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옆에서 들어오는 공격을 몸으로 받아내며 가장 앞에 있던 남자에게 정권을 먹였다. 이후 코피를 흩뿌리며 쓰러지는 남자의 멱살을 잡고 한 바퀴 빙 돌린 뒤 주위의 적들에게 던졌다.
볼링의 스트라이크처럼 핀들이 한 번에 쓰러지면 좋았을 텐데, 아무래도 나는 볼링에 재능이 없는지 아무도 맞추지 못 했다. 형편없는 결과지만 상심하지 않고 나는 여러 방향에서 찔러 들어오는 검 중 하나를 골라잡아 쑥 당겼다. 온 몸을 바늘로 찌르는 느낌이지만 개의치 않고 잡아당긴 남자의 목을 거꾸로 쥐고 무기처럼 마구 휘둘렀다.
그 행위가 다른 남자들에겐 큰 위협이 되지 않았지만 목이 잡힌 남자에겐 효과적이었는지 큰 충격을 받아 목뼈가 부러진 남자가 축 늘어져버렸다.
‘분신이니까 죽여도 되겠지? 설마 진짜 열두 명의 쌍둥이겠어?’
그러나 그런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숨이 끊어진 남자의 시체가 몇 초 후 스르륵 가루가 되어 사라졌기 때문이다. 처음 쓰러트린 남자와 집어던진 남자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둘 다 방금 전의 분신처럼 사라진 모양이다.
‘진짜 분신이네.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쉰 나는 이제 아홉 명이 된 남자들과 대치했다.
따로 계책이 있는 건지, 답이 안 나와 공격을 멈춘 건지 모르지만 남자들에서 더 이상 들어오려 하는 기색을 찾을 수 없었다.
공격력이 있는 분신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알고 있다. 힘을 전부 n분해서 나눠 가지는 타입과 강한 힘을 가진 본체가 분신 속에 숨어있는 타입.
분신들의 공격력이 모두 일정한 걸 보니 이 남자는 아마 전자 같았다. 그렇다면 한 명 남을 때까지 계속 줄여나가야 한다. 계책을 짜기보단 부지런히 몸을 놀려야 된다는 판단을 한 나는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나를 경계하는 남자들 사이로 파고 들어갔다.
퍽!
내 훅이 남자의 안면에 직격했다.
사실 레슬링에서 봤던 래리어트를 응용해 한 명을 낚아 챌 생각이었지만, 뭐 결과가 좋으니 됐지.
그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도중 한 명이 내 다리를 붙잡더니 네 명이 더 달라붙어 내 팔다리를 봉했다. 검으로 베이지 않으니 힘으로 움직임을 멈출 작정인 것 같았다.
나는 가슴과 팔 근육을 이용해 내 오른손을 꽉 잡고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음. 뽑기 좋은 각도네.
챙!
건틀릿과 손목보호구의 사이가 벌어지고 레이크가 뽑혀 나오며 사선에 있던 남자의 심장을 갈랐다.
나는 레이크를 밑으로 크게 휘둘러 레이크에 꽂혀있던 남자의 가슴팍과 내 양 다리를 잡고 있던 두 남자의 목을 한 번에 베어버렸다. 그리고 당황하는 왼쪽의 남자의 배에 레이크를 쑤셔 박고 등 뒤에서 내 어깨를 잡고 있는 남자의 손을 잡아 메친 뒤 레이크로 명치를 찔렀다.
레이크를 수납한 나는 살점과 피로 범벅이 된 바닥을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분신은 죽고 10초 뒤 사라진다는 것만 제외하면 평범한 사람과 다를 게 없었다. 배를 가르면 내장이 쏟아지고, 목을 치면 피가 분수처럼 솟는다.
사람처럼 생긴 은혈귀를 죽인 정신적 충격이 아직 가시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하드고어한 장면을 보게 될 줄이야. 끔찍하다 진짜.
근데 오히려 다행인가? 이걸 충격요법이라 생각하면 될 지도?
‘아냐. 이런 충격요법 필요 없다고···.’
긍정적인 생각을 해보려 했지만 시체투성이인 이 장소에선 불가능했다. 다행히 시체들은 곧 사라졌지만 충격 때문인지 아직도 느껴지는 혈향에 머리가 아찔했다.
‘정신 차리자. 앞으로 셋밖에 안 남았으니까.’
