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새가 지저귀는 햇살 좋은 아침.
부엌에서는 경쾌하게 도마를 찍는 소리가 들린다.
보글보글!
구수한 수프냄새가 콧구멍의 후각세포를 간질거리며 자극한다.
"으으음..."
창문 밖으로 쏟아져 내리는 햇살줄기에 잠을 깬 진희는 쩝쩝 거리면서 잠꼬대를 했다.
"엄마....저 금메달 땄어요...세계신기록..."
뒤적,
"하하...저 이제 연금 받아요....기분 완전 짜릿해...짜릿.."
흠칫!
"짜릿?"
진희는 눈을 번쩍 뜨면서 자신에게 얌전히 덮혀있는 이불을 우악스럽게 걷어냈다.
벌떡!
머리가 온통 산발인 그녀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로 침대를 샅샅히 살펴보았다.
"치...침대?"
결국 산적들한테 잡혀서 험한 꼴을 당한 걸까?
그녀는 방 안을 도리도리 살펴보았다. 아주 허름한 방 안에 있는 거라고는 자신이 현재 누워있는 부서질 듯한 나무침대 밖에 없었다.
'침대가 싱글침대이고...무엇보다 내가 말짱하니까 설마 아니겠지?'
진희는 자신이 길바닥에 뚝 떨어졌을 때 입었던 새카맣게 타버린 경기복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다만 그녀의 옆구리에 꽃아놓은 시합용 펜싱칼은 창문 앞에 곱게 놓여있었다.
진희는 적어도 이곳이 이상한데는 아니라 짐작하고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절벽에 떨어져서인지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시퍼런 멍이 군데군데 있었다.
그녀는 비틀거리면서 나무로 된 문을 살짝 열었다. 나무문은 경첩소리를 요란하게 내면서 열렸다.
통통통! 보글보글.
문 밖에는 빈티지한 누더기 패션을 입은 어느 중년의 여성이 능숙하게 요리를 하고 있었다. 음식냄새를 맡자 회가 동한 진희는 뱃속에서 큰소리로 꼬르륵 거렸다.
거의 하루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진희는 하염없이 음식을 쳐다보다가 여성이랑 눈을 마주쳤다.
"헉!"
"어머! 깼어요?"
중년 여성은 야채를 썰던 칼을 내려놓고 손에 물기를 닦으며 진희에게 달려왔다. 진희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아, 예...근데 어떻게 저를..."
중년 여성은 과장되게 손사레를 치며 말했다.
"아유! 말도 마세요. 한밤중에 집 뒤편에서 큰소리가 나길래 남편이 가봤더니 당신이 아주 피떡이 되어 있드래요."
'역시 꿈이 아니었구나.'
"그래서 어떻게 되기 전에 후딱 데려왔죠. 보아하니 여검사인 것 같으신데..."
"여검사?"
진희는 방 안에 있는 자신의 펜싱 칼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뭐라 생각할 새도 없이 중년여성이 큰소리로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아무튼 자세한 얘기는 밥이나 천천히 먹으며 말하든지 해요. 여보!!! 그 분 깼어!!!!"
여자는 진희의 등을 식탁 쪽으로 떠밀면서 문 밖으로 소리쳤다. 여자의 고함에 남성용 빈티지 누더기 패션을 입은 남성이 한 손에 쟁기를 들며 후다닥 들어왔다.
"오오! 드디어 일어나셨구만!"
남자가 다시 쟁기를 놔두러 간 사이에 식탁에는 소박한 한상이 올라왔다. 버섯수프와 빵 그리고 야채샐러드.
"고맙습니다."
진희는 얼떨떨하게 나무숟가락을 잡으며 허기를 달랬다. 야무지게 숟가락을 뜬 그녀는 구수한 버섯수프 한숟갈이 목구멍으로 넘긴 순간, 목이 콱 메이며 뭔지 모를 복잡미묘한 감정이 북받쳐 오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에선 뜨뜻미지근한 눈물이 툭, 툭 식탁위로 방울지며 내려왔다. 동시에 목울대도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흐...흑!흑..."
결국, 진희는 나무숟가락을 꼭 쥔채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아침에 엄마가 차려주는 밥상이 그리워서일까?
두 부부는 갑작스러운 울음바다에 당황하고는 달래기 시작했으나 그런다고 그녀의 기분이 나아질 리가 없다.
식사는 어색한 분위기로 결국 어영부영 끝나버렸다.
진희는 초가집 밖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하염없이 하늘을 쳐다보았다.
