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코어월드 역사상 코어월드 전체를 정복한 자는 한 명도 없었지. 그래, 맞아. 그리고 나는 역사의 새로운 장을 덧붙일 예정이다. 제군들은 이미, 코어월드 역사의 일부가 되었다. 이 시간부로 제군들이 한 말과 행동에 대해, 코어월드의 수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니 미리 경고한다. 치사한 짓은 하지 마라. 가령, 인사하러 온 사람의 머리에 종이를 뭉쳐서 던지는 것 같은 행동 말이다.”
몇몇 길드원들이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또 말하지만 나는 뒤끝이 아주 강한 인간이다. 솔직히 용서라는 걸 해본 기억이 없다. 그러니 용서를 기대받을 상황을 만들지 말도록. 그런 상황만 잘 피한다면, 그리고 내 명령을 잘 따른다면 제군들은 나와 함께 위대한 영광을 쟁취할 수 있을 것이다. 위대한 영광이 뭐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서 말하자면, 뭐, 돈과 명예와 권력이다. 질문 있나?”
세 명이 손을 들었다. 나에게 파이어 볼트로 반격 당한 도적 성직자 마법사 녀석들이다. 나는 웃음이 나오는 걸 참고 엄격한 얼굴 표정을 지었다.
“왼쪽부터 순서대로 질문을 받지. 질문자는 이름을 밝히도록.”
그러자 내 기준에서 맨 왼쪽에 있던 도적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중학생 나이로 보였는데, 이목구비가 뚜렷해서 애송이처럼 보이진 않았다.
“예, 저는 레벨 34 도적인 페르디도라고 합니다. 니크나메 퀀텀 님이라고 하셨나요? 레벨이 몇이나 되시죠?”
“총합 레벨은 41이다.”
“41이라. 흐응. 상당히 애매한 숫자군요. 레벨 40대인 플레이어는 코어월드에 넘치지 않습니까? 그런데 코어월드를 정복한다고요? 너무 무모한 호언장담 아닐까요?”
“응, 아냐. 다른 질문 있나?”
“그, 그런 건 대답이라고 할 수 없죠. 분명하게 대답해 주십쇼.”
“아, 그래? 분명한 대답을 원해? 너는 코어월드 정복이 무모한 호언장담 아니냐고 물었지? 다시 분명하게 대답한다. 코어월드 정복은 무모한 호언장담이 아니다. 됐나?”
“큿……. 증명 가능합니까?”
“실력으로, 길드 운영으로 증명할 생각인데. 물론 전제 조건이 있다. 너희가 나를 길드 마스터로 제대로 인정해야겠지. 그러니 앞으로 잘 부탁한다. 명령 불복종했다가 내 패업을 이루는데 방해가 되면 곤란하니까.”
“그…….”
“그런 식으로 해서 마음을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나요?”
흰색 로브를 입은 여자 성직자였다. 나는 그쪽을 돌아보았다.
“이름은?”
“레벨 35 성직자 레이시아입니다.”
“레이시아? 내가 원하는 건 너희들의 마음이 아니라 실제 기능이다. 마음이 어떻건 내가 공격하라고 하면 공격을, 첩보 활동을 하라고 하면 첩보 활동을 하길 바라. 나는 속마음은 전혀 관심 없다. 됐나?”
레이시아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하하하하!”
마법사가 웃었다. 젊고 팔다리가 길며 근육이 빈틈없는 흑인이었다. 코어월드의 매력은 바로 이런 부분이다. 외국인이 외국어로 말해도, 코어월드의 대화 시스템은 자동 통역해서 알려준다. 입모양과 목소리가 조금 맞지 않긴 하지만.
“뭐가 웃기지?”
“하핫. 저는 레벨 36 마법사 시리우스라고 합니다. 이제 보니 무척 시원시원한 길드마스터 예정자였군요.”
“고맙군. 다만 예정자가 아니라 길드마스터야.”
“아직은 아닙니다. 저희들이 길드마스터에 대한 ‘충성’을 하지 않았으니까요. 길드마스터의 권리 이양은 아직 완료되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당신은 명목상 길드마스터라는 명칭만 전임 길드마스터이신 데이나 님으로부터 이어받았을 뿐입니다. 즉, 길드마스터 타이틀만 지니고 있을 뿐입니다.”
