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여태 설명 다 들었으면서 뭔 딴소리입니까?”
나는 짜증이 조금 났다. 그러자 시장 카디오는 우울한 얼굴을 했다.
“나는 무지칸 총통의 신도시 건설 공고를 보고, 간접 선거를 통해 시장이 된 사람입니다.”
갑자기 왜 자기 신상 이야기람? 나는 짜증이 났지만 들어줬다.
“원래 이곳에는 그럴듯한, 블루종 도시의 위성 도시 역할을 할 신도시가 들어설 예정이었습니다.”
“음.”
그랬지. 기억난다. 총통 무지칸에게 새로 도시를 하나 개척하라고 지시했었다.
“그런데 진행 도중에 갑자기 취소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회색의, 공허한 텅 빈 도시만 만들어지고 말았죠.”
카디오는 울상을 지었다.
“도시가 지어지다 만 이유가 뭡니까?”
“정확한 이유는 모릅니다. 몇 번이고 총통 각하께 편지를 보냈지만 수신 거부 판정을 받았지요. 그래서 추측만 해봤습니다.”
카디오는 위스키를 벌컥벌컥 마셨다.
“사실 이 도시는 무지칸 총통의 오른팔이던 초월마도사 퀀텀 코어시커의 계획으로 추진되던 곳이었는데, 그 퀀텀 코어시커가 어떤 불미스러운 일로 더 이상 코어월드에 접속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그래서 무지칸 총통은 모든 의욕을 잃고 성인용 컨텐츠만 즐기며 다음 총통 선거까지 자리만 보전하고 있다고 합니다.”
“으음……!”
그랬던가. 하긴 무지칸은 새로 도시를 짓는 일에 대해 미온적이었고, 우유부단했다. 사실 그는 총통이 되고 싶지도 않아했었다. 그래서 나는 그를 총통으로 앉혔다. 그리고 퀀텀 코어시커였던 나는 불미스럽게 퇴장했고…… 무지칸은 의욕을 완전히 잃어버린 채 총통 자리만 차지한 상태인가.
“노워니아 공화국은 부강하기 때문에 당장 총통이 통치를 대충대충하더라도 크게 문제는 없지요. 하지만 내부적으로 조금씩 끓어 오르고 있습니다. 전사 길드의 그랜드 마스터인 ‘테드’는 제국과의 결전을 벌이자는 주전파의 수장이 되었고, 한때 초월마도사의 부하였고 지금은 관리부 장관인 흑마법사 바알투스와, 마찬가지로 초월마도사의 부하였던 제니스 마법연구부 장관이 경쟁하고 형국이라고 합니다.”
“허허.”
“웃을 일이 아닙니다. 노워니아 공화국은 서서히 무너지고 있어요. 다음 총통 선거인 3개월 뒤. 문제점들이 팍팍 터져 나올 겁니다. 그리고 3개월 뒤에 내가 시장을 그대로 하고 있다는 보장도 없겠지만.”
카디오는 위스키를 마저 마시다가 위스키병이 텅 빈 걸 보고 한숨 쉬었다. 그리고 내가 선물로 내밀려고 했던 위스키를 보았다.
“그거, 안 마실 겁니까?”
“내가 먼저 마시고 드리죠. 그럼 뇌물이 아니니까.”
나는 위스키를 잔에 가득 담아 마시고, 그 다음 니콜 로마키에게 한 잔 권한 뒤, 반쯤 남은 위스키 병을 카디오에게 줬다. 주면서 물었다.
“카디오 시장님은 권력이랑 돈 중에 뭐가 더 좋습니까?”
“돈이오.”
카디오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나는 만족했다.
“그럼 됐습니다. 같이 시립 카지노 합시다. 노워니아 공화국 장관이 1년에 버는 것보다 더 많이 챙겨드릴 테니까.”
“후우, 그러죠. 어차피 중앙 청사에서 일하긴 글렀으니.”
카디오는 위스키를 병째 마셨다.
카디오는 술에 뻗어서 집무실 소파를 침대로 이용했고, 나와 니콜 로마키는 시청을 나왔다.
“길드 마스터?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이려고 하는 거죠? 귀띔 좀 해주시죠.”
니콜 로마키가 말했다.
“다 들었잖아? 돈을 모으기 위해서야. 자세한 건 직접 보라고.”
