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호오. 그래? 궁술사라.”
나는 만족스러웠다. 실력 좋은 순수 궁술사는 드물다. 혼자 몬스터를 사냥하거나 퀘스트를 깨는 솔로잉이 어려우니까. 순수한 궁술사로서 레벨이 70이나 된다면 쓸만한 전력이다.
“니콜 로마키라는 사람은 지금 어디 있지?”
“에쉬폴 산에서 사냥터 관리. 우리 길드 주요 사업은 몬스터 사냥이니까.”
“몬스터 사냥? 역시 그거냐.”
몬스터가 출몰하는 지역 중 던전이 아닌 필드를 플레이어들은 ‘사냥터’ 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런 사냥터에 나타나는 몬스터들은 평균보다 아주 조금 강한 고만고만한 녀석들이다. 하지만 이 고만고만한 녀석들을 죽이면 괜찮은 경험치와 아이템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이 아이템들 중에는 와이번 가죽이나 트롤의 피 등 수요가 높은 아이템들도 많다. 이런 것들을 한 사람이 꾸준히 사냥하긴 어렵다. 난이도 문제라기 보다는, 포션 조달과 아이템 운반, 로그아웃 등의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다. 사냥을 꾸준히 하려면 힐링 포션을 마셔야 하고, 몬스터가 남긴 아이템을 인벤토리에 가득 넣고 다시 팔아 넘기로 도시로 가야 한다. 왕복하기도 애매하다. 결국 로그아웃을 하려면 필드가 아닌 도시에 남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간과 동선 낭비가 발생한다.
그래서 집단이 계획적으로 사냥해서 아이템을 팔게 된다. 이것이 최소 규모일 경우 파티가 되고, 조금만 커지면 길드가 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중소 규모의 길드들은 필드에서, 즉 사냥터에서 몬스터 사냥을 한다. 바꿔 말하자면 고만고만한 사냥터에서 몬스터 사냥하는 것에 머물러 있으면 중소 규모의 길드라는 것이다.
게다가 문제는 또 있다. 코어월드가 역사가 유구한 게임이다보니, 기존의 중소규모 길드와 신생 중소규모 길드가 사냥터에서 충돌한다.
‘여긴 우리가 예전부터 사냥하던 곳이야. 다른 곳으로 가라.’
‘고인물은 다른 사냥터 가서 사냥하시죠? 우리도 여기서 사냥하고 싶은데.’
이런 식이다.
으름장과 알력 싸움으로 끝나는 경우도 있지만, 무력 충돌도 일어날 수 있다.
“그래서 지금 니콜 로마키라고 하는 길드원은 지금도…….”
“우리 길드의 사냥터인 에쉬폴 산 초입의 에쉬폴 숲을 지키고 있다. 다른 길드 놈들이 사냥하지 못하게 막고 있지. 오직 니콜 로마키 님 혼자서 말이야.”
당현준의 목소리는 감동으로 떨렸지만 나는 어이가 없었다.
“텃세구만. 어떻게 쉴드를 쳐줄 수가 없네. 그 니콜이란 사람은 어떻게 막고 있는 거야?”
“물론 PK지.”
“최악이네. 레벨 70 궁술사가 다른 플레이어들을 활로 쏴죽이고 있단 말이야?”
“하지만 범죄는 아니야. 일단 PK가 허용된 필드이고, 다른 플레이어들도 반격을 하니까.”
“아무리 그래도 좋게 보이진 않는데. 다른 플레이어들 레벨은 낮잖아?”
“그건 맞아. 레벨 70 궁술사 혼자서 권장 레벨 20~25인 사냥터를 지키고 있으니 좀 그렇지. 변명할 수 없어. 하지만 이것마저 잃으면 우린 고물상 일 말고는 할 게 없어.”
“고물상 일로 돈은 얼마나 버는데?”
“몇 번 말해야 알아 들어? 이 고물상 컨셉은 우리 길드가 사실 데이나 님의 길드라는 사실을 외부에 노출되지 않기 위해 만든 위장이라고. 고물상으로 돈을 벌 리가 없잖아!”
“야이 멍청아. 그럼 고물상 일조차 하지 않는 거잖아! 그런데 뭘 무게 잡고 ‘고물상 일 말고는 할 게 없어’ 라고 말하는 건데?!”
“뭐라고?! 아무리 길드 마스터라고 해도 오만하군! 멍청이 소리는 취소해!”
“제길, 열 받나? 그럼 직접 가서 이 니콜 로마키란 사람 데리고 오도록 해. 우리 길드 최강 전력인 인간을 사냥터에서 텃세나 부리고 있게 둘 수는 없어.”
“하지만 저레벨 길드원들에게는 소중하단 말이다! 요즘 사냥터 경쟁이 심해서…….”
“저레벨 길드원들을 어떻게 써먹을 지는 생각해 둔 게 있으니까 니콜 로마키나 데리고 와.”
“쳇!”
당현준은 [텔레포트]를 발동, 니콜 로마키를 데리러 갔다.