나는 심신을 다잡고 천장을 향해 힘껏 도약했다. 약 4M 높이의 천장에 발이 닿자 다시 강하게 천장을 박찼다.
각력과 중력의 힘을 이용한 펀치가 남자의 허리에 정확하게 들어갔다. 그 분신은 몸이 꺾이다 못해 완전히 접힌 상태로 땅에 처박혔다.
‘이제 둘···. 도망치네?’
남자의 분신은 나를 더 이상 상대할 수 없다고 여겼는지 둘로 나눠져 서로 반대방향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곤란한데. 어느 쪽을 쫒아도 남은 쪽이 본체가 될 거 아냐?’
나는 짧게 고민하다가 레이크를 뽑아들었다. 한 쪽은 이걸로 처리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최소 출력의 다운 레이가 박물관 안을 질주했다. 음속의 벽을 순식간에 돌파한 다운 레이는 이제 막 계단을 올라가던 남자의 심장을 꿰뚫었다.
다른 쪽에서 뛰어가던 남자가 깜짝 놀라며 도망가는 것도 잊고 이쪽을 바라봤다. 그러더니 도망가는 것을 포기했는지 땅바닥에 주저앉고 입을 뻐금거렸다.
‘대충 제압 된 거 같네.’
상대방의 전투 의지가 사라졌지만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하기 위해서 나는 갑옷을 해제하지 않고 남자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하지만 그때 누군가 내 발걸음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고태성!”
주저앉은 남자의 것이라 생각되는 이름을 외치며 급작스럽게 등장한 사람은 살집이 조금 붙어있는 30대 정도의 남성이었다.
그 남자는 자신의 아들이 다친 것처럼 허둥지둥 다가오더니 브로드 소드를 쥐고 있는 고태성이란 남자의 어깨를 잡고 걱정했다.
“괜찮아? 얼마나 다쳤어?”
“···놔.”
“뭐?”
“···씨발! 놓으라고!”
“태성아···.”
“내가···. 내가 저딴 새끼한테!”
왜인지 브로드 소드의 끝이 부들부들 떨릴 만큼 격정적으로 분노하고 있지만 나는 그것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새로 등장한 남자가 가지고 있는 물건들 때문이다.
어딘가 익숙한 스마트 워치. 어딘가 익숙한 사원증.
···저거 협회원이잖아?
’뭐야. 그렇다는 말은 저 고태성이란 남자도 협회원이란 말이야?’
한소윤은 제주지부의 현장팀이 도착하기까지 한 시간은 더 걸린다고 했지만 시간은 언제나 유동적이기 마련이기에 나는 사원증과 스마트 워치를 증거삼아 저들을 협회원이라 추리했다.
근데 왜 나를 공격한 거지? 뭔가 오해가 있었나?
“후퇴하고 태세를 정비해야 돼. 저 은혈귀. 정보와는 다르게 최소 목성급이야. 내가 시간을 끌 테니까···.”
“씨발!”
고태성은 남자의 말을 끊고 분한 듯이 브로드 소드를 바닥에 내팽겨 쳤다. 그리고 열 받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말하려는 사이. 내가 찬물을 끼얹었다.
“저기요.”
상황에 맞지 않는 침착한 목소리. 둘은 깜짝 놀라며 나를 바라봤다. 주목 받는 것에 성공한 나는 갑옷을 해제하고 사원증을 꺼내며 말했다.
“저 은혈귀 아닌데요.”
얼마간의 정적.
고태성은 고함을 지르며 내 말을 부정했다.
“웃기지 마!”
“정말인데요. 한국본부 현장 제 6팀 주홍의 순례자 송하진입니다.”
나는 그 사람들이 잘 볼 수 있게 사원증을 꺼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세이크리드 게이트 발생 장치와 스마트 워치도 슥 하며 보여줬다.
“협회원을 죽이고 빼앗은 걸로 우리를 기만할 셈이냐!”
“아니. 진짠데···.”
“그쪽이 진짜 협회원이라면 왜 인베스트게이티브 워치에 은혈귀라 뜨는지 설명해 보실까?”
살집 있는 남자는 아주 긴 스마트 워치의 정식 명칭을 또박또박 말하며 내 눈치를 봤다.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끄려는 것 같은 움직임. 아마 다른 팀원들이 도착하거나 고태성이 회복하는 걸 기다리는 것 같았다.