나와 니콜 로마키는 길드 본부로 돌아갔다. ‘산맥의 뿌리’로 사냥과 채집을 하러 간 자들은 돌아와 있었다. 방금 돌아온 것처럼 보였다. 다들 만족스러워 하며 서로 격려와 농담을 주고 받고 있었다.
“당현준 비서실장? 보고하도록.”
“총 35마리의 버섯돌이를 죽였고, 26개의 버섯돌이의 포자라는 아이템을 얻었다.”
“고무적이군. 35마리씩이나 죽이다니.”
“저 3인방의 역할이 컸다.”
당현준이 턱짓으로 3인방을 가리켰다. 길드 취임식 때 나에게 도전했던 중학생 도적 페르디도, 흰색 로브의 성직자 레이시아, 흑인 마법사 시리우스다.
“너한테 패배하고 나서, 세 사람은 뭔가 느낀 게 있나봐.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상을 입었지만, 저 세 사람은 긁힌 상처도 없이 버섯돌이들을 죽였다.”
“호오. 훌륭하군.”
나는 길드 본부로 돌아오고 나서야 긴장을 풀고 기뻐하는 페르디도, 레이시아, 시리우스를 보았다. 저 세 사람을 주요 전력으로 키울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내가 레벨 50이 될 무렵, 저 세 사람도 그 정도 수준으로 높여둬야겠어.’
“크고 작은 부상자들은 드루이드와 성직자 길드원들한테 치료 받았다. 그러므로 실질적 손해는 없다…… 라고 하고 싶지만, 아이템 내구도 깎인 거 수리비랑 [매스 텔레포트] 스크롤 값이 꽤 들긴 할 거야.”
“그 정도는 길드 자금으로 해결하지. 아차차, 여태 안 물어보고 있었는데, 우리 길드 자금은?”
“없어.”
“얼마나?”
“전혀 없다는 뜻인데.”
“아니, 무슨 길드가 이래?”
“데이나 님이 주먹구구식으로 만든 길드니까. 전에도 몇 번 말했지만, 현실 세계에서도 대세 취급 받는 코어월드에 영향력을 행사할 길드가 전혀 없으면 곤란하므로 명목상 하나 만들어 놓은 것일 뿐이야. 단, 길드에 너무 투자를 했다간 나중에 골치 아파져. 그래서 데이나 님이 죄다 관리했지. 그러므로…….”
“길드 자금 같은 건 없다?”
“애초에 길드 전용 통장조차 없다.”
“제기랄, 할 일이 많군. 일단 너는 힘 좋은 부하들 데리고 블루종 도시로 가서 연금술 세트랑 재료 좀 사와. 재료 목록은 [텔레파시]로 알려주지.”
“연금술?”
“서둘러. 돈부터 받아.”
나는 당현준에게 5천만 골드를 줬다. 당현준은 더 묻지 않고 시키는 대로 했다.
당현준은 전사 몇 명 데리고 [메스 텔레포트]를 해서 블루종 도시로 갔다. 그리고 연금술 세트 열두 개와 연금술 재료들을 잔뜩 구매하게 했다. 그리고 [메스 텔레포트] 스크롤과 내가 아직 익히지 못한 저단위 주문들을 넉넉히 구매하게 했다. 5천만 골드를 어쩌면 초과했을지도 모르겠다.
잠시 뒤.
당현준과 부하들이 귀환했고, 빌어먹을 정도로 사랑스러운 컨테이너 속에 연금술 세트를 설치했다.
“좋아, 지금부터 제군들은 행운의 포션을 만든다.”
“행운의 포션?”
부하들은 웅성거렸다.
“저, 길드 마스터? 행운의 포션 같은 건 사기 아닙니까?”
마법사 시리우스가 물었다.
“그렇지. 코어월드에는 ‘행운’이라는 능력치가 없으니까. 하지만 의도적으로 확률 조작을 일으킬 순 있다.”
“그럼……?”
“궁금한가? 일단 행운의 포션을 만들자고. 만들면 무슨 소린지 알 거다. 시간이 없으니 빨리 만들어라. 재료는 다음과 같다.”
나는 허공에 [홀로그램] 주문을 써서 재료와 제작법을 알려줬다.
