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다음날.
나는 엑셀레온 호텔 8층 스위트룸에서 깨어났다.
데이나의 집에서 풀려난 나는, 데이나가 경영하는 엑셀레온 그룹의 엑셀레온 호텔에 장기투숙하게 되었다.
데이나의 자택까지는 택시 타고 약 20분 걸리는 거리였다. 다만 내가 데이나의 집을 들락거리면 좋지 않다. 그러므로 꼭 할 말이 있으면 당현준을 코어월드상에서 만나기로 했다.
“후후.”
나는 예전 고시원방 넓이의 침대 옆에 있는 VR 플랫폼을 쓰다듬었다. 한창 잘 나가던 시절로 돌아온 것 같다. 나는 어젯밤에도 내 전용 VR 플랫폼을 이용해나카스 도시의 도적 길드와 전사 길드를 돌아다녔다. 그리고 몇몇 도적 비술을 익히고 전사 길드의 동향을 확인한 뒤 로그아웃했다. 그리고 지금 막 깨어난 참이다. 전업 게이머로서 느낄 수 있는 최상의 충실함…….
욱신!
“욱?!”
나는 움찔했다. 갑자기 뒤통수가, 뇌혈관이 확 조여지는 듯한 아픔. 나는 아픔이 또 찾아올까 걱정하며 뒤통수를 만지작거렸지만 괜찮았다.
‘그렇군. 줄기 세포 치료를 받은 뒤로 코어월드를 너무 오래 했어.’
코어월드는 구세대적인 시청각 가상현실이 아니라, 뇌파동 직류 연결식이라는, 말 그대로 두뇌에 거의 직접 간섭하는 방식의 게임이다. 최적의 뇌파동 효율로 인해, 72시간씩 거의 쉬지 않고 해도 부작용이 거의 없다고 하긴 하지만 무리해서 좋을 건 없다.
나는 얼굴에 물만 묻힌 뒤 스위트룸을 나섰다. 2층으로 내려가서 뷔페 조식을 먹기로 했다.
“우움……!”
맛있다. 너무 맛있었다.
쉐프가 직접 철판 위에서 만든 햄 오믈렛에 케첩 약간. 튀겨지다시피 한 베이컨 두 쪽. 감자튀김 몇 개와 소시지 몇 개. 연근 절임과 쌀밥과 미소 시루. 그리고 작은 크로와상 하나와 버터. 커피와 오렌지 주스. 이렇게만 먹어도 점심까지 든든했다.
계산은 카드로 했다. 물론 데이나가 준 체크 카드다. 용돈처럼, 한 달에 1000만원씩 6개월간 넣어주겠다고 했다. 나는 내 니크나메 퀀텀이 지니고 있는 골드를 환전해서 쓸 수 있는 체크카드를 만들 수 있었지만, 환전 수수료도 많이 나가고, 데이나의 호의를 거부하고 싶지 않았다.
“좋아, 가볼까.”
나는 다시 8층 스위트룸으로 돌아왔다. 양치질을 하고 편한 옷을 입은 뒤 접속 준비를 했다.
오늘은 당현준과 함께 바이코뮤닉 길드에 가서 길드 마스터를 인수받는 날이다. 즉, 나를 신임 길드 마스터로 임명받는 날이다.
“긴장되는구만.”
나는 디바이스를 머리에 썼다. 그리고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앞으로의 전개를 상상하고, 각오하고, 뜻대로 되지 않더라도 좌절하는 대신 계획을 수정하기로 마음 먹었다.
“……로그인.”
나는 코어월드에 접속했다.
“늦었군.”
당현준의 얼굴이 보였다.
“가깝다. 비켜.”
나는 블루종 도시의 미들턴 호텔 객실의 침대로 접속했고, 기다리고 있던 당현준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것도 누워 있는 바퀴벌레를 내려다보는 표정으로.
“[메스 텔레포트] 스크롤을 준비했다. 함께 이동하지. 너는 길드 본부의 위치를 모를 테니까.”
“그러지.”
“그 반말 좀 그만둘 수 없나? 정말 거슬리는데.”
“어차피 나는 길드 마스터니까 상관없지 않나? 감수하라고.”
당현준은 이를 갈았지만 어쩔 수 없다. 내 고시원 문짝을 부수고 납치했을 때의 굴욕감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뭐, 내가 원래 뒤끝이 좀 많은 성격이거든. 하지만 네가 쓸모를 보인다면 불필요한 불이익이 가게 하진 않는다. 그걸로 만족하도록 해.”
