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공포(panic)
머리는 더욱더 하얘져 있었다. 원형 탈모의 땅따먹기가 공포스러울 정도로 가속화된 터였다. 흡사 어린아이가 바리캉으로 장난이라도 친 듯 머리는 무차별적으로 습격당한 상태였다. 후두부에서 측두부와 두정부를 거쳐 전두부까지 모든 영토가 침략을 받아 초토화된 상태였다. 설핏 봐도 황무지가 40퍼센트를 넘어선 듯했다. 그나마 남아 있는 머리카락도 살짝만 잡아당기면 중력의 힘에 이끌려 무기력하게 떨어져 나갔다.
순식간이었다. 그야말로 삽시간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머리가 이 모양이었다. 항생제에 내성을 보이는 슈퍼박테리아처럼, 스테로이드 주사가 듣지 않는 슈퍼원형 탈모증이 내 머리카락을 휩쓸어간 듯했다.
겉보기엔 40프로 남짓한 머리털이 빠졌지만 나는 그 이상이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아직 빠지지는 않았지만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시커먼 빙산 덩어리를 나는 본능으로 느낄 수 있었다.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그 불길한 기운을, 나는 포유류의 내재적인 안테나로 감지했다. 머리카락을 살짝만 당겨도 속절없이 빠져 버리는 게 아무리 생각해도 예사롭지 않았다. 만약 예전처럼 두피를 빡빡 문질러 머리를 감는다면, 모든 머리카락이 다 뽑히리라는 불길한 확신이 들었다.
호전될 기미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지만 악화될 여지는 여러모로 다분해 보였다. 더 이상은 막연한 심증이 아니었다. 객관적인 증거물 또한 도처에 깔리기 시작했다. 이제 일상생활 어디에서나 원형 탈모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비단 화장실뿐만 아니라 아침에 일어나서 베개에서도, 청소기를 밀 때 방바닥에서도, 책상에서도, 외투 모자에서도 거무스름한 지푸라기 다발을 목도할 수 있었다.
9. 대학병원(university hospital)
열여섯 살의 12월 30일, 나는 드디어 대학병원에 가게 되었다. 2주 전 예약했을 때보다 머리카락 지분의 30퍼센트를 추가적으로 잃어버린 뒤였다.
차가운 겨울바람에도 대학병원의 하얀 성벽은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아빠 차를 타고 한 시간 넘게 달려 도착한 곳이었다. 뭔가 위축되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나는 부모님과 대학병원으로 다가갔다.
채 병원에 들어서기도 전에 하늘색 환자복 차림의 사람들로 입구가 북적거렸다. 링거 주사, 목발, 휠체어 차림의 환자들을 지나서 부모님과 나는 1층 원무과로 갔다.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 모두 낯빛이 심상치 않았다. 웃음기가 전무한, 황량한 사막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표정한 사람들 모두 어두침침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지금까지 다녔던 동네 이비인후과, 소아과와는 기류 자체가 다른 곳이라는 걸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대기석에서 기다려 주세요.”
4층 피부과 간호사의 지시대로 부모님과 나는 대기석에 걸터앉았다. 머리카락이 다 빠질 것 같다는 불길한 직감과 그래도 대학병원이라면 뭔가 방법이 있지 않을까, 라는 티끌만한 희망이 머릿속 교차로에서 맞부딪혔다. 여러 명의 의사들은 중후한 목소리로 환자들의 이름을 불렀다. 그때마다 환자들은, 교체를 하는 축구 선수들처럼 방향이 엇갈렸다. 통로에서 나온 한 명은 간호사 접수대를 지나 복도로, 의자에서 일어난 한 명은 통로를 지나 진료실로 터벅터벅 걸어 들어갔다. 그에 따라 간호사 접수대 위의 커다란 모니터에선 환자들의 이름이 한 칸씩 올라갔다. 아래에 있던 내 이름도 어느덧 맨 위로 올라가게 되었다.
“한지현, 1번 진료실로 들어오세요.”
