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준은 단 하루의 휴가를 받게 된 이후, 하루 종일 잠만 잤다. 이시완 사건이 종결 된 이후, 아주 작게나마 갖게 된 휴식타임이였기 때문이었다. 푹, 자고 일어난 서준이 당연하다는 듯이 시아를 찾았다. 저녁을 준비하고 있는건지, 침실까지 달그락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준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싱크대 앞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시아의 모습이 보였다.
"뭐해?"
조심스레 다가간 서준이 시아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요즘에 일이 많아 살이 빠졌다고 하더니, 그 말이 거짓은 아닌 듯, 시아의 허리는 한 팔에 들어오고도 남았다.
화들짝 몸을 떤 시아가 작게 숨을 들이삼키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얼굴은 이미, 화르륵 달아오른 뒤였다.
"아, 우리 저녁 먹어야하잖아요."
시아는 두부를 썰더니, 팔팔 끓고 있는 찌개에 넣었다. 구수한 냄새가 나는 걸로 봐선 된장찌개를 끓이고 있는 듯했다. 빙긋 웃어보인 서준이 시아의 왼쪽 볼에 가볍게 쪽, 입맞춤을 남겼다. 그러고도 부족한지, 오른쪽 볼과 목 뒷선, 턱까지 모두 쪽쪽, 간지러운 입맞춤을 날렸다.
"뭐, 뭐해요."
움찔, 몸을 떨던 시아가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서준을 바라보았다. 씩, 웃고 있는 얼굴이 시야 가까이로 들어오자, 입술이 꾹 깨물어졌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을거라고, 시아는 생각했다. 제 얼굴을 바짝 들이댄 서준이 시아에게 입을 맞추었다. 깊게 들어오는 서준을 느낀 시아가 눈을 질끈 감았다. 쿵쾅쿵쾅 울리는 심장이 곧 터질 듯했다.
키스는 끓고 있던 된장찌개가 넘치고 나서야 끝이 났다. 헉헉, 참았던 숨을 내뱉는 시아를 보던 서준이 큭큭 웃음을 터트렸다. 연애한지 몇년째인데도, 시아는 늘 이렇게 키스가 서툴렀다. 키스를 할때마다 온 몸이 빳빳하게 굳고, 숨을 꾹 참은 탓이었다. 그럴때마다, 서준은 시아의 허리 부근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숨 쉬어. 라는 말을 건넸다. 꼭 키스를 많이 해본 사람처럼 말이다.
"왜 웃어요!"
손등으로 입술을 닦아낸 시아가 눈을 흘겼다. 키스에 서툰 자신과 다르게, 능숙한 서준이 못마땅한 눈치였다. 휙, 뒤를 돈 시아가 신경질적으로 파를 썰었다. 탁탁, 도마를 내리치는 손길을 보아하니, 단단히 화가난 듯 보여 또 다시 웃음이 튀어나왔다. 하여간, 귀엽다니까, 진짜. 볼을 씰룩거리던 서준이 또 다시 시아의 허리를 잡아 당겨 제 품에 안았다.
"좋아서 그랬어."
"……."
"니가 너무 좋아서."
참 할말 없게 만드는데 뭐가 있는 사람이었다. 움찔 몸을 떤 시아가 고추를 썰려다가 그대로 멈칫했다. 발갛게 달아오른 귓가가 뜨거운 탓이었다. 오늘따라 왜이리 심장을 떨리게 만드는건지, 연애한지 오래되었음에도, 시아에게 서준은 늘 설레는 사람이었다.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말이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시아는 부끄러움에 입을 꾹 닫았다. 언제나, 제 감정을 표현하는건 한없이 힘들기만 했다. 저도 서준처럼 말을 잘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게 생각처럼 되질 않아,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시아는 다시 파를 썰었다. 서준은 여전히, 시아의 뒷목 부근에 입술을 묻고 있었다.
저녁 식사는 완벽했다. 서준은 시아가 숟가락에 밥을 뜰때마다, 김치나, 고기 등의 반찬들을 밥 위에 올려주었다. 하지 말라고 말해도, 서준은 요지부동이었다. 내가 해주고 싶어서 그런거야, 씩, 웃는 얼굴도 설레기만 해 그리 밉지 않았다. 시아는 밥을 먹는 내내, 목 끝까지 차오른 행복을 꾹꾹 참아냈다. 표현하기엔 부끄러웠고, 내뱉기엔 아까웠으니까.
잠자리에 들기 전, 침대를 정리하던 서준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생각에 발갛게 달아오른 귓볼을 매만졌다. 혼자 뭘 상상하는건지, 코 까지 쓱 문대는 모습이 영 이상했다. 시아는 그런 서준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젓고는 침대 위에 철푸덕 쓰러졌다. 그리곤, 이불을 끌어다가, 머리 끝까지 덮어버렸다. 일부러, 서준을 골탕 먹이려는 것이었다.
"어? 자게?"
"그럼 자야지 뭐해요?"
