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고?”
“귀가 먹나? 당장 갑옷 벗어.”
나는 아직도 고태성의 말을 받아드릴 수 없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저렇게 칼을 내민 상태에서 갑옷을 벗으라고 명한다는 건, 내게 죽으라는 말과 진배없으니까.
지금 가장 상정하기 싫었던 안건이 화두에 올라와버렸다. 어렴풋이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다. 나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인질로 잡았다면 할 일은 불 보듯 뻔 하니까.
그렇지만 이해하는 것과 받아드리는 건 다르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돌파구를 찾기 위해 나는 머리를 계속 굴리고 굴렸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한두 사람이면 모를까 서른이 넘는 사람들이 작정하고 동시에 절벽 아래로 투신하려 든다면 나로서는 막을 방법이 없다.
고태성은 애를 태우던 내 모습을 더 이상 지켜보기 지루한지 최후의 선고를 내렸다.
“슬슬 결정 하시지. 네놈의 보잘 것 없는 목숨인지, 타인의 목숨인지.”
생물이란 본디 자신의 삶을 가장 우선시하는 법이다. 그리고 삶이란 자기 목숨과 떼려야 땔 수 없는 관계다. 목숨을 걸면서 삶을 지키는 사람도 있지만, 목숨 그 자체를 삶이라 여기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다.
나 또한 예외가 될 수 없다. 까놓고 말하자면 모르는 사람의 생명 따윈 내 알바 아니다.
‘아는 사람이라 문제지.’
인용이는 말할 것도 없고, 대다수가 우리 학교 학생이다. 몇몇은 심지어 같은 반이고 말이다.
면식 있는 사람의 생명의 위기를 외면할 정도로 나는 낯짝이 두껍지 않다. 살릴 수 있다면 전부 살리고 싶다.
하지만 대가가 너무 크다.
지금까지의 나는 가족을 위해 많은 걸 희생해왔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보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다. 모든 걸 내려놓고 성인처럼 남을 위해 한 몸 불사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제 인생이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는데, 여기서 생을 마감하긴 싫었다.
이렇게 급작스럽게 인생의 갈림길을 마주할 줄은 몰랐는데.
그것도 올 포 원이냐, 원 포 올이냐의 극단적인 갈림길이라니.
“답이 없군. 거절이라고 받아드리면 되나?”
고태성이 지루하다는 듯 손바닥을 펴 박수를 치려하자 다급해진 나는 아무 말이나 쏟아냈다.
“나와 한소윤을 떨어트린 것도 네가 한 짓이냐?”
“뻔히 보이는 수작이로군. 그래. 내가 조사팀을 매수해 벌인 일이다.”
“내가 죽으면 사람들을 놔준다는 보장은 어디 있지?”
“이봐. 나도 협회원이라고. 네 녀석만 아니었다면 죽이지 않았어. 네가 정화되면 기억을 지우고 돌려두도록 하지.”
“···이런 일을 벌이고 그냥 넘어갈 거 같아?”
“협회에 침투한 첩자를 처리 하는 일이다. 문제 될 거 없다고 보는데? 슬슬 짜증나니까 끝내지?”
“···알았어.”
말이 통하지 않는 고태성을 보며 나는 직감했다. 이게 정말로 마지막이라는 것을.
더 이상 질질 끄는 것도, 수작을 부리는 것도 용납되지 않는다. 결단을 내려야 할 시간이 찾아왔다.
“후.”
가벼운 한숨과 함께 나는 결국 갑옷을 해제했다.
갑옷이 사라지자 야산에서 발가벗겨진 기분이 들었다. 공포심에 심장이 뛰었다. 호흡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아 계속해서 공기만 들여 마시기만 했다.
시야가 흔들리고 손이 떨렸다. 그 모습을 본 고태성이 득의한 표정으로 브로드 소드의 칼끝을 나를 향해 겨눴다.
죽기 싫다.
이대로 모두를 내동댕이치고 도망치고 싶었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도, 해야 할 일도 많이 남아 있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 하고 이대로 삶을 마감해야 한다는 건 더할 나위 없이 비참하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남아 봤자, 남들을 버리고 혼자 살아남았다는 사슬이 평생 나를 옭죄어 올 것이다.
그걸 속죄하기 위해 산다 해도 결국 남게 되는 건 위선으로 짜인 빈껍데기뿐이겠지.
죽을 자리를 찾지 못 하면 추해진다는 말도 있고.
고태성의 브로드 소드가 턱밑까지 접근했다. 나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눈을 감으며 내 사후의 일을 걱정했다.
내가 죽으면 가족들은 슬퍼하겠지. 몇 날 며칠 쉬지 않고 애절한 눈물을 흘리며, 피폐해진 가슴을 붙잡고 살지 않을까.
남겨질 가족들을 생각하니 괜히 코끝이 찡해졌다.