한 시간도 넘는 기다림 끝에 마침내 내 이름이 호명되었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귀에까지 전해졌다. 진료실문을 여니 백발의 의사가 하얀 가운차림으로 준엄하게 앉아 있었다. 의사의 윤기가 넘치는 백발에서는 검은 머리칼이 드문드문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나는 책상 앞에 놓인 의자에 걸터앉았고, 부모님은 나란히 내 곁에 섰다.
“머리 한번 보자.”
의사가 지시한 대로 나는 외투에 딸린 모자와 비니를 벗었다. 의자에서 일어나 의사는 머리 위의 난장판을 들여다보았다. 30초 가까이 의사는 머리를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그러더니 탈모 진행 정도를 파악하기 위해 한 가지 검사를 하겠다고 말했다. 손으로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지극히 단순한 검사였다. 엄지와 검지를 이용하여 의사는 수십 올의 머리카락을 살포시 잡아당겼다. 그러자 한 뭉텅이의 머리카락이 일말의 통증도, 저항도 없이 빠져 버렸다. 마치 티슈를 뽑는 것처럼 머리카락은 자연스러우면서도 매끄럽게 뽑혔다. 한 군데를 더 뽑아본 의사는 머리카락 두 뭉치를 쓰레기통에 갖다 버렸다.
“탈모가 많이 심하군요.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습니까?”
다시 의자에 앉은 의사는 부모님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런 적은 처음이라고, 아빠가 대답하였다.
“혹시 어머님, 아버님이나 아니면 다른 가족 분들 중에서 이런 적이 있었습니까?”
“일가친척을 통틀어 봐도 아무도 없습니다. 머리카락이 이렇게 빠진 건 딸아이가 처음입니다.” 이번에도 아빠가 대답하였다.
“그렇군요. 머리카락이 빠진 지는 얼마나 되었습니까?
근엄한 중저음의 목소리였다. 투명한 렌즈 너머의 안쪽눈구석이 갈고리처럼 예리한 것이 뭔가 대단한 실력자 같았다. 정돈하게 차려입은 가운과 그 안의 하얀 와이셔츠와 검은 넥타이는 세뱃돈처럼 빳빳했고, 눈가와 이마의 주름살은 바위처럼 완고했다. 의사에게서 느껴지는 견고한 기백에 나는 위축감과 동시에 든든함을 느꼈다. 세상의 그 어떤 병이라도 치료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두 달 반 정도 되었습니다. 동네 피부과에서 머리에 주사를 맞았는데도 머리카락이 계속 빠지는 바람에...”
오른편에 서 있던 아빠는 차마 말을 맺지 못했다. 아빠의 말을 들은 의사는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됐군요. 지현이의 경우, 원형 탈모가 많이 심합니다. 겉보기에는 머리카락이 절반가량 빠졌지만 제가 볼 때는 그 이상입니다. 머리카락은 아마 조만간 다 빠질 것 같습니다.”
그 순간 나는 확인사살을 당한 피살자의 심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심장이 먹먹해지고 숨이 가빠지며 뇌가 움츠러드는 야릇한 기분이었다. 머리카락이 다 빠지리라는 대학병원 의사의 소견은 거인의 주먹처럼 내 가슴을 움켜쥐었다. 형체 없는 거대한 압력이 사방에서 심장을 짓눌렀다. 나는 살짝 눈앞이 혼미해졌고, 아주 살짝 호흡이 가빠졌다. 머릿속의 공간은 뿌연 안개로 뒤덮였다.
“치료를 하면 머리카락이 다 나나요?” 맥 빠진 목소리로 아빠가 말했다.
아빠의 질문에 의사는 시선을 내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다시 부모님을 쳐다보며 말했다.
“원형 탈모증의 경우 아직까지 완치법(cure)은 없습니다. 하지만 지난 수십 년간 머리카락을 자라게 하기 위해서 시도한 치료법(treatment)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때문에 머리카락을 다시 나게 할 수는 있어요. 다만...”
뭔가 하기 어려운 말을 준비하는 사람처럼 의사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러다 부모님을 쳐다보며 낮은 음색으로 말을 꺼내었다.