“정말이지 더럽게 오만하군.”
당현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참, 미안한데 스크롤 더 있어?”
“뭐?”
“주문 스크롤. 주문 좀 배우려고.”
일반적으로 마법은 마법서로 배우는 게 좋다. 레벨과 학습 시간만 투자하면 습득률 100%니까. 하지만 마법서는 비싸고, 마법사 길드에 들어가야 구매 가능하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마법사 길드가 좀 껄끄럽다.
그렇기에 주문 스크롤을 이용해 주문을 배우려고 한다. 마법사가 스크롤을 펼치면 즉시 주문을 쓸 수 있지만, 효과를 발동하지 않고 ‘학습’ 하는 것도 가능하다. 단, 이 경우에는 습득 확률이 존재한다.
“마법사 레벨 20이니까 그래도 5단위 이하 주문들은 거의 80% 확률로 배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러니 스크롤 좀 줘.”
“정 배우고 싶으면 길드 마스터 취임식 끝나고 하면 되잖아.”
“부탁하지. 길드 마스터 취임 전에 배워야 돼. 공짜로 주기 싫으면 돈 줄게. 1단위 스크롤 하나당 1000만 골드. 2단위는 2000만. 3단위는 3000만. 이런 식으로 5단위 주문까지 있는 대로 줘봐.”
나는 당현준에게 손을 내밀었다. 당현준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내 얼굴을 살폈다.
“너 이자식, 또 무슨 수상한 계획이냐.”
“또라니. 나는 그저 길드 마스터로서 부하들에게 무시 당하기 싫은 것 뿐이야. 아니면, 레벨에 비해 주문을 익히지 못한 길드 마스터를 원하나?”
“제길.”
당현준은 마지 못한다는 기색이 역력하게, 인벤토리에서 스크롤을 잔뜩 꺼내서 내게 던졌다.
“빨리 익혀.”
“고맙군. 1억 골드쯤 주면 되나?”
“닥치고 배워. 네놈 길드 마스터 취임 선물이라고 하지.”
“통이 크군. 그럼 [극한 가속]으로 익히지.”
나는 [극한 가속]을 썼다.
그리고 15개의 주문을 익히려 했고, 딱 하나 실패해서 14개의 주문을 익혔다.
“좋아. 흠. 5단위 흑마법 주문 [흑암탄] 빼고 다 배웠다. 든든하군.”
“[극한 가속]이 확실히 빠르군. 그럼 출발하자.”
당현준 주위로 내가 섰다. 당현준은 8단위 청마법 주문인 [메스 텔레포트] 스크롤을 찢었다.
“깁슨 도시로!”
우리는 깁슨 도시의 입구에 도착했다.
‘오랜만이군.’
깁슨 도시는 슬럼화가 매우 심하게 진행된 도시였다. 고층 건물은 전혀 없고, 길가에는 쓰레기가 가득 했으며, 사람도 많지 않았다. 가끔 초보 플레이어가 새로운 도시를 탐험하러 왔다가 실망하고 떠나는 그런 도시.
‘내가 이 도시를 만든 게 엊그제 같은데 감회가 새롭구만.’
사실 이 도시는 본래 없던 도시였다. 원래 이곳은 토질도 좋지 않고 황무지에 가까운 빈 땅이었다. 하지만 총통에게 지시해서 무리하게 도시를 개발하게 만들었다. 제대로 써먹진 못했지만 이번에야말로 써먹어야지.
“최고의 입지군.”
내가 말했다.
“빈정거리지 마라.”
당현준이 말했다.
“그보다 길드 본부의 위치는?”
“저기다.”
“어디?”
“저기. 보이잖아.”
“공터에 있는 폐품 처리장은 보이는데.”
“거기다.”
“농담이겠지? 저기 길드 본부라고?!”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아는 데이나는 대기업의 회장이다. 그리고 바이코뮤닉 길드는 그녀가 만든 코어월드의 길드다. 그런데 저런 허름한 꼴이라니.
당혹해 하는 나에게 당현준이 설명했다.
“아, 그건 말이지. 일부러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뿌리 내리는 게 목적이었기 때문이야. 그래서 우리의 데이나 회장님은 허름한 길드 본부를 짓기를 원하셨다.”
