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낮선 기분을 즐기려는 찰나 핸드폰이 ‘쇼스타코비치의 왈츠’를 구슬프게 흐느꼈다. 핸드폰을 달래려고 손을 뻗었다. 라벤더의 꽃말처럼 침묵을 즐기고 있던 나만의 세상을 방해하는 이는 수다스러운 언니였다. 달갑지 않았지만 이미 찬물이 끼얹어진 내 무드는 욕조의 부글거리는 거품 아래로 빠뜨려져 버렸다. 가뭄에 콩 나듯 전화 하던 언니가 하필 그때! 깊은 한숨과 함께 반갑지 않은 마음이 들통 날 수밖에 없는 건조한 어투로 심드렁하게 전화를 받았다. 연례행사처럼 연락하던 언니 역시 성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형식적인 안부도 묻지 않은 채 다짜고짜 본론으로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윤식이 때문에 미치겠다.”
나도 그 태도에 질 새라 늘 그랬듯이 냉소적인 말투로 대꾸했다.
“오빠 땜에 속상했던 적이 한두 번인가?
오빠 땜에 미칠 것 같을 때마다 미쳐서 드나들었으면
정신병원에서 VIP로 인사 받아야 했고,
죽을 것 같을 때마다 죽었으면 도대체 몇 번째 환생이게?
아, 상조회사에서는 명단이 단골리스트에 오를까 블랙리스트에 오를까?”
“ 창피해서 다른데다 말 못하고 그래도 동생한테
하소연하려고 전화한 건데 인정머리 없게!너무하네!”
내 등에 찬물을 끼얹듯 언니가 싸늘하게 말했다. 오싹함을 느껴 옷을 서둘러 벗고 따뜻한 욕조 속에 몸을 담궜다. 계속된 언니의 하소연은 처절했다. 다른 때의 수다스러움과는 뭔가 달랐다. 정신과 치료를 받는 중이라 듣는 내 상태가 달랐는지 언니의 하소연 내용이 달랐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분명한 것은 언니 얘기를 듣는 중에 또 다른 나를 보는 것 같다고 생각되어 맞장구쳐줬다는 것이다.
“ 빌려간 돈 얘기만 하면 돈 없다고 죽는 소리 하면서
뭘 그리 사치를 해대는지 몰라.
아 맞다! 그녀석이 수 쓴 것 말해줄게.
저번에 빌려준 돈을 약속했던 날 딱 갚고 이자까지 주길래
그녀석이 정신 차렸나 싶었어.
그렇게 생각하던 중에 사업한다고 큰돈 또 빌려 달라더라.
저번에 잘 갚은 것은 기특하지만 너무 큰돈이라 안 된다 했지.
돈을 개처럼 끌어다 물처럼 쓰던 윤식이가 결혼하고는
정신 차렸나본데 도와주지 그러냐는 아빠의 말에
그이를 겨우 설득해서 빌려 줬어.
그런데 세달 후에 갚겠다더니 이자는 고사하고
원금마저 일원도 안 주고 버티네.”
오빠의 이야기도 짜증나는데 오빠를 전적으로 지지하는 아빠의 언급에 치가 떨렸다. 뇌 속의 혈관은 수만 볼트의 전류로 터질 것 같았고 새어나온 전류는 욕조의 물을 타고 온몸을 감전시키는 것 같았다. 쭈뼛거리는 뒷목을 욕조 머리맡에 기대고 언니마음을 이해하고도 남는다는 듯 애매한 웃음소리를 전화기 너머로 흘려줄 수밖에 없었다. 오빠와 아빠에 대한 분노를 내가 얘기해야할 터인데 오히려 언니의 한탄을 듣고 있자니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기실 근거는 없지만 언니를 공감할 대상은 나뿐이라는 생각에 전화를 끊을 수 없었다. 언니도 이미 알고 있을 하나마나한 말을 위로랍시고 했다.