“머리카락이 다 날 거라고 장담해 드릴 수는 없습니다. 100% 회복될 수도 있지만, 일부만 자랄 수도, 어쩌면 전혀 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더군다나... 원형 탈모증은 재발이 잦은 병입니다. 때문에 지금 치료를 받아서 머리카락이 자라더라도 언젠가는 다시 머리카락이 빠질 수가 있습니다. 그 때 다시 치료를 받더라도 반복해서 빠질 수도 있고요. 치료를 받기 전에 어느 정도는 염두에 두셔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진료실은 무거운 침묵으로 가라앉았다. 나야 이미 반쯤 맛이 간 상태였지만 이번엔 부모님도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눈치였다. 내적 혼란 상태를 깨뜨린 건 엄마의 근심스러운 목소리였다.
“치료는 어떻게 하나요?”
“약을 한번 먹어봅시다. 스테로이드와 사이클로스포린이라는 약에다가 비타민도 좀 섞어서 처방해드릴게요. 하루에 세 번씩 복용해야 하는데 적어도 몇 달은 먹어야 할 겁니다. 그리고 이 약은 나중에 끊을 때 서서히 줄여야 해요. 갑자기 줄이면 몸에도 안 좋고 머리카락도 잘 빠지거든요. 다시 말하지만 서서히 줄여야 합니다.”
‘서서히’라고 말할 때, 의사는 고개를 천천히 기울이면서 동시에 엄지와 검지를 닿지 않을 정도로 좁혀갔다. 치료에 대한 설명을 마친 의사는 시선을 내려 나를 바라보았다.
“중학생이니? 아니면 고등학생?”
“이제 고등학교 올라가요.”
내 대답을 들은 의사는 다시 시선을 부모님에게로 옮겼다.
“고등학생이면 공부한다고 바쁘겠네요. 그러면 방학 때는 일주일에 한 번씩 보고, 고등학교 올라가면 한 달에 한 번만 봅시다. 그리고 가기 전에 피검사 한번 해 봅시다. 간혹 다른 질환이 발견될 수도 있거든요.”
진료가 끝나자 나는 비니와 외투에 딸린 모자를 쓰고 의사에게 인사한 뒤에 문을 힘없이 열었다. 진료실 앞에서 대기 중이던 긴 웨이브 머리의 젊은 의사를 따라 바로 옆의 치료실로 이동했다. 명찰을 보니 수련의였다. 내가 의료용 침대에 걸터앉자 수련의는 하얀 커튼을 쳐주었다. 그러고 나서 주삿바늘을 팔에 찔러 넣었다. 오른 팔꿈치에 있는 푸른 혈관의 붉은 피를 뽑아낸 수련의는 이번엔 머리를 카메라로 찍어야 하니 모자를 벗으라고 말했다.
“네? 사진이요?”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말에 나는 화들짝 놀라 수련의의 얼굴을 망연히 올려다보았다. 모자를 벗으라는 무언의 눈길을 살짝 피하여 나는 왼쪽 눈 밑의 왕점으로 피신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찍고 싶지 않았지만 나는 이미 대학병원의 압박감에 실험실의 생쥐처럼 움츠려든 상태였다. 결국 나는 찍소리도 못하고 비니와 외투 모자를 벗었다. 수련의는 내 머리에 카메라를 갖다 대며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카메라의 플래시와 찰칵거리는 소리는 머리를 향해 다각도에서 날아왔고, 나는 너덜너덜한 누더기가 된 심정이었다.
힘없이 대학병원을 나선 나는 부모님과 함께 약국에 들어가서 일주일 치 약을 받았다.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해산바닷가를 경유하였다. 석양에 물든 백사장에서 사람들의 검은 머리털이 뒤로 휘날리고 있었다. 흐드러진 머릿결 위로는 갈매기 몇 마리가 비실거리며 저공비행 중이었다. 푸른 수평선을 건너다보며 나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두 눈을 지그시 감은 나는 머리카락이 다 나게 해달라고, 하느님, 부처님, 예수님, 공자님께 애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