파란 하늘 위를 드문드문 장식한 새하얀 구름은 어디론가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그녀는 만악의 근원, 부적을 손에 꼭 쥐었다.
'내가 쓴 부적이 신통력을 잘못 발현 한건가?'
진희는 실력이 아닌 요행수로 행운을 얻길 바랐던 자신의 과거 행동을 땅을 치며 후회했다. 지금쯤 대한민국은 유례없는 선수증발사건에 발칵 뒤집혔겠지.
"에효효효..."
아까는 주인 부부에게 험한 꼴을 보여주고 말았다. 이제 그녀 인생의 이불킥 명장면 콜렉션 하나가 추가되었다.
그렇게 상념에 빠지며 고향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검은 그림자가 음영을 지며 불쑥 튀어나왔다.
"으앗! 뭐야!"
잠시 넋놓고 있었던 진희가 화들짝 놀라며 검은 그림자를 쳐다보았다.
"누나...누나 기사에요?"
상념에 빠져든 진희를 내려다 본 그림자의 정체는 다름어닌 주인집 코찔찔이 아들.
한 대엿살 정도로 보였다.
"나..?으...응."
펜싱선수와 기사의 차이점을 구분하지 못한 진희는 대충 칼을 쓴다는 점에서 비슷하다고 생각해서 대충 얼머무렸다.
"그럼...저 칼 쓰는 거 한번만 보여 주시면 안돼요?"
꼬맹이는 맑고 순수한 눈망울로 진희를 붙잡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사실 온몸이 성치 않아 거절하고 싶었지만 저렇게 순수한 아이의 동심을 파괴하고 싶진 않아서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좀만 기다려."
진희는 삭신이 쑤신 몸을 질질 이끌며 거충거충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새 검신 위에는 먼지가 약간 쌓였고 툭툭 털기는 귀찮아서 훅 불었다.
'그래도 꼬맹이니까 적당히 해야지.'
헬멧을 제외하고는 어젯밤 올림픽 할 때랑 똑같은 자신의 모습을 보자니 아깝게 놓쳐버린 금메달이 눈 앞에 또 아른거린다.
그녀는 애써 심란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밖으로 나왔다.
밖에서는 꼬마가 언제 가져왔는지 지푸라기가 슝슝 삐져나온 허수아비를 세워다 놓았다.
"우와아아아!"
꼬마는 진희의 각 잡힌 준비자세에 뛸듯이 환호를 하며 작디작은 손바닥을 쳤다.
"후웁!"
마음속으로 주심의 '알레' 소리를 상상한 진희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자신의 앞에 놓인 허수아비를 탁탁 치기 시작했다. 아니, 난도질에 가까울 정도로 스트레스를 풀었다.
그녀는 칼에다가 온 신경을 집중하고 저 허수아비가 하이드만이라고 상상하며 울분이 섞인 분노의 칼질을 시전했다.
아이는 입을 헤벌쭉 벌리며 마냥 좋아라 하고 있었고 진희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진지하게 시합(?)에 임했다.
칼이 날이 제법 예리한지라 허수아비의 짚이 다 터져버리면서 회생불가 상태가 되자 진희는 칼을 다시 내려놓았다.
안그래도 힘든데 심하게 무리해서인지 그녀는 앞마당에 대(大)자 모양으로 뻗었다.
'하아...죽겠다...'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심장이 나대는 것을 진정시켰다. 그래도 몸을 조금 풀고나니 나름 상쾌한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콧잔등을 스쳐지나가는 산들바람은 간만의 여유를 실감하게 한다.
이렇듯 모처럼의 평화를 즐기고 있는데 또 방해하는 그림자가 진희를 비추는 햇살을 막았다. 진희는 휴식을 방해하는 존재에게 궁시렁거렸다.
"또 해달라고? 누나 힘들어."
진희는 눈을 뜨지도 않은채 꼬마에게 투덜거렸는데 꼬마의 코맹맹이 목소리가 아닌 굵직하고 위엄서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금의 것은 그대가 한 것이오?"
처음 들어보는 낯선 이의 목소리에 진희는 소스라치게 일어났다. 그 바람에 멍든 부위에 옷감에 스쳐서 진희의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보니 주인 부부와 꼬마는 땅바닥에 납짝 엎드리고 있었고 거추장한 프릴이 달린 상의를 입은 염소수염의 사내가 그녀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사내의 뒤로는 은색 갑주를 입은 장정 다섯 정도가 줄지어 서있었고...
'이건 또 뭐야?'
진희는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훗날 돌이켜 생각해보면 호박이 넝쿨채로 들어온 큰 행운이 될 사건인줄은 꿈에도 모른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