“최명석!”
나는 최명석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음. 우리 길드가 관리하는 공동묘지는 어디지?”
“깁슨 도시의 공동묘지에 임대료를 내고 있습니다.”
“최명후를 즉시 부활시키게 해. 당현준, 너, 그리고 최명후는 쓸모가 많을 것 같으니까.”
“즉시 부활은 돈이 더 듭니다. 레벨이 50이나 되니까요.”
“상관없어. 어차피 내가 죽인 거나 마찬가지니까 내 돈으로 부활시켜야지. 다녀오도록.”
나는 최명석의 인벤토리에 5000만 골드를 줬다.
“감사합니다, 길드 마스터. 로그아웃해서 동생에게 로그인하라고 시킨 뒤 부활시키겠습니다.”
최명석은 고개를 숙여 보인 뒤 공동묘지로 달려갔다. 느낌상 최명석은 이제 나를 완전히 인정한 모양이었다.
최명석이 나가고 마치 교대하듯이 두 사람이 [텔레포트]로 바이코뮤닉 길드 입구에 도착했다. 워낙 허름하고 가운데가 텅 빈 고물상 같은 곳이라 길드 입구에 서면 길드 마스터가 있는 내 모습이 훤히 보였다. 아마 그가 니콜 로마키겠지.
“저 분이 제2대 길드 마스터입니다.”
당현준이 나를 보며 니콜 로마키에게 말했다. 니콜 로마키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반가워요. 내가 니콜 로마키입니다. 니콜이라고 불러줘요.”
거대한 장궁을 등에 매고 있는 은발 숏컷 플레이어였다. 흰색에 가까운 은색 머리카락인데다가 머리카락이 여자치곤 짧아서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왠지 익숙하군. 저 이름을 어디서 들어봤더라……?’
언젠가 명성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뭐, 순수 궁술사로 레벨 70을 찍었다면 그녀의 저격술은 믿어도 되겠지.
“반갑다. 나는 니크나메 퀀텀. 바이코뮤닉 길드의 길드 마스터다. 충성 서약을 하지 않았더군.”
내가 무뚝뚝하게 말하자 니콜은 부드럽게 웃으며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았다.
“미안해요. 초대 길드 마스터의 명령대로 사냥터를 지키느라. 다만, 충성을 맹세하기 전에 한 가지만 물어도 될까요?”
“뭐든지 물어도 좋다.”
“길드 마스터로서의 포부에 대해 묻고 싶군요.”
“과거의 내 부하였던 동부 공화국의 총통을 다시 부하로 삼는다. 그리고 서부 제국의 4공작, 12백작, 24남작을 부하로 삼고, 더 나아가 내가 황제가 되거나 내 동료나 옛 부하, 또는 제군들 중 하나를 황제 자리에 앉힌다. 물론, 그 이전에 모험가 협회 회장이 되거나 바이코뮤닉 길드 제군들 중 하나를 회장으로 만들어야겠지. 그리고 나는 전사 길드, 마법사 길드, 도적 길드의 그랜드 마스터가 된다. 미리 말하지만 3대 코어 길드의 그랜드 마스터 자리는 일단 내가 먹을 거다. 이 부분은 양보 못한다는 걸 미리 통보하고……. 그 다음 나는 성직자가 아니니 제군들 중 성직자 한 명을 만신전의 대사제를 만들어야겠지. 직업이 성직자인 사람들은 나중에 따로 면담을 갖도록 하지. 뭐, 방금 말한 것들을 다 달성하고 나면? 그 다음에 코어마스터에게 재도전할까 생각 중이다. 큰 그림은 이렇다. 이상.”
곁에서 듣고 있던 당현준은 입을 조금 벌린 채 멍한 표정이었고 니콜 로마키는 으음, 소리를 냈다.
“……엄청나군요.”
“뭐, 대략적인 계획이니까 조금은 오차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남들 앞에서 함부로 떠들면 곤란해. 저레벨 길드원에게도 함부로 가르쳐 주진 말도록.”
“알겠습니다, 니크나메 퀀텀. 한 가지만 묻겠다고 했지만 한 가지 더 물어야겠어요.”
“몇 개든 좋다. 질문해.”
“혹시 퀀텀 코어시커랑 무슨 관계죠?”
“호오, 그를 알고 있나?”
“그를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나는 그대가 퀀텀 코어시커가 새로 만든 캐릭터라고 생각해요.”
“왜지?”
“그야, 캐릭터명이 비슷하고, 오만한 성격에, 계획 세우는 걸 좋아하는 방침까지 퀀텀 코어시커와 닮았기 때문이죠.”
“허허. 명쾌하군. 좋을대로 생각하시오.”
“……나, 니콜 로마키는 그대에게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좋아. 어려운 부분은 하나 끝났군. 그럼 지금 바로 부탁 하나를 들어줘야겠어. 이 깁슨 도시의 시장에게 가서 회담 신청을 하고 오도록.”
“회담 신청?”