‘물 50mg에 와이번의 피를 50ml 섞는다. 그 상태로 10분간 끓인다. 그리고 식힌다. 식으면 단단한 젤 형태가 된다. 그것을 약한 불로 끓여서 다시 녹이고, 미리 절구에 갈아 둔 라즈베리 잎사귀 1개와 브릿츠 평야 민들레 2개, 네 잎 클로버 50개를 넣는다. 그 다음 불을 끄고 버섯돌이의 포자 1개 분량을 넣고 재빨리 섞는다. 불을 끈 냄비 속 액체가 스스로 부글거리며 구름처럼 변하면 성공.’
“다 보고 지금 외워라. 그리고 제작을 시작하도록.”
길드원들은 행운의 포션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저기, 길드 마스터. 저거 정말 행운의 포션입니까?”
최명석이 와서 물었다.
“쓰기 나름이지. 감독하고 있어. 나는 잠시 장비 좀 구매하고 올게. 니콜? 따라와. 당분간 내 경호 좀 해줘야겠어.”
나는 니콜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블루종 도시 입구를 향해 [텔레포트]했다.
“재고가 없다고?”
나는 무기 및 방어구 상점에서 혀를 찼다. 어처구니 없어 하는 사람은 나 말고도 여럿이었다.
“무기를 사러 왔는데 무기가 없다니 말이 돼?”
“누가 사재기라도 한 거임?”
“저기 뒤에 상자에 든 것들은 뭐요?”
다른 플레이어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했고, 그때마다 상점 NPC는 허리 숙여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고객님. 행정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모든 무기와 방어구는 판매를 중지하고 비축해야 합니다.”
거기까지 들은 나는 깨달았다.
“이런 경우는 전쟁 날 때 빼고는 없었는데.”
내가 한 마디 하자 주변에 있던 플레이어들이 흠칫했다.
“그거구나, 전쟁!”
“한동안 잠잠했었는데 제국 놈들하고 전쟁인가.”
“하긴. 총통이 요즘 각 도시의 전사 길드랑 용병 계약을 맺고 있다던데.”
“그럼 정말 전쟁이 나는 거군?”
“시청에 가봐야겠군!”
플레이어들은 삼삼오오 떠들며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어느새 상인 NPC와 나 혼자 남았다.
“곤란한데. 보다시피 나는 목검이랑 초보자 튜토리얼 장비뿐이라 새로 장비를 꼭 구해야 합니다.”
“죄송합니다, 고객님. 행정 명령을 무시하고 물건을 팔 수는 없습니다.”
“하는 수 없지. 다른 상점도 마찬가지입니까?”
“블루종 도시의 상점들은 다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차라리 다른 플레이어와 거래를 하는 편이 나으실 겁니다.”
“그렇겠군요.”
나는 조바심이 났다.
‘지금 전쟁이 나면 곤란한데.’
내가 하려는 카지노 사업은 사회가 안정되고 세상이 심심해졌을 때가 좋다.
그런데 공화국과 제국의 전쟁이 일어난다면?
저렙이건 고렙이건 최전선으로 뛰어든다. 명예와 경험치, 골드가 걸려 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코어월드 역사에 남을 빅 이벤트이기 때문이다.
‘전쟁이 실제로 벌어질 것인지, 벌어진다면 언제 벌어질 것인지 알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저기, 길드 마스터? 원한다면 제 아이템을 빌려 줄 수 있는데요.”
곁에 있던 니콜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됐어. 어차피 나는 당분간 싸움은 피할 생각이니까. 한동안 경호 임무를 계속 맡아줘야겠어.”
“알겠습니다.”
우리는 다시 [텔레포트]로 깁슨 도시로 돌아갔다.
“다 만들었어?”
나는 최명석에게 물어보려 했다. 하지만 최명석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없나?”
“조용하군요.”
나와 니콜은 서로를 돌아보며 어리둥절해 했다.
“큰일입니다!”
최명석이 헐레벌떡 다가왔다.
“문제가 발생했는데요.”
“누가 행운의 포션 마셨어?”
“어떻게 알았습니까?”
“유도했으니까.”
행운의 포션이라고 말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호기심 넘치는 부하 한 명이 허락 없이 마시기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누가 마셨어?”
“레이시아입니다.”
“성직자인 주제에 욕심도 많군.”
“직업은 설정일 뿐이니까요. 문제는 말이죠.”
“레이시아가 몬스터로 변했지?”
“어떻게 알았……! 일부러였군요.”
“당연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