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 꿈이 아니네.”
자고 일어나자마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빛나는 샹들리에였다.
손에서 느껴지는 보송한 천의 감각 또한 어제의 일이 꿈이 아님을 알려주었다.
청천병력 같은 소리가 아직도 귀에서 맴도는 듯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돌아가실 수 없습니다.’
‘네?!!!!!’
하랑의 외침이 방안을 메아리처럼 울렸다.
그에 루카스도 당황한 듯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흠흠. 송구하옵니다. 미천한 실력으로 신을 부활시켰으나 인간이시고, 더구나 이(異)세계의 인간일지는 차마 몰랐습니다. 어디에서 오셨는지조차 짐작되지 않아 보내는 방법을 알지 못합니다.’
‘그럼 저는......’
내가 잘못 들은 것일까.
일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하랑은 이곳에서 저와 같이 지내는 것이 싫으신가요.’
‘그런 것은 아니지만.......’
‘당신이라면 신으로서 제국을 살려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어깨를 살며시 잡으며 미소 짓는 미남의 모습에 그 누가 고개를 저으며 거절할 수 있을까.
하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이 어제의 대화였다.
원래 영화 같은 곳에서 보면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의 차원 이동도 휘리릭- 잘만 되던데,
신이면 차원 이동 정도는 껌이어야 하는 거 아닌가?
지금 돌아가지도 못하는 나한테 뭘 바라는 거야?
내가 신이라면서 저 사람들 괜히 엄한 사람 데리고 온 거 아냐?
나한테 막 비를 내려달라거나 곰을 사람으로 바꿔달라고 하면 어떡하지?
그런 거 할 줄 모르는데.
여기서도 쓸모없는 잉여의 삶을 살아갈 것 같은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그나마 달라진 것이 있다면 신으로 등급이 상승했다는 것 정도?
그럼 뭐하겠는가?
잉여신인데.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하랑의 생각을 깨뜨렸다.
모기만한 소리로 조심스럽게 들어오라고 말하자 문이 열리고 한 여자가 들어왔다.
“밤새 불편하신 점은 없으셨습니까?”
“불편이라뇨! 너무 좋았어요. 이불도 보송하고.”
“다행입니다. 저는 마리에라고 합니다.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녀는 여전히 하랑을 보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였다.
마치 눈을 피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저기...... 마리에? 고개 드셔도 돼요. 그리고 편하게 말 놓으세요. 당분간 여기서 지내야 할 텐데. 저는 문하랑이에요. 하랑이라고 불러주세요.”
“당치 않습니다. 소인이 어찌 귀하신 분께 말을 놓겠습니까. 게다가 귀하신 분 이름도 함부로 입에 담을 수 없습니다.”
어제 루카스 장로님도 그렇고 자신의 이름을 부르려는 것을 꺼려하는 듯 한 모습이었다.
이곳에서의 규칙 같은 건가.
“그럼 이름은 천천히 불러주세요. 그대신 고개는 들어줄 수 있죠? 제가 마리에 언니를 이렇게 보고 얘기할 순 없잖아요.”
내가 웃으며 그녀의 고개만큼 얼굴을 숙이며 말하니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
어제 나를 보고 제일 처음으로 소리쳤던.......
그리고 새하얀 마리에의 얼굴이 드러났다.
마치 밀가루 반죽처럼 보드라워 보이기까지 했다.
단정하게 빗어넘긴 고동색 머리카락 아래로 반듯한 이마에 오렌지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동글동글한 눈동자와는 다르게 굳은 입매는 다소 차가운 느낌을 주었다.
어제의 샤를도 그렇고,
이 세계 사람들은 다 미남미녀만 모였나.
게다가 언니라고 하기엔 나보다 훨씬 어려 보이네.
언니라고 한 거 죄송해요.
괜히 머쓱해서 그녀의 눈동자를 보며 말했다.
“눈 마주치니깐 더 좋네요.”
하랑이 눈을 마주치며 웃자 마리에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굉장히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네.
하랑은 그렇게 생각했다.
“시장하실 테니 우선 이것을 드시지요.”
“우와! 맛있겠다. 고마워요.”
하랑의 눈앞에 따끈한 김이 나는 갓 구운 빵과 수프가 놓였다.