“그래. 시장에게 가. 심각한 건 아니고, 시청에 길드 단위의 지원금을 내고 싶다고 말하고 오도록. 자세한 건 내가 직접 내방하겠다고 말해. 지금으로부터 72시간 이내라면 언제든지 좋고 가급적 빨리.”
“그런 일에 왜 하필 내가 가야 하는지 물어도 될가요, 길드 마스터? 회담 신청이야 누가 가도 되는 거 아닌가요?”
“그야 당신이 레벨 70이니까. 허름한 도시지만, 그래도 한 도시의 시장인데 높은 수준의 레벨과 미모를 겸비한 사람이 가는 편이 좋겠지. 레벨 70인 당신이 가야 시장은, 내가 이번 회담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느낄 거야.”
“그렇군요. 레벨 높고 이쁜 게 죄였군요. 그럼 다녀오죠.”
니콜 로마키는 깁슨 도시의 시장을 만나러 떠났다. 그리고 교대하듯이 최명석과 최명후가 왔다. 최명석의 표정은 밝았지만 최명후의 표정은 더러웠다.
“여어, 부활하니 기분이 어떤가?”
나는 밝게 물었고, 최명후는 침을 옆으로 뱉었다.
“씨발 놈아. 네놈이 언제부터 우리한테 반말하기 시작했어? 네놈이 길드 마스터라는 건 인정 못해.”
그게 최명후의 유언이 되었다.
빠직!
내 목검이 최명후의 면상을 갈겼다.
빠지지직!
[라이트닝 볼트]가 최명후의 심장을 노리고 꽂혔다.
화르르르륵!
[파이어 필라]로 생성된 불기둥이 최명후를 덮쳤다.
치잉! 파악!
[아이스 스피어]는 최명후의 복부를 꿰뚫은 채 길드 부지 바깥까지 날아갔다.
최명후는 길드 부지 바깥에 털썩 쓰러져 죽었다.
“미안, 최명석. 나는 내 면전에 대고 욕하는 놈하고 친해지려 노력할 만큼 시간이 없어.”
“괘, 괜찮습니다. 나중에 제가 잘 가르치겠습니다. 일단 당장 부활시키진 말도록 하죠.”
“그래? 음, 그럼 그렇게 하자. 그럼 너는 애들 좀 본부 안으로 모아줘. 시킬 일이 있거든.”
“옛.”
최명석은 부하들을 집합시켰다. 그동안 나는 경험치를 확인했는데, 아쉽게도 최명후는 충성만 맹세하지 않았을 뿐 바이코뮤닉 길드 소속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를 죽여도 경험치를 얻지 못했다.
“아쉽네.”
나는 자랑스러운 길드 건물, 컨테이너 박스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부터 제군들에게 임무를 맡기겠다. 제군들은 지금부터 메드나 산맥으로 간다. 그리고 사냥을 시작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몬스터를 사냥해야 하냐면…….”
부하들의 시선이 내 입에 모였다.
“바로 ‘버섯돌이’라는 몬스터다.”
“버섯돌이……?”
“그렇다. 생소하겠지? 하지만 끝없이 증식하는 버섯돌이들은 오직 메드나 산맥의 ‘산맥의 뿌리’라는 던전에만 존재한다. 제군들은 그 버섯돌이들을 주기적으로 죽이고, 그 포자를 수확해 와야 한다. 경험치보다는 그 희귀한 포자 확보가 최우선 목표다. 질문 받는다.”
“난이도는 어느 정도입니까?”
“어렵지 않다. 어차피 여러분 대부분이 가니까.”
“다른 길드의 텃세 같은 건 없을까요?”
“거긴 히든 던전이다. 가끔 궁술사들이 퀘스트 깨러 메드나 산맥 근처에 출몰할 뿐이다.”
“거리는 얼마나 멉니까?”
“꽤 멀지. 그러니 마법사들은 [매스 텔레포트] 스크롤을 여러 개 지참하고 가야겠지. 당현준 비서실장이 지급해 줄 것이다.”
“동굴 같은 던전에서는 [텔레포트]가 안 되지 않습니까?”
“클리어된 던전에서는 사용 가능하다. 이미 나와 당현준 비서실장, 최명석, 그리고 최명후의 협조로 그 던전은 확실히 클리어하고 왔다. 그곳의 보스였던 카네기우스는 죽었으니 심각한 위험은 없다. 그리고 cleared 판정 받은 던전이니 비상 탈출에 대한 우려는 접어두도록.”
“오오!”
부하들은 감탄했다.
“질문이 없나? 그럼 우리 전원은 [메스 텔레포트]로 사냥하러 갈 것이다. 준비 시간은 5분주겠다. 5분 뒤 집합!”
“5분 뒤 집합!”
길드원들은 우당탕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처럼 대규모 사냥인데다가, 늘 사냥 하던 곳이 아닌 새로운 히든 전전에서의 사냥이라고 하니 들뜬 모양이다. 길드원들의 의욕이 넘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훗. 그리운 느낌이군. 이 맛에 길드 마스터 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