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레벨 39가 어때서!”
라이젠은 바락바락 소리쳤다. 자존감과 레벨이 모두 낮은 것들은 지적 받으면 소리부터 지른다.
“어떻긴, 네가 하도 막 각오한 듯 말해서, 인간성이고 뭐가 다 팔아치우고 폭렙을 위한 아수라라도 된 줄 알았지. 그런데 꼴랑 39라고?”
나는 진심으로 한심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전화 너머의 라이젠이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네가 한 75 정도는 되고 깝치는 줄 알았는데. 야, 미안하다. 내가 너무 진지 빨았네. 39짜리한테 내가 못할 소리를 한 것 같아.”
“무시하지 마! 이 개새끼야! 그러는 너는 지금 몇인데!”
“안알랴줌.”
“죽여버린다!”
“하! 너는 내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잖아? 사실 나는 로그아웃 한 상태지롱!”
“이, 이……!”
“너, 나카스 도시에 있다고 했지? 조만간 내가 찾아간다. 각오 단단히 하고 있어라. 끊는다.”
“야! 전화 끊지 마! 야!”
나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아주 긴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우우우우우우우…….”
보아하니 한때 내 제자인지 후배인지 애매했던 놈 하나를 조져야 할 것 같다.
“뭐랄까, 선배 대우 안 해준다고 찌질거리는 선배와 열등감 폭발하는 후배의 대결을 본 기분이군요.”
데이나가 말했다. 그녀가 곁에서 보고 있는 걸 잊고 있었군.
“뭐, 그렇게 된 겁니다. 당신 여동생 헬레나와 함께 라이젠을 쓰러뜨려야 할 것 같습니다.”
“뭐, 그렇게 하도록 하세요. 내 여동생을 위험에 빠뜨리긴 싫지만, 사기꾼에게 따끔한 교훈을 줄 필요는 있겠군요.”
“그래서 말인데, 나 좀 풀어주면 안 됩니까? 현실 세계에서 식사도 좀 하고 화장실도 좀 하고 싶군요.”
“응, 그러죠. 신뢰는 어느 정도 쌓았으니.”
데이나는 나이프를 꺼내더니 내 팔다리의 밧줄을 모두 끊어주었다.
“휴우.”
나는 기지개를 실컷 켰다.
그리고.
부웅!
나는 데이나에게 로우킥을 날렸다.
빠각!
“악!”
내 정강이에 극심한 통증이 가해졌다. 데이나는 내 정강이에 자신의 정강이를 가져다 댔을 뿐이다.
“궤도와 타이밍은 완벽했어요.”
데이나는 빙긋 웃었다. 웃으면서 두 손으로 내 멱살을 잡았다.
“하압!”
정면을 보던 내 시야는 천장을 바라보게 되었다.
쿠웅!
“커헉!”
완벽한 업어치기!
충격으로 숨이 막히고, 허리 통증이 온 몸에 짜르르 퍼졌다. 바닥에 메트를 깔고 해도 머리나 허리를 크게 다칠 수 있는 게 업어치기인데, 맨 바닥에 내리 꽂다니!
데이나는 녹색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질문. 왜 날 공격했죠?”
“마, 말이라고 합니까?”
나는 부들부들 떨면서 몸을 일으켰다.
“납치범이 나를 믿고 풀어주면, 인질은 당연히 납치범을 공격해야죠.”
“어머? 그게 ‘당연’의 영역인가요? 특이한 발상이군요.”
“그럼 나도 질문. 당신 정강이는 뭡니까? 쇳덩이?”
“어릴 적 사고로 양쪽 다리를 티타늄 의족으로 교체했지요. 그리고 체력 단련을 위해 유도와 크라브마가를 연마 했고요.”
“과연…….”
“후훗. 혼자 있는 여자 납치범이라고 깔보면 인질은 더 고통스러울 뿐이랍니다.”
“네.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좌절감은 없었다. 어차피 시험 삼아 시도했던 탈출일 뿐이다.
“우선 밥이나 주시죠. 배고프네.”
식당으로 안내되었다. 빅토리아풍의 식당이라고 묘사하고 싶지만, 사실 나는 빅토리아풍이 뭔지 정확히 모른다. 다만 요리는 아주 훌륭했다. 크림 수프와 빵. 그리고 비프 스튜였다.
내 맞은편에서 데이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내가 먹는 걸 바라봤다.
“뚫어지게 쳐다보면 잘 못 먹는데요.”
“감시중이랍니다, 인질 님.”
“나참. 말 나온 김에 하나 묻죠. 나는 언제 풀려납니까?”
“일단 내 여동생부터 구출해 오세요. 15시간도 안 남았어요.”
데이나의 얼굴에 수심이 드리워졌다.
“솔직히 72시간이 한계라고 하지만…… 그래도 정말로 72시간 동안 연속으로 게임 중이라니. 제 여동생은 괜찮을까요?”
“물론입니다. VR 적응력은 사람마다 다르기도 하고…… VR 상태는 일종의 반수면 상태니까요. 게다가 코어월드 속에서 수면을 취하면, 그게 또 집중력과 정신력 회복에 도움을 주거든요.”
“맙소사. 게임 속에서 잠을 잔다니.”
데이나는 상상만 해도 어지럽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 식사 끝.”
나는 다 먹고 일어났다.
“화장실은 어딥니까?”
VR 접속을 하면 뇌파를 조절해서 생리욕구나 불수의운동, 생체리듬 등을 최적화한다. 그러므로 아주 오랫동안 화장실을 가지 않아도 되지만, 72시간의 벽을 넘지는 못한다. 제법 오래 접속해 있던 나는 화장실이 가고 싶었다.