뭐 별 상관없고.
‘역시 그거 때문이었나. 아픈 곳인데 막 찌르네.’
어느 날 서유진이 조용히 알려줬는데, 나의 갑옷을 스마트 워치로 스캔하면 은장도가 아닌 은혈귀로 판별 된다고 한다.
그 충격적인 말에 몇 시간을 힘없는 좀비처럼 돌아다닌 기억이 있다. 서유진이 나를 험하게 대하지 않았던 유일한 날이었다.
지금은 이지인 누나의 자아성찰 프로그램을 이수 받고 나서 어느 정도 멘탈이 케어 됐지만, 되새길 때마다 마음이 복잡해지는 문제를 저쪽이 지적해버린 것이다.
“···제 은장도의 특성 때문입니다.”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을 하시지 그래?”
젠장.
심란해진 마음 때문일까. 머뭇거림이 그대로 드러나 버렸고 두 남자는 그걸 놓치지 않고 바로 공격적으로 응수했다.
“위에 일행 있는데···.”
“함정으로 유도하려는 것치곤 어설프기 그지없군.”
‘하아···.’
나는 무슨 말을 해도 먹히지 않을 것 같다는 답답함에 모든 것을 놓고 포기해버렸다.
그냥 저쪽은 후퇴하게 놔두고 이쪽은 한소윤이랑 합류한 뒤 다시 만나 새로운 대화의 장을 만드는 게 낫다고 여긴 나는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거리가 적당히 벌어지자 나는 갑옷을 입고 등을 돌리며 발에 땀이 나도록 도망갔다. 불성 사나운 짓이지만 어쩔 수 있나.
그런 내 뒤로 누군가가 쫒아오며 말했다.
“감이 좋은 녀석이군.”
파앙!
등에 강렬한 충격이 느껴짐과 동시에 나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잽싸게 몸을 돌려 바닥에서 일어난 나를 보며 남자는 베기보단 짓이겨버리겠다는 의도가 담긴 뭉툭하고 거대한 대검을 어깨에 둘러멨다.
정글에 홀로 떨어져도 모든 것을 잡아먹고 살아남을 것 같이 생긴 남자는 옷 안에 있음에도 야성미가 철철 넘치는 강인한 근육들을 꿈틀거리며 말했다.
“내가 오는 걸 눈치 채고 도망가려 하다니.”
‘아닌데.’
나는 속으로 부정하며 레이크를 뽑아들었다. 뒷목이 찌르르 울렸다. 몸의 전율은 눈앞의 남자가 최소 서유진급 되는 강자라며 경고하고 있다.
싸우면 위험해질지도 모르기에 그냥 여차하면 다운 레이로 박물관 절반을 날려 한소윤을 부를 생각을 하고 있는 내 눈앞에 또 한 번 누군가가 난입했다.
“뭐해?”
계단에서 컴퍼니 삼인조와 한소윤이 뚜벅뚜벅 걸어 내려오자 나는 속으로 환호를 질렀고, 근육질 남자는 반가운 기색을 띄며 한소윤에게 말했다.
“한소윤인가? 물어볼 건 많지만 회포를 풀 시간은 없어 보이는군. 조심해라. 최소 토성급의 은혈귀니까.”
“협회원입니다.”
“······?”
“저와 같은 팀에 소속된 협회원입니다.”
“···환영? 아니군. 파륜을 들고 있는 걸 보면 진짜란 소리인데. 드디어 미친 건가? 은혈귀가 같은 팀이라고?”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는 근육질 남자에게 한소윤은 담담히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송하진 순례자가 가진 은장도의 특성입니다. 인베스트에는 은혈귀라 인식 되지만, 본부가 인정한 인간입니다.”
한소윤의 변론에 나는 살짝 감동을 먹었다. 솔직히 말하면 협회원이라고만 설명해주고 끝낼 줄 알았다. 그래서 변명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마무리까지 해주다니.
좋아. 이럴 때가 아니지.
나는 날 변호해준 한소윤의 말에 신빙성을 더하기 위해 날쌔게 갑옷을 해제한 뒤 아직도 울리는 뒷목을 긁으며 남자를 향해 무해해보이도록 순수한 웃음을 지었다.
“하하. 안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