“흠.”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인 뒤 당현준을 보았다. 그러자 당현준은 시리우스의 지적이 맞다는 고갯짓을 해보였다.
“그랬군. 그리고 보아하니 충성을 맹세할 수 없다고 말하려는 거겠지?”
“현재로선 그렇습니다. 실력을 입증하신다면…….”
“좋아. 그럼 어떻게 할까…… 아,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다들 퀘스트 스크린을 열도록.”
내 부하들은, 아직은 정식 부하가 아니었지만, 내 지시에 따라 퀘스트 스크린을 열었다.
나는 히죽 웃었다.
“나는 강자만을 인정하는 자들이 좋다. 나는 강자에게, 압도적인 세계에 도전하는 인간을 좋아한다. 단, 지금의 여러분과 같은 방식은 곤란해. 뒷짐 지고 서서, 안전한 곳에서 ‘아직 당신을 인정 못해.’ 하는 식의 소극적인 정치권력을 행사하려고만 하면 곤란해. 그건 약하니까. 나는 여러분 전원이 적극적으로 강자에게, 즉 나에게 도전하기를 바란다.”
나는 퀘스트를 걸었다. 내가 내건 퀘스트는 다음과 같았다.
<비공개 퀘스트>
-목표 : 바이코뮤닉 길드의 회원들은 니크나메 퀀텀을 죽일 것. 단, 비서실장은 제외한다. 제한 시간은 10분. 장소는 바이코뮤닉 길드 부지로 한정. 스킬 사용은 완전 자유. 단, 무기 사용은 날붙이 사용 금지.
-보상 : 바이코뮤닉 길드 마스터가 될 권리. 1억 니즈.
나는 내가 내건 퀘스트가 몹시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부하들은 내가 내건 길드 전용의, 비공개 퀘스트를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어때? 이해가 가? 동시에 다 덤벼도 좋고 혼자 덤벼도 좋아. 10분 안에 나를 잡으면 승리야. 어때? 10분짜리 술래잡기다.”
그제야 부하들의 얼굴에 의욕이 솟았다.
“우리가 당신을 쓰러뜨리면 1억 니즈랑 길드 마스터가 될 권리를 준다고요?”
“맞아. 다만 확실히 죽여야 한다.”
말하면서 뱃속이 시큰거렸다. 왜냐하면 나는 한 번 죽으면 끝인 하드코어 모드로 진행 중이니까. 하지만 이 녀석들이 그런 걸 알까? 알아도 신경이나 써줄까?
“잠깐. 왜 나는 불참이지?”
당현준이 불만 가득 한 얼굴로 물었다.
“어허. 비서실장은 중심을 잡고 있어야지. 심판해, 심판. 불공정한 놈 찾아서 적발하도록 해.”
“후우, 하는 수 없지. 제한시간 10분은 언제부터지?”
“응? 게임은 이미 시작됐는데? 다들 제한 시간 스크린을 확인하도록.”
그렇게 말한 나는 [극한 가속]을 발동, 가장 가까이에 있던 성직자 레이시아, 마법사 시리우스, 도적 페르디도의 턱을 주먹 후려쳤다.
빡! 빡! 빡!
도적 비술인 [써커 펀치]였기에 전부 치명타 발동.
털썩.
세 사람은 동시에 쓰러졌다.
“뭣?!”
길드원 17명이 경악.
“뭘 그리 놀라? 아까도 말했잖아? 반격 안한다고는 안했다.”
그러자 길드원들이 더더욱 의욕을 품었다.
“제기랄! 비겁하다!”
“가자! 죽여버려!”
“전사들은 날붙이 쓰지 말고 돌격!”
17명의 부하들이 달려 들었다.
“[쇼크 웨이브].”
여기 오기 직전 나는 당현준에게서 스크롤을 받아 주문을 익혔다. 아마 당현준은 이 상황을 보며 이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퀀텀 이 새끼, 이렇게 하려고 취임식 전에 주문 배운다고 한 거였나!’
콰콰쾅!
달려들던 전사들을 충격파가 덮쳤다.
“크악!”
“버텨!”
“으윽!”
제법 튼튼한 놈들이라 4단위 주문인 [쇼크 웨이브] 정도는 견디는 듯하다.
“다들 침착해!”
당현준이 외쳤다.