이불 속에서 말한 탓에 시아의 목소리는 웅웅 울리는 것처럼 들렸다. 멍하니 서있던 서준이 어깨를 축 늘어트리곤, 이불 속의 시아를 손가락으로 꾹꾹 찔렀다. 움찔 움찔 몸이 떨리는걸 보면 자는 것 같지는 않은데, 다 알면서도 이러는건지, 아니면 진짜 모르는건지, 속사정을 알 수가 없어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자는거야?"
서준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침대 맡에 앉았다. 차근차근 쌓아왔던 기대가 와장창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왜요?"
잠시 뒤, 이불을 휙 걷은 시아가 서준을 향해 물었다. 화들짝 떨린 몸이 할 말을 찾기 위해 애를 썼다. 눈을 도록도록 굴리는걸 보니, 서준은 꽤 당황한 듯 보였다. 시아는 목끝까지 차오른 웃음을 꾸역꾸역 참아넘겼다. 서준의 반응이 너무 재밌던 탓이었다.
"어? 아니, 우리 오랜만이기도 하고……."
말끝을 흐린 서준이 괜히 코를 쓱 문댔다. 난감할때마다 하는 서준 특유의 행동이었다. 물끄러미 서준을 올려다보던 시아가 다시 이불을 휙 덮었다. 하마터면, 웃음이 튀어나올 뻔했다고 생각했다. 씰룩거리는 볼이 힘겹게 웃음을 참아냈다. 이거 너무 재밌잖아?
사실 시아는 서준의 의중을 다 파악하고 있었다. 뭘 기대하고 있는건지도, 서준이 왜이리 쩔쩔매는건지도 말이다. 하긴, 저렇게 티를 내니, 모를래도 모를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시아는 서준을 골려주고 싶었다. 아까 전 키스 할때 웃은 것도 좀 얄밉기도 했고, 장난을 칠때마다 난감해하는 그 표정이 귀여워서 그런 것도 있었다. 흠흠 목을 가다듬은 시아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 아이스크림 먹고 싶은데."
"어?"
"……."
"내, 내가 금방 사올게!"
눈을 동그랗게 뜬 서준이 금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패기를 보아하니, 시아가 원한다면 달이라도 따다줄 기세였다. 시아는 침대위를 데굴데굴 구르며, 큭큭 웃음을 터트렸다. 어느새, 서준은 편의점으로 달려간 뒤였다.
*
선경은 오랜만에 성범죄 수사팀 사무실로 향했다. 팀장인 상혁은 민식의 간호만 해도 충분하다며, 사무실에 나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지만, 일에서 손을 떼니 신경쓰이는게 많아 결국 사무실까지 오게 된 상황이었다.
운이 좋게도, 강민혁은 깨어났다. 하지만, 선경이 눈을 떴을땐, 침대는 텅 비워져있던 상태였다. 놀란 선경이 다급히 간호사를 찾아가 강민혁의 행방을 물어봤지만, 그때마다 돌아오는건 어디갔는지 모르겠다는 답들 뿐이었다. 한숨과 함께 돌아선 시아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래, 이제는 신경쓰지 말자라고 생각하면서.
푹, 한숨을 내쉰 선경이 힘겹게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늦은 시간 탓인지, 사무실은 거의 텅텅 비워져있었다. 제 자리로 향하던 선경이 문득 느껴지는 인기척에 뒤를 돌았다.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던 시언이 그대로 멈칫했다. 허공에서 어색한 시선이 마주쳤다. 선경은 꾸벅 인사를 건넸다.
"아, 안녕하세요."
"그래."
휙, 고개를 돌린 시언이 망설임 없이 뒤를 돌았다. 그리곤, 곧장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누가 봐도, 선경을 피하고 있다는 것이 다 티가났다. 쾅, 문이 닫히자, 선경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굳게 먹은 마음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럴때마다 늘 상처를 받았다. 시언이 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걸 알면서도, 그랬다. 참 바보 같은 짓이었다.
붉게 달아오른 눈가를 손바닥으로 꾹꾹 눌렀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흐를 것 같아, 억지로 침을 삼켰다. 시언의 냉정한 모습은 한두번 본게 아님에도, 요즘들어 더 상처를 받는 듯했다. 기대하고 있던걸까? 선경은 제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냉정한 머릿속이 답했다. 네 주제에 무슨 기대야.
선경은 무너져내리듯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삐걱이는 의자 소리가 오늘따라 더 크게 귓가를 울렸다. 푹푹 한숨만 내쉬던 선경이 책상 서랍을 열었다. 평소엔 잘 보지도 않던 거울을 꺼내 제 모습을 비춰보았다. 뚱뚱한 몸과 못생긴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눈물이 핑 돌았다.
"나 같아도 안좋아하겠네……."
작게 중얼거린 목소리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선경은 거울을 다시 책상 서랍에 넣어두었다. 시언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처 받은 마음이 뜨거운 피눈물을 흘렸다. 오늘도, 제 짝사랑은 힘겹기만 했다.
*
사무실로 의문의 남자가 들어섰다. 검은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낀 남자는 주위를 두리번 거리더니, 바닥에 떨어져 있던 누런 종이봉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곤, 그 안에 뭔가를 넣은 뒤, 주변을 살폈다. 딱 보기에도 CCTV는 없는 듯했다. 씩, 웃음을 터트린 남자가 종이 봉투를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