“오빠가 수 제대로 썼네. 작은 돈 잘 갚은 것을 미끼로
큰돈 빼 먹기! 미끼에 제대로 걸려들었구먼!”
“그러게. 워낙 한 번도 믿음직한 일을 한적 없는 놈이라
빌린 돈 제날짜에 갚은 지난번 일이 그렇게 장하더라고.
내가 미쳤지…….
속 뒤집히는 사건이 더 있어.
걔네 방을 영화관처럼 꾸미고 ‘무안경 3D TV’를 설치했더라.
그리고 올케는 운전면허 땄다고 새 차 뽑았어.
할부로 했다 해도 우선순위를 모르는 거지.
없는 처지에 돈 생기면 빌린 돈 갚아야지 할부 낼 일이냐고!
집에서 살림만 하는 올케한테 차가 꼭 필요한 것도 아니고
꼭 그 TV를 봐야하는 것도 아니지 않니?
그 두가지 다 없어도 사는데 지장 없잖아.
부모님 모시는 얌전한 며느리 얻었다고 좋아했는데
윤식이랑 똑같은 골칫덩이야.”
오빠와 새언니지만 쌍으로 재수 없는 것들이라는 생각에 욕이 목구멍까지 찬 것을 겨우 누르며 ‘유유상종! 부부 일심동체! 잉꼬 부부 탄생!’ 이라는 정도의 말로 인간됨의 도리만 지킬 경계선에서 비웃음을 흘려보냈다. 여기까지는 어쨌든 순조로운 통화였다. 그러나 내가 맞장구 쳐주기 위해 오빠부부를 비꼬듯 말한 ‘잉꼬부부 탄생’이라는 말을 언니는 덥썩 물어 화살을 겨냥 했다.
“그건 그렇고, 넌 잉꼬부부 될 남자 찾는 노력은 하니?”
대답할 가치를 못 느껴 무시하고 있는 나에게 언니의 일장연설이 이어졌다.
“너 28살까지 한 번도 연애 못해본 거 심각한 거다.
28살에 2자 붙었다고 꽃띠인줄 아니?
반올림, 아니 그냥 올림해도 서른이다 얘!”
의미 없는 호응도 아까워서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J씨와 상담을 몇 차례 했던 효과였을까? 내 얘기를 들어주던 J씨처럼 언니를 공감해주려 했었다. 그런데 나에게로 불똥 튄 대화에 나의 호의는 수포로 돌아가 버렸고 진물과 곰팡이로 썩어가고 있었던 상담받기 전의 내가 나병환자(癩病患者) 같은 얼굴로 찾아왔다. 내게 상처 준 그들을 내던졌듯 핸드폰을 욕조 밖으로 내던지고, 늘 화려한 네일아트를 하고 있던 긴 손톱으로 흉측한 내 과거의 얼굴을 할퀴며 비명을 질렀다. 부들부들 떨며 양털처럼 포근할 것만 같은 하얀 거품 속으로 머리를 숨기듯 잠수했다. 숨이 막혀 오는 것을 느낄 때 쯤, 새장 속에 갇힌 미프라친카치아도 숨넘어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장 때문이든 빨간 가시 줄기 때문이든 숨통은 항상 막혀 있을 것 같은 그 식물과 내가 동일시되어서 생각난 것이었을까? 병원에서 미프라친카치아를 처음본 날, 그 식물은 사람의 영혼을 가졌고 나는 식물의 영혼을 가졌다고 생각했던 것도 떠올랐다. 과거 고통의 물속에 빠져 허우적댈 때 아무도 건져 주지 않았던 까닭에, 물 밖이나 물속이나 내 숨통이 조여 오는 것은 매 한가지였다. 내게 상처 주던 이들로부터 나를 내 스스로 보호하느라 다른 사람 자리에 가시를 심어버렸었던 지난날들의 아픈 기억에 사로 잡혀 잠수가 길어졌다. 아니, 짧게 잠수하는 동안 빠른 속도로 회상이 스쳤는지는 모를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