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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은혈록
작가 : 실라인
작품등록일 : 2017.12.14

비일상적인 일 없이 평온한 나날을 보내는 게 나의 작은 소망이다.
그래. 내 일상은 그 누구도 부수지 못 한다!
…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도 큰 금액이었다.

어느 날. 평번하던 소년의 인생이 뒤바뀌어 버렸다.
세계의 그림자. 그 속에서 새로운 이레귤러가 된 소년은 오늘도 살아남기 위해 싸운다.

 
32. 왜 왔어?
작성일 : 17-12-19 09:55     조회 : 323     추천 : 0     분량 : 4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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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랑. 송하진…. 한솔이. 됐다.”

 인용이가 종이에 이름을 써내려갔다. 조만간 있을 수학여행의 조 편성 때문이다. 선생님은 우리들의 자율성을 위해 조 편성을 학생들에게 맡겼다.

 나는 발이 넓은 편이 아니다. 아르바이트니 뭐니 해서 친구들과 사적으로 친목을 다질 기회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학교에서 친구들과 이야기 할 때도 자주 겉돌았다.

 죽마고우인 인용이와 2학년 들어 친해진 한솔이가 없었다면 아마 멍 때리다 인원이 모자라는 조에 들어갔겠지.

 별 상관은 없지만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면식이 있는 애들끼리 여행하는 게 더 편한 건 맞기에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다.

 뭐. 사실 남자애들끼리 모이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말이다. 진정한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누구랑 할래?”

 “누군가 남겠지.”

 한솔이가 묻자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지금 말하는 누군가는 남자애들이 아니다.

 “아 왜 남녀 짝을 만들래. 귀찮게.”

 저 멀리서 불평하는 한 여학생의 말 그대로, 선생님은 남녀혼합 그룹을 짜라고 명했다. 아무래도 동성끼리만 모여 있는 것보단 사고를 덜 칠거라나 뭐라나.

 물론 숙식을 같이 하는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조별활동 시간에 같이 모여 행동할 때 만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딱히 누군가에게 권유를 하지 못 하고 있다.

 나는 아무래도 좋기에, 한솔이는 권한 여자애가 다른 조에 이미 들어가 있어서. 그리고 인용이는 여자를 거북해해서 이다.

 싹싹하고 발이 넓고, 간간히 바보짓도 하는 웃기는 녀석임에도 여자 앞에서만 가면 인용이는 망부석이 되어 버린다. 말수도 줄고 버벅거리며 행동도 영 어색해진다. 덕분에 우리는 세 명이 모여서 나머지 인원이 자동 충당되기를 하염없이 기다리고만 있다.

 “아무도 안 가?”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인용이는 조금 투덜거렸다.

 “조별 활동시간이 얼마나 된다고. 그리고 솔직히 그 시간에 같이 붙어 있겠냐? 누가 오든 거기서 거기야.”

 “그런 거 치고는 아까 못 꼬시고 엄청 낙담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인용이의 일침에 한솔이는 찔리는 게 있는지 조용히 입을 닫았다.

 “너는? 소윤이랑 친하잖아. 권유해보는 건 어때?”

 “친하다고?”

 나는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레이크 때문에 양호실 갔던 적 이후로 교실에서 사적인 대화 한 번 하지 않았는데 그게 친한 걸로 보이나?

 “그래도 아예 연관도 없는 우리보다야 낫지.”

 한솔이가 인용이의 말을 거들었지만 나는 난색을 표했다.

 “애초에 본인이 학교에 안 오는데 내가 뭘 어쩌겠어?”

 물론 같은 팀이기도 하니 연락할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그걸 말해줄 수는 없고, 내가 수고를 들일 필요도 없다.

 “요즘은 그래도 잘 나오잖아. 이따 올 지도 모르지. 종례 전까지 바꿀

 수 있으니까 가능성은 있다고 보는데?”

 한솔이의 말대로 한소윤은 최근 학교에 잘 나온다. 그 이유는 단순하게 한소윤의 일거리가 줄었기 때문이다.

 나와 민아가 들어가기 전까지 현장 6팀은 서유진과 한소윤 둘 뿐이었다. 그 중 서유진은 며칠. 길면 몇 주씩 함흥차사를 반복했으니 6팀에 부과된 정화 임무를 전부 한소윤 혼자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서민아도, 나도, 민아도 있다. 단순 계산해도 과거보다 할당된 업무의 수가 1/4로 줄어든 게 되니, 학교에도 나올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이다.

