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척도 없이 죽음이 내게 까지 성큼 다가온 것처럼 정신이 혼미해졌다. 하얀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씨라는 것 말고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간신히 지탱하면서 겨우 밖으로 나왔다. 이상했다. 그토록 미워하던 아빠인데 내 반응은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맞이한 사람의 반응과 흡사했다. 끊임없이 튀는 고장 난 시디처럼 ‘설마 아니겠지’를 무한 반복하며 서울 집으로 갔다.
눈물과 콧물 범벅이 되어 들어선 나를 맞이하는 엄마에게서는, 몇 년 만에 방문한 나를 보고 놀라워하는 표정만 있었을 뿐 큰일을 겪은 슬픔은 보이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유서가 먼저 도착하고 아직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은 아니구나 싶었다. 그렇다면 죽음을 막아야만 했다.
아빠를 부르며 집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엄마의 눈에서 조바심이 번뜩였다. 어서 내가 왜 그러는지를 알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내 소리를 듣고 방에서 나온 새언니가 숨넘어갈 정도로 깔깔대고 웃었다. 그대로 놔두면 웃느라 바닥에 데굴데굴 구를 것 같았다. 내가 충혈 된 눈을 껌뻑이며 올케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올케가 유서에 대해 알고 충격에 실성했나보다 생각한 것이었다. 내가 잡은 손아귀의 힘이 강했던 지 아프다고 하며 웃음이 정리된 새언니가 말했다.
“시아버지 유서 받고 놀랬죠? 나도 얼마나 놀랐는지...... 그것 가상으로 쓴 유서라고 적혀있는데 끝까지 안 읽었죠? 유서라는 제목에 놀라서 그냥 왔죠?”
사실이 그랬지만 어이가 없어 뒷목을 잡고 쓰러질 것 같았다. 그러나 엄마의 살핌으로 위기를 넘겼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유서가 장난이야? 아빠랑 화해하려고 마음먹었는데, 얘기하기도 전에 무슨 일 난 줄 알고 얼마나 놀랐다구! 찢어질듯 한 가슴 겨우 달리며 왔는데, 뭐? 가짜 유서?”
엄마는 내가 안쓰러워 침대에 눕길 바랬다. 새언니도 걱정되는 눈빛과 어조로 말했다.
“어머니가 아가씨에게 말했던 그 출장이란 게 죽음에 대한 가상 체험해 보는 곳이었어요. 아버지와 그이도 아가씨와 화해할 맘으로 그 캠프에 참여했나봐요. 칠일동안이래요. 내일 돌아오시면 대화를……”
잠자코 들어줄 수가 없어서 말허리를 자르고 해서는 안 될 말을 앙칼지게 내뱉었다.
"대화는 무슨! 모두 평생 볼일 없을 거예요!”
엄마와 새언니가 나를 붙잡았지만 뿌리치고 와버렸고 계속 전화벨이 울려도 받지 않았다.
아빠에게 전화 건 날의 난(亂)’에 이어 ‘아빠 유서로 인한 난(亂)’이라고 해도 됨직한 일을 겪고는 J씨를 만나러 가지 않았다. 병원에 왜 안오느냐고 J씨에게서 연락이 오면 세상의 더럽고 추한 욕이란 욕을 다 섞은 비빔밥을 전화기 저 건너의 귓속으로 떠먹여 주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그러나 상담날짜를 어긴지 닷새가 지나도록 그녀에게 단 한 통의전화도 받지 못했다. 아빠 유서로 인해 빚어진 내 정신세계의 난리통에도 J씨가 연락을 안 하는 이유가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다는 점은 미스테리였다.
상담자가 아니라 독심술사였던 걸까? 욕을 퍼부으리란 것을 짐작하고안 하는 것일까? 그놈의 병원은 고객관리를 안하나? 급기야 불똥이 다른 곳을 향해 거기에까지 이르렀다. 괜한 에너지 소모에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것 같았다.
그동안 잊고 지냈던 느낌이 다시 찾아왔다. 이와 잇몸 사이로 벌레가 스멀스멀 기어가는 것 같아 혀를 간헐적으로 돌려 윗니 아랫니를 닦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