“안내해 드리죠.”
나는 데이나와 함께 화장실로 들어갔다. 내 고시원 방을 몇 개 합친 것보다 더 크고 깨끗한 화장실이었다. 나는 샤워기 쪽으로 가다가 멈칫했다.
“저기, 따라 들어오실 필요는 없는데…….”
“감시 중이랍니다.”
“어휴, 정말.”
나는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옷을 벗었다. 그리고 샤워를 했다. 물과 비눗물이 튀었지만 데이나는 변기에 앉아 나를 바라봤다.
“부럽군요.”
“뭐, 뭐가요?”
“다리요.”
데이나의 눈이 내 허벅지부터 정강이까지 쓸고 내려갔다.
“제 다리는 강화 티타늄이라 남들보다 빨리 달리고, 무에타이 대련을 할 때 누구보다 강하지만, 씻을 때는 해제하고 욕조에 누워 씻어야 하거든요.”
“그 다리는 사고로 잃으셨다고…….”
“우리 부모님이랑 같이요. 교통사고였으니까요.”
“음…….”
“내가 욕조에 완전히 빠지지 않고 들어가도록 도와주는 사람은 제 여동생뿐이지요.”
데이나의 목소리에 애틋함이 묻어났다. 기업체를 운영하는 회장 데이나. 하지만 피로한 몸을 뜨거운 물이 담긴 욕조에 뉘일 때는 티타늄 다리를 해제해야 하고, 혼자 들어가지 못한다. 그때, 유일한 혈육인 헬레나가 데이나를 돕는 것이다.
나는 데이나에게 있어서 헬레나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 지 알 것 같았다. 나는 뜯지 않은 칫솔을 집어 들고 양치질을 했다.
“헬레나가 없어서, 게임 속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저는…… 저는…….”
데이나의 목소리에 물기가 돌았다.
“저는 3일째 씻지도 못하고 있다고요!”
“그, 그게 문제입니까?!”
나는 칫솔을 놓쳤다.
“그게 문제라뇨! 헬레나 요녀석! 로그아웃하기만 해봐라! 타월로 내 등을 문지르게 해야지!”
데이나의 주먹이 부르르 떨었다.
“그럼, 다시 접속하겠습니다.”
말끔해진 채 방으로 돌아온 내가 말했다. 살면서 가장 피곤한 샤워였다.
“행운을 빌어요, 나강일 님. 14시간 40분 남았어요.”
헬레나가 내 머리에 디바이스를 씌워주었다.
“아아, 믿어주십쇼.”
내가 머리에 쓴 디바이스를 조정하고 심호흡을 할 때. 밧줄이 다시 내 몸을 감았다.
“에? 에?”
나는 뒤늦게 발버둥 쳤지만 소용없었다.
“14시간 39분 뒤에 내 여동생을 데리고 오지 못하면 밧줄에 묶인 당신을 의자와 함께 통째로 욕조에 빠뜨려 죽이겠어요. 아시겠지만 우리 집 욕조는 크답니다.”
데이나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니아니, 우리 이제 친해진 거 아니었어요?”
나는 허둥거리며 물었지만, 데이나는 내 몸의 밧줄을 더 꽁꽁 묶었다.
“나는 사업가랍니다.”
데이나는 그것으로 답변을 대신 했다.
“그럼 행운을 빌어요. 니크나메 퀀텀.”
데이나는 두 손가락을 자기 입술에 대더니, 쪽 소리를 내고 내 입술에 가볍게 댔다.
“흥. 의욕이 샘솟는 군요.”
나는 엄지를 척 세워 보인 뒤 코어월드에 접속했다.
나는 미들턴 호텔의 스위트룸에 나타났다. 당현준과 최영석은 눈짓으로 내게 인사했다. 각각 문 옆과 창문 옆에 있었는데, 만약을 대비한 경계인 모양이었다.
“일어났어? 언니가 뭐랬어?”
헬레나가 달려왔다.
“데이나 언니, 많이 화났어? 응? 응? 빨리 일어나봐.”
“하아, 설명드리죠. 비서실장님과 최명석 님도 오시길. 동시에 설명하죠.”
나는 그동안 현실에서 있었던 일을 전부 설명했다. 로우킥 먹여서 제압하려다가 내 정강이가 다친 이야기만 빼고.
세 사람은 ‘예상대로’라는 반응이었다.
“결국 라이젠이라는 놈을 쓰러뜨리는 것으로 결론이 난 것이군.”
당현준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당신은 라이젠을 알고 있었던 거네.”
헬레나가 내게 말했다.
“예. 라이젠…… 제가 과거에 퀀텀 코어시커였을 때 후배인지 제자인지 싶었던 놈입니다. 지금은 개자식이지만.”
“그놈에게 약점은 있습니까?”
최명석이 내게 물었다.
“너무 약해서 약점이 딱히 어디라고 말하기가…….”
“뭐, 레벨 37이라고 했소? 확실히 나랑 최명석 둘이 가도 무난히 처리할 정도군.”
당현준이 말했다.
“아.”
내가 말했다.
“또 뭔가? 이제와서 또 뭐가 떠올랐다고 말할 생각이오?”
“예.”
“하아, 그럼 말하게.”
“아니, 내가 우선 물어야겠는데요. 내가, 퀀텀 코어시커가 코어마스터에게 당한 뒤 마법사 길드는 어떻게 됐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