 ‘애초에 학교에 못 나오는 건 한소윤의 고집 때문이었지만.’

 본부장님은 6팀의 해체를 고려해왔다고 한다. 하지만 한소윤이 극구 거절하면서까지, 형평성 때문에 할당되는 임무를 혼자 모조리 해결하면서까지 6팀을 보존시켜 왔다고 한다.

 그 이유는 나도 잘 모른다. 레이크의 예처럼 아마 한소윤은 자신의 오빠가 팀장이었던 팀을 공중분해 시키고 싶지 않았던 거 아닐까?

 음. 어떻게 보면 다행인가? 한소윤이 과로에 지쳐 부상을 입지 않았었다면 한소윤과 내가 처음 싸웠던 그 날 피를 흘리며 쓰러진 건 내 쪽이었을 테니까.

 어쨌든.

 “오늘 안에 오면 말해 볼게.”

 내가 한솔이에게 선언하듯이 말하자 인용이가 눈을 번쩍거리면서 확답을 구했다.

 “진짜? 진짜지?”

 “그래. 진짜. 내 전재산 걸고.”

 나는 빼지 않고 오히려 뻗대며 큰소리쳤다. 당연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어차피 한소윤은 오늘 못 오거든.

 서유진의 전언에 따르면 한소윤은 서유진과 같이 상급 위마를 퇴치하기 위해 어디론가 다녀온다고 한다. 위마의 특성상 정화 시간이 오래 걸릴 테니 자율 트레이닝 하고 있으라는 글과 함께 적혀있었다.

 그런 속사정을 모르는 인용이는 짐짓 화난 듯 경고했다.

 “약속했다? 어기면 폰이랑 지갑 뺏는다?"

 “나 송하진. 한 입으로 두 말하지 않는다.”

 “오케이. 왔으니까 가.”

 “뭐?”

 내가 잘못 들었나? 인용이 이 녀석이 이상한 말을 하네.

 “소윤이가 왔다고.”

 “예?”

 “가라! 송아지!”

 “예? 뭐라고요? 누가 왔어요?”

 나는 평소라면 바로 짜증낼 별명을 들어도 화가 나지 않았다. 한소윤이 걸어오는 장면을 전면부정하는데 온 정신을 쏟고 있기 때문이다.

 “왜? 왜 왔어?”

 오늘 분명 늦어진다고 하지 않았나? 상급 위마는? 서유진은 어디다 팔아먹고 왜 혼자 돌아온 거야? 아니, 혼자 돌아오는 건 괜찮지만 왜 벌써 돌아온 건데?

 “낸들 아냐. 빨리 가기나 해.”

 한솔이는 뭐가 좋은지 히히덕거리며 재촉했다.

 “하지만 지금은….”

 사람이 많다.

 이때를 노렸다는 듯 자기 조에 들어오라고 권유하는 인파에 싸여 한소윤은 자리에 돌아기지도 못 하고 있다. 저들 사이로 들어가는 게 힘들어 보이기도 하고 괜히 주목 받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인용이는 그런 사정을 봐주지도 않고 깍지를 끼며 오늘 그 어떤 때보다 진지하게 내게 명했다.

 “상관없어. 가.”

 “끙…”

 나는 갈등했다. 여기서 못 하겠다고 말하면 내 지갑이나 뺏긴다. 사실 뺏어간다 해도 어차피 장난이다. 내가 꼬리를 더 말면 만족하면서 돌려줄 테지만.

 ‘남자의 자존심이…’

 그렇다. 쓸데없기론 이보다 더 쓸모없는 게 없지만, 챙기기론 그 무엇보다도 더 챙기게 되는 남자의 자존심이 그것을 거부하고 있다.

 자존심이냐 실리냐.

 ‘그래. 한 번 해보자.’

 나는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인용이는 나와 한솔이를 모았고, 한솔이는 아는 여자에게 권유를 해봤다. 그런데 나는? 아무것도 안 했다. 그저 가만히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고 상전처럼 지켜보기만 했다. 이대로 업혀가는 건 내 성미에 맞지 않는다.