“저건 너무 허름해서 눈에 띄잖아. 사거리 한복판의 고물상이라니. 입지 조건이 좋은데 유난히 너저분한 고물상이니까 더 수상해.”
“닥치고 따라와. 길드마스터 취임식을 위해 내부 청소를 시켜놨다.”
“재활용 비닐로 융단이라도 깔아놨나?”
“닥쳐.”
우리는 길드 본부의 본관 건물로 들어갔다. 참고로 본관은 커다란 컨테이너 박스였다.
길드 본부 내부는 무척 깨끗했는데, 청소가 열심히 되어 있어서라기 보다는 청소를 할 것이 없을 정도로 가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길드 본부 본관 속에는 길드원들이 거의 다 와 있었다. 데이나와 헬레나는 현실 세계 속에서 혼내고, 또 혼나는 중이라 참석하지 못했다.
약 20여 명의 길드원들이 책상 앞에 정렬해 있었다. 딱히 단상 같은 것은 없었다. 나는 책상 뒤에 섰고, 당현준은 내 옆에 섰다.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지금부터 바이코뮤닉 길드의 2대 길드 마스터 취임식이 있겠습니다.”
비웃음 소리가 울려퍼졌다. 당현준은 굳은 얼굴로 책상에서 물러났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바이코뮤닉 길드의 제2대 길드 마스터가 된 니크나메 퀀텀이라고 합니다. 갑작스럽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허리 숙여 인사했다.
휙.
무언가 날아왔다.
툭.
내 머리에 부딪혔다.
“풉!”
누군가 웃었다.
내가 다시 허리를 세웠을 때는 간헐적인 낄낄거림이 되어 있었다.
“이놈들! 무슨 짓이냐!”
당현준이 버럭 소리쳤다. 낄낄거림이 줄어들었다.
“이 분은 데이나 회장님이 결정 내리신 길드 마스터다. 그런데 어린애도 치지 않을 장난으로 우롱한단 말이냐!”
오오, 비서실장. 역시 길드마스터 편을 들어주는군.
“고맙네, 비서실장. 내가 처리하지.”
나는 당현준을 물러나게 했다. 그리고 부하들에게 말했다.
“다시 해봐.”
부하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종이 뭉쳐서 던지는 거 좋아하는 거지? 던져서 맞춰봐. 내 머리를 맞추는 자에게는 10만 골드 준다. 제한 시간 10초. 시작.”
부하들은 서로 눈치만 보았다.
“10. 9. 8. 7…….”
내가 숫자를 세자 부하들은 허둥지둥 빈 종이를 뭉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던질 준비를 하고는 다시 머뭇거렸다. 나는 피식 웃었다.
“그냥 던져.”
휙! 휙! 휙!
종이 뭉치 세 개가 동시에 날아왔다. 나머지 부하들은 차마 던지지 못했다.
날아든 종이 뭉치들은 각각 도적, 성직자, 마법사가 던진 것이었다. 도적이 던진 것은 도적 비술인 [비수 던지기]로 던진 것, 성직자는 신성 기적 [은혜로운 인도]로 던진 것, 마법사가 던진 것은 [마나 부스트]를 걸어서 위력을 높인 뒤 전진 것이었다.
“훗.”
나는 [극한 가속]을 발동. 그리고 도적의 비술인 [퀵 핸드]를 연계, 날아든 종이 뭉치 세 개를 전부 받아냈다. 그리고 역으로, [파이어 볼트]로 불을 붙인 뒤 그들에게 돌려줬다.
퍽! 퍽! 퍽!
화륵!
“아악!”
“앗 뜨거!”
“으윽!”
난데없이 HP 피해를 입은 부하 셋은 원망하는 눈길로 나를 노려봤다.
“뭐지, 그 눈빛은? 나는 반격은 안한다고 안했다. 그런 의미에서 던지지 않고 망설인 나머지 길드원들에게 칭찬하고 싶군. 인벤토리 스크린 열어라. 지금 종이 뭉치 던진 세 명 빼고 나머지 전원에게 10만 골드를 주겠다.”
“오옷……!”
길드원들은 눈치 빠르게 인벤토리 스크린을 열었다. 그리고 내가 주는 10만 골드를 받았다. 받지 못한 세 사람은 원망에 가득 찬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의외로, 당현준은 몹시 만족스러운 얼굴로 나를 봤다.
“제군들. 결론부터 말하겠다. 나는 코어월드를 정복할 예정이다.”
길드원들은 술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