이고 자시고 내 손으로 직접 목숨 줄 끊어버릴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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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년 전이었지 아마...”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지만 그 날, 그 때, 그 순간들의 감정이 낙인마냥 가슴 깊숙이에 뿌리 박혀 있었기에 우남은 철렁 내려앉는 가슴을 움켜쥐어야만 했다. 미윤에게 부축 받으며 다시 집으로 들어선 승아는 몹시 지쳐있었고 침대에 눕히자 안절부절못한 채 불안해했지만 금세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미윤에게서 대략적인 상황설명을 전해 듣고 나니 우남은 과거의 악몽이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 곳으로 이사 오기 전이었어. 승아가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새로 맞춘 교복을 꽤 마음에 들어 했던 게 기억나네. 그 날 이후로는... 두 번 다시 그 교복을 입을 수 없었지만.”
그때의 기억에 뭉클했던지 조명에 비친 우남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 들었다.
“만 하루 동안 감쪽같이 승아가 사라졌었어. 실종신고를 하려했지만 단순 가출로 몰았지. 우리승아는 그럴 리 없다 말해도 이미 그들에게 승아는 학업에, 혹은 극성 맞은 아버지 밑에서 지쳐 가출해버린 그런 아이가 되어 있었어. 밤새 퉁퉁 불은 눈으로 승아를 찾아 다녔고...”
승아의 손을 꼭 쥔 채 우남이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경찰서를 나온 이후로도 신발이 벗겨진 것도 모른 채 맨발로 승아를 찾아다니다가 전화가 왔어. 당시 살던 곳에서 3시간은 꼬박 달려가야 하는 먼 곳에 있는 가정집 앞에서 발견되었다고. 이상했지. 승아는 가방도 지갑도 그 어떤 것도 소지하고 있지 않은데다 의식불명상태였음에도 내게 전화가 온 거야. 그때는 의심할만한 여력도 없었으니 눈치 채지 못했지만 뒤늦게 깨닫고는 그 집을 찾아갔지. 하지만 아무도 없었어. 빚에 쫓겨 야반도주한지 몇 년이 지나도록 폐허로 남아있는 집이라고 누군가 알려 줄때까지 개미 한 마리 지나치지 않는 집이었지.”
우남의 이야길 잠자코 듣고 있던 미윤이 낮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분명 오늘 낮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앰뷸런스에 실려 온 정승아씨는 최초 목격자인 성수초등학교 학부모 봉사자와 함께 있었습니다. 보호자 연락처 역시 그 분이 알려주셨고요. 무슨 문제가 있나요?’
간호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고 미윤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수납을 마쳤었다.
“다행인 것은 승아의 몸에 어떤 흔적도 없었고 또... 정말 불행인지 다행인지 알 수 없지만 승아는 3일이 지나자 그동안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어. 다만 그 3일 동안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입 밖에 내지도 못한 채 혼자 끙끙 앓으며 괴로워만 했었지. 기억을 잃었다할지라도 아이가 괴로워했던 그 곳에 하루라도 더 머물고 싶지 않았다. 혹시라도 다시 떠올리게 될까봐.”
처음 승아를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우남과 승아는 창백하고 헬 숙한 모습으로 처음 이 동네로 이사를 왔었다. 그리고 한동안 그 누구와도 쉽게 어울리지 못했던 모습들을 떠올렸다. 아마도 경계를 했던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에 잠긴 사이 우남이 승아의 이불을 가슴 맡까지 끌어 올려주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번이 마지막일지 또 되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한 가지 확실한건 당분간의 안전을 위해서 또다시 이곳을 떠나야만 한다는 것이겠지.”
“아저씨 제가 있잖아요. 이 일과 연관 있는 주동세력을 알아냈어요. 더 이상 승아를 위협할 수 없게 제가...”
“아니. 나는,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 때도 그렇고 지금도 누군가 내게 메시지를 보내는 것 같아. 멀리 떠나라고. 멀리 사라져. 쥐 죽은 듯이 숨어 살라고.”
“어딜... 가시려구요? 아저씨 제가 지킬게요. 제가 승아 지킬 수 있어요. 한번만 믿어주세요.”
“이건... 널 믿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란다. 넌 승아가 흉악범죄에 연관된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난... 그리 단순한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더 이상의 말없이 우남은 확고한 의지에 차있는 눈으로 미윤을 단호하게 바라봤다. 어느새 땅거미가 져 어두워진 승아의 방 안에서 따스하고 은은한 조명 불빛만이 퍼지고 있었다. 잠시 적막으로만 가득 차 있던 이 방에서 미윤은 우남의 시선에 떠밀려 잠자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 빠져나갈 수밖엔 없었다.
‘그리 단순한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터놓지 않은 무언가가 더 있는 것 같았지만 차마 우남과 승아의 과거를 더 들추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승아의 집을 빠져나오며 불이 꺼진 자신의 집 앞에 우뚝 멈춰선 미윤이 막 진동이 울리기 시작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어. 나야.”
[제스트로 양두일파가 모여들고 있대. 아마도 애들 모아서 신생세력 급습하려는 걸로 어림짐작 중이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야.]
“무슨 소리야?”
[뭐래더라. 겁나 유치한 놈들이던데... 아 배드맨이라더라. 베트맨도 아니고 배드맨이라고 이름지어놓고 몇 명 되지도 않는 놈들이 제스트 치러 먼저 급습한거라던데?]
“패기 하난 인정해줘야겠네.”
이젠 제법 어두운 밤이 되어버린 시간, 열쇠구멍에 들어가지 않는 열쇠를 연신 찔러 넣으며 미윤이 겨우 대문을 열고 들어섰다. 몇 걸음 되지 않는 마당을 지나 현관 앞에 멈춰선 미윤이 고개를 돌려 불 꺼진 승아의 방을 바라보다 문고리를 비틀었다.
“아까 부탁한 건 어떻게 됐어?”
[VIP병동에 입원 중인걸 로 봐선 아직 숨이 붙어있지 싶다. 아무래도 양두일의 하나뿐인 혈육이기도 하고 조직 내에서의 위치도 있고 극비에 붙이는 모양이다.]
“VIP병동에 있다면 아직 살아있단 말이지...”
[그리고 간밤에 양재혁을 덮친 것도 배드맨 놈들 같다고 양두일파 피라미들이 그러던데. 이 좁은 바닥에 양재혁을 건드릴 만큼 죽고 싶어 환장한 놈들이 있겠냐고.]
“그래...?”
젊은 피의 패기는 이루 말할 것도 없고 겁도 없이 야망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이라면 생각보다 일이 쉽게 진행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럼 그 좁은 바닥 판도 좀 뒤바뀌게 손을 좀 써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