 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자 한솔이와 인용이는 의외라는 듯 나를 쳐다봤다.

 그래. 잘 보고 있어라. 내가 이런 남자다. 그리고 차이면 위로 좀 해줘.

 인파를 해치며 겨우겨우 빠져나와 자리에 착석한 한소윤에게 다가간 나는 책상을 사이에 두고 자세를 낮춰 말했다.

 “혹시 지금 수학여행 조 정하고 있는 거 알아?”

 “들었어.”

 하긴. 주변에서 그렇게 떠들어댔는데 모를 리가 없지.

 “좋아. 그럼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너. 내 동료가 되라.”

 본부장님을 본딴 내 보잘 것 없는 권유에 어떤 애들은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냐며 비웃었고, 또 어떤 애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래. 나도 안다. 한소윤이 여기서 승낙할 리가 없다는 걸. 그러니까 이렇게 농담하듯 권했지.

 이번처럼 조를 짜거나 끼리끼리 모여야 할 때 한소윤은 언제나 거절의 거절을 거듭해 남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들어갔다.

 ‘그래서 지금 일부러 조를 짜지 않고 버티는 사람도 있을 정도지.’

 어쨌든 아무리 같은 팀에 소속되어 있다 해도 나랑 한소윤은 그다지 접점이 없다. 거의 절반에 가까운 시간을 연구소 안에서 트레이닝 받는 걸로 소모하는 나와 달리 한소윤은 임무 때문에 이리저리 돌아다니니까. 같은 팀원이란 인식은 있지 그 이상의 유대감이 생기지 않았다. 결국 그 정도의 사이. 한소윤이 우리 조에 올만한 이유는 되지 않는다.

 “알았어.”

 “어쩔 수 없지. …뭐라고?”

 “알았어.”

 한소윤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다시 또박또박 말했다. 나는 아직도 믿을 수 없어서 한소윤을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정말로? 왜?”

 “움직이기 편하니까.”

 그 대답은 나를 납득시키기 충분했다. 확실히 여의치 못 한 일이 생기거나 급한 용무가 있을 경우 같은 협회원인 내가 있다면 더 편하게 조치를 취할 수 있다. 아예 사정을 모르는 사람 사이에 있는 거 보단, 이쪽이 조금이나마 유리하다는 거겠지.

 ‘근데 수학여행에서 뭔 일이 나겠어?’

 이지인 누나는 학교 행사를 놓치면 후회한다면서 이번 수학여행 3박 4일 동안 아무 걱정 없이 즐기도록 나와 한소윤. 그리고 강성하에게 특별 휴가증을 건네주었다. 그런 만큼 나는 괜한 일에 휘말릴 생각이 없다. 제주도에 성지가 나타나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그건 제주 지부가 알아서 해결할 문제다.

 “뭐 됐다. 그럼 네 이름 적는다?”

 “응.”

 한소윤이 차갑게 대답하며 보통 때와 같이 가방에서 문제집을 펼쳐 공부를 하기 시작하자 나는 더 이상 말을 걸지 않고 인용이와 한솔이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까 한솔이의 말처럼 그룹끼리만 붙어 있을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정말 쓸데없는 일이었고, 뽐낼 일도 아니다. 오히려 나중에 나한테 엉길 애들을 생각하면 귀찮기만 하다. 그렇지만.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이런 바보 같은 자만심에 부풀어 보겠어?’

 나는 라이터를 던져 똑바로 세운 것 같은 성취감에 한껏 취하며 말했다.

 “그렇단다.”

 앉아있던 둘은 나를 마치 불가능해 보이는 시련을 넘어선 용사를 보는 행인 A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혹시 매수했냐?”

 “미쳤냐?”

 “어. 어….”

 “미친 건 얜 거 같은데?”

 “그건 반박할 수가 없군.”

 한솔이와 나는 꽁트를 주고받으며 더듬거리는 인용이를 놀려댔다. 그렇지만 인용이는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그 농담이 들리지도 않는지 부들부들 떨리는 펜으로 한소윤의 이름 석 자를 정성스럽게 써내려갔다.

 “어…. 어?”

 “쯧쯧.”

 우리는 개 껌을 선물 받은 강아지를 같은 모습이 된 인용이를 혀를 차며 지켜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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