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렵 늪에 빠져있던 나는 차츰 현실을 깨달아가고 있었다. 변함없이 매일 반복되는 학생들의 관심이 교무실 내 책상위에 우유, 커피 꽃으로 표현되어있었다. 그것을 선물하는 학생들에게 관심을 보이지 못했던 내가 반성이 되었다. 학생들에게 고맙다는 메모를 써서 책 『긍정의 힘』을 한 권씩 선물하려고 준비했다 . '선생님이 평소에 표현은 못했지만 늘 고마웠어. 늑대 울음에 늑대들이 몰리듯이 부정적인 생각에는 부정적인 일들만 일어날 수밖에 없잖니? 나도 긍정적인 생각 훈련을 하려고 읽은 책이야.. 공부하는 너에게 도움이 되길 바래.'
편지를 쓰는 것이 얼마나 따뜻한 작업인지 미처 몰랐었다. 선물에 답이 없는 나로 인해 그 아이들이 거절감을 품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반성하며 정성들여 보았다. 나처럼 각자 품고 있던 상처가 곪아 터지지 않게 몸과 영혼이 건강한 사람이 되길 바라면서 편지에 진심을 담았다. 그 즈음 그렇게 나 자신도 여물어 가고 있었다. 열세 살이었던 나의 정신이 드디어 스물여덟의 정신으로 성숙해져가는 느낌이었다. 모든 것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진정 움직이는 미프라친카치아가 싹트고 있는 것 같았다. 일상 중에도 마음을 다스리는 내 속의 나에게 활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집에도 전화해볼 용기가 다시 생겼다.
혼자인 것을 즐기던 나였기에 타향살이의 고독과 공포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두가 나와 다른 억양으로 말하고 같은 사물을 지칭하면서도 전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경상도 사람들 속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이방인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그렇게 이곳 사람들은 한 떼의 무리로 뒤섞여 나를 외면한다고 느껴졌으나 그날은 내가 그들의 무리에 섞여있는 듯했다. 낯선 대구에서 나도 왠지 진정한 대구인의 대열에 속한 것 같았다. 그날은 제법 따뜻한 공기가 감도는 초봄다운 일요일이었다. 책을 들고 ‘수성못’이라는 공원에 갔다. 봄이 찾아오듯, 그 무렵 얼굴에 혈색이 찾아오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시민들로 북적거리는 그 공원에서도 유유히 독서를 할 수 있었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J씨를 만난 이후로 변모되어지는 현상중의 하나라 생각하며 즐기기로 했다. 벤치에 앉아 온몸으로 햇빛의 따사로움을 받으며 ‘수성못’의 정취(情趣)를 느끼고 있었다. 공원을 그린 풍경화에 나도 한 흔적으로 존재할 것이라는 기쁨에 젖어있었다. 코끝에 와 닿는 봄의 기운과 내 시선이 고정되어있는 『명언집』의 기운이 같다고 느껴졌다. 그건 바로 푸릇한 싱그러움이었다. 그 때 자박자박 발걸음 두 개가 내가 앉아있는 벤치 근처에서 멈췄다. 손바닥을 펴서 봄 햇살을 살짝 가리며 눈을 들었다. 햇살이 손가락 사이로 눈앞에서 부서지자 서로 팔짱을 낀 남녀가 눈에 들어왔다.
“여보야, 우리 동내에 손수레 끌고 박스 주우러 다니는 할매 기억나제?
그 할매가 어제 낮에 초인종을 누르는 기라.
인터폰으로 보면서 왜 그카냐고 했는데 대문 앞으로 나와 보라카는 기야.
어르신이니까 귀찮았지만 나갔더니 우리 집 앞 박스에서 발견 했다카믄스
만 원짜리를 주시는 기야.
고맙기도 하고 측은한 맘이 들어서 그냥 쓰시라켓는데
공짜는 싫다 카면서 주고 가시는기야.
얼굴 찌푸리고 있던 내가 얼마나 부끄럽던지.”
힘겹게 손수레를 끌고 다니는 그 할머니를 나도 알고 있었다. 행여나 그 할머니의 지저분함이 묻어 올까봐 나 역시 피해 다녔었는데 마음만은 그 누구보다도 깨끗하고 향기 나는 분이시구나 싶었다. 다음에 마주치면 활짝 웃어 드리고 싶어졌다.
그리고 J씨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져서 집에 도착하자마자 편지지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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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선생님에게.
‘나이 먹으며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계속 줄어드는 반면 시간의 가치는 더욱 높아진다. 삶 속에서 시간은 매우 중요하다. 삶을 이루고 있는 것이 바로 시간이기 때문이다.’
-다닐 그라닌의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 중에서.
나이와 시간은 같은 속도로 간다는 우스갯소리가 생각나네요. 그리고 시간은 언제나 흐르는 물과 같이 흘러가 버린다는것도 씁쓸하게 다가오구요. 혼자 사색할 때도 누구를 만날 때도 소중하지 않은 시간이 없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네요. 시간에 지배당하지 않고 시간을 경영하는 마음으로 살아야겠어요. 그래서 결심을 하나 해요. 시간이 더 흐르기 전에 아빠를 한번 찾아뵈어야겠어요. J선생님 응원해 주세요.
윤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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