“어차피 이 컨테이너는 창문도 없고, 너희가 문을 등지고 있다. 즉 퀀텀은 탈출 못한다! 침착하게 하면 열 몇 명이나 되는 너희가 이긴다!”
“어이, 심판이 그걸 가르쳐 주면 어떻게 해?”
나는 당현준에게 따졌지만 당현준은 못 들은 척 하고 갑자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힘내라, 힘! 힘내라, 힘! 얘들아아아! 나도 너희들 만큼 퀀텀 이 자식 싫어하거든?! 이겨라! 그냥 죽여버려!”
“이씨, 당현준. 너 기억한다.”
내가 당현준을 노려보는 동안, 17명의 부하들은 과연 재정비를 시작했다. 물리 공격 저항력을 높이는 한편, 마법 저항력을 높이는 신성 기적까지 동원하고, 도적 중 한 명은 아예 특수 자물쇠를 컨테이너의 출구에 설치해버렸다.
“훗. 시간은 7분쯤 남았나?”
내가 말한 순간.
“돌격!”
당현준이 외쳤다.
“우와아아아!”
놈들이 달려들었다. 옳은 판단이었다. 솔직히 17명이나 되면 이긴 거나 다름없다.
하지만.
“[스모크].”
푸확!
내 양손에서 검은 연기를 생성됐다. 연기는 놀랄 정도로 빠르게 퍼져 나갔고, 하필 창문 없고 문이 잠긴 컨테이너 박스라서 효율은 압도적으로 높았다.
그리고.
‘[그림자 숨기].’
나는 도적 비술 중에 가장 유명한 기술인 [그림자 숨기]로 연막 속에 숨었다. 어젯밤 늦게까지 안 자고 도적 길드 가서 배우길 잘했다. 놈들 중 마법사가 있으면 [디텍트] 따위로 금방 들키겠지만, 일순간이라도 좋다.
‘[디스가이즈].’
흑마법 4단위 주문인 변장 주문을 발동, 나는 주변 사람으로 변신했다. 능력치까지 베낄 수는 없지만, 외모는 물론 목소리까지 변장 가능하다. 지속 시간은 겨우 5분이지만, 어차피 이번 퀘스트 제한 시간은 5분도 안 남았다.
“[에어 클리어]!”
누군가가 공기 정화 주문을 발동했다. [스모크] 주문에 의한 검은 연기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니크나메 퀀텀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대신에 당현준이 두 명 있었다.
“앗! 당했다! 저 개자식이 내 모습으로 변장해버렸어!”
나는 당현준의 목소리로, 당현준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 아, 아냐! 저놈이 나로 변한 거야!”
심판 역할, 그것도 불공정한 심판 역할을 하던 당현준은 깜짝 놀라서 나를 가리켰다.
“웃기지 마! 내가 진짜다!”
“거짓말 하지 마! 나는 처음부터 여기 서 있었어! 거기 있는 네가 가짜다!”
“웃기는 소리! 나는 애들 응원하느라 조금 움직였을 뿐이야! 서 있는 위치 가지고 트집 잡는 네가 거짓말을 하는 가짜다!”
“끄아아아!”
진짜 당현준은 발을 동동 굴렀다. 그리고 가짜 당현준인 나도 발을 동동 굴렀다.
“세상에, 진심으로 화가 났을 때 발을 동동 구르는 포즈까지…… 둘 다 진짜 같아!”
부하들은 어쩔 줄 몰라했다. 부하들 중 마법사 두 명이 나섰다.
“[디스펠]!”
두 마법사는 나와 진짜 당현준을 향해 [디스펠]을 걸었다.
그리고.
당연히.
내 몸에 걸려 있던 [디스가이즈] 주문이 풀려버렸다.
“앗!”
“저쪽이 가짜다!”
“난 그런 줄 알고 있었어!”
나는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내가 원한 건 [마나 부스트]를 위한 시간이었다.
[마나 부스트]는 마력을 주입하거나 자기 자신의 마력을 순간적으로 강화시켜서 주문의 위력을 극대화시키는 기법 일반을 말한다.
“[스테이시스 필드].”
나는 [마나 부스트] 상태에서 [스테이시스 필드]를 발동했다.
우우우우웅……!
모든 것을 느리게 만드는 장을 생성하는 주문. 공격력은 전혀 없지만 효과는 압도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