유족연금이 있는 만큼 엄마와 하린이는 평생을 일하지 않아도 걱정 없이 먹고 살 수 있겠지만, 일생 동안 가슴 어딘가를 허전하게 비우고 지내게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내가 도망치면 그 부담은 내 앞에 도열해 있는 사람들의 가족들이 지게 된다.
등산객 단체 객사란 타이틀을 달고 나오는 뉴스. 화면에 잡히는 울부짖는 유족들. 친구의 장례식장에 찾아가지도 못 하고 액정 너머로 바라만 보는 나까지.
그런 비극적인 장면을 이 몸 하나 희생해서 바꿀 수 있다면···. 그게 최선이겠지.
‘협회 사람들은 조문 와 주려나.’
이제 겨우 팀에 녹아들기 시작했는데, 안 좋은 기억만 안기고 떠나게 생겼다.
브로드 소드가 내 겉옷에 닿았다. 백화점에 간 날 하린이가 몇 번이나 번복하다 골라준 옷이다. 칼날이 곧 그 옷을 찢고 내 살갗을 파헤치리라.
각오했던 일이다. 나를 영입할 때, 본부장님은 비교적 안전한 일이라고 설득했지만 난 언젠가 이런 일이 생길 지도 모른다고 은연중으로 자각해왔다. 그렇기에 최후에 와서 이렇게 냉정할 수 있던 걸 지도 모른다.
‘와라.’
모든 것을 마무리한 나는 마지막 성장 단계를 밟기 위해 덤덤히 죽음의 칼날을 품 안으로 받아드렸다
팅!
“하! 본색을 내보였구나 이 은혈귀 새끼야.”
“아니야! 잠깐 기다려!”
나는 급히 손을 내지으며 소리쳤다. 왜 이런 사태가 된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 갑옷을 해제했고, 갑옷을 입으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는데, 급작스럽게 갑옷의 일부분이 나타나 브로드 소드의 칼날이 튕겨낸 것이다.
은혈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의 몸을 보호하고 있다. 아니, 죽음의 공포를 포옹하지 못 하는 내 무의식이 저지르는 일인지도 모르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짝!
간결한 박수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 발밑에 쓰러져있던 두 사람이 냅다 일어나더니 절벽을 향해 달려갔다.
발판이 없는 곳에 발을 내딛은 대가를 죽음으로 치룬 두 사람을 보며 나는 이를 갈았다.
“다음은 세 명이다. 어디 이번에도 막아보시지.”
태평하게 이빨을 보이는 고태성의 입을 당장이라도 찢어버리고 싶었다.
“그런 흉악한 표정 짓지 말라고. 나도 좋아서 이런 일을 벌이는 게 아니니까 말이야.”
한 톨의 진실도 담기지 않은 얼굴을 한 고태성은 재차 브로드 소드로 나를 찔렀지만 이번에도 갑옷이 가슴을 뒤덮으며 나를 칼날로부터 보호했다.
그에 선언한 대로 세 명의 사람을 절벽으로 투신시킨 고태성은 브로드 소드를 저글링 하듯 던지고 잡으며 말했다.
“재밌네. 어디까지 가는지 볼까?”
“갑옷이 멋대로 막고 있는 거야! 조금만, 조금만 시간을…. 그래! 다운 레이로 소모시키면 돼. 기다려!”
“웃기지도 않는 수작을. 그렇게 갑옷을 입을 생각인가 보지? 어디 이 녀석이 죽어도 그런 짓을 할 수 있는지 보자고.”
고태성은 그러면서 인파 속에서 한 소년을 걸어 나오게 했다. 그 소년은 모른 채 하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는 남자였다. 그도 그럴 게 아까까지만 해도 한솔이랑 둘이서 놀려먹었으니까.
“…박인용.”
죽마고우이자 이 장소에서 나와 가장 친분이 깊다고 단언할 수 있는 인용이가 절벽 앞까지 걸어가자 나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당장이라도 떨어질 듯 위태로운 인용이의 모습에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인용이만 구해 도망치고 싶었다.
“마지막 기회다. 이번에도 막아봐라.”
목을 향해 바람을 가르며 다가오는 브로드 소드의 칼날을 보며 나는 스스로에게 외쳤다.
제발 나오지 마! 내 목숨을 지켜줄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그런 염원이 무원하게도 이번에도 여과 없이 갑옷은 내 몸을 단단히 보호했다. 작은 가시도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의지로 가득했던 믿음직한 갑옷이지만 지금은 이보다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아니, 지금 그런 감정에 잠겨있을 때가 아니다.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설마 하면서 인용이와 고태성을 번갈아 바라봤다.
혹시나 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고태성은 일말의 자비도 베풀지 않았다.
고태성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박수를 치자 인용이는 조금씩 조금씩 절벽을 향해 걸어갔다. 나는 그 모습에 목이 찢어지도록 부르짖었다.
“멈춰! 개새끼야 멈추라고!! 기다려! 갑옷을 억제하고 있으니까. 기다리고!”
나의 처절한 절규에도 불구하고 결국 인용이는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세상이 암흑으로 뒤덮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