침대 위에서 식사하다니.
마치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오드리 헵번이 된 느낌이 이런 것 아닐까.
기분 좋아서 활짝 웃고 있는 하랑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인간이 먹는 음식을 제공해주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영화속 여주인공 뺨치는 대접을 받는 셈인 것을.
“여기 폐하께서 준비하신 것을 가지고 왔습니다.”
“샤를이요?”
마리에가 문을 열자 마리에와 비슷한 차림을 한 열댓 명의 소녀들이 각자의 손에 무언가를 든채 우르르 들어왔다.
일사불란한 모양이 눈앞에서 벌어졌고, 하랑은 입에서 뿜을 뻔한 빵조각을 간신히 삼켰다.
“이게, 다 뭔가요?”
“폐하께서 준비하신 선물입니다.”
아름답게 펼쳐져 있는 열 개의 드레스가 그녀의 눈앞에 있었다.
“저는 제가 입고 있는 옷이면 충분한데요.”
“지금 입고 계신 옷은.......”
하랑을 위, 아래로 훑어보는 마리에의 시선에 깨달았다.
아, 그러고 보니 나 지금까지 무릎 늘어난 트레이닝 바지에 촌스러운 캐릭터가 그려져 있는 티셔츠를 입고 있었지.
으, 샤를 앞에서 이런 몰골로 대화했었구나.
깨닫자 뒤늦게 부끄러움이 밀물처럼 밀려들어 왔다.
“그 옷만으로는 활동하기에 추우실 겁니다. 혹시 옷들이 마음에 안 드십니까?”
“아, 아뇨. 충분히 예쁘고 좋은데요. 평소에 이런 옷을 입고 생활하기가 좀...”
“평상복입니다.”
풍성한 자태를 보이는 이 드레스들이 평상복이라고?
게다가 색깔은 왜 죄다 빨간색이야.
누가 보면 물랑루즈 영화 찍는 줄 알겠네.
“굳이 이 중에서 골라야 하는 거죠?”
“네, 부디.”
아까부터 가녀린 팔로 옷을 들고 있는 소녀들 때문이라도 하랑은 선택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 제일 끝에 있는 옷이 유일하게 하얀색이라 그것을 선택했다.
“저기 하얀색으로 할게요.”
“네, 알겠습니다.”
마리에와 끝의 소녀만 남고 모두 옷을 가지고 사라졌다.
“내일 아침에는 모두 하얀색 옷들로 준비하라 하겠습니다.”
내일도 또 선택해야 한다고?
“아뇨. 아뇨. 저는 이 옷 하나면 돼요. 별로 돌아다닐 일도 없을 것 같고. 또 깨끗하게 잘 입을 테니까 제발 이 옷만 입게 해주세요.”
하랑은 자신의 일상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이런 아침 행사를 내일 또 한다고 하니 펄쩍 뛰며 말렸다.
뒤에 서 있던 소녀와 마리에는 꽤나 당황한 표정이었지만 하랑의 설득 끝에 옷을 고르는 일은 없도록 하겠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
“와, 눈이다.”
하랑은 방의 창문을 열어젖히며 탄성을 내뱉었다.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하랑이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이었다.
마치 온 세상에 하얀 물감을 뿌려놓은 것처럼 눈이 쌓여있었다.
눈이 쌓인 정원은 그 끝이 어딘지 모를 만큼 넓게 펼쳐져 있었다.
시야에 가리는 건물들이 없었기에 멀리 있는 산자락까지 한눈에 볼 수 있었다.
거기에 대조되는 아득한 남색이 하늘에 걸쳐진 오로라, 먼지처럼 흩뿌려진 별들의 조화를 이루는 것이 완벽한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아까 선택한 하얗고 단정한 드레스를 입은 채 하랑은 창가에 서서 내내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런 풍경을 본다면 집에 가기 싫을 것 같아요. 그쵸, 마리에?”
“.......”
“저는 말이죠. 이렇게 좋은 거 보면 가족이 먼저 떠올라요. 부모님은 맞벌이하시느라 바쁘셔서 가족여행 못 가봤거든요. 그래서 회사합격하고 입사하기 전에는 꼭 가야지, 했는데 취직준비만 2년째...... 하하. 게다가 이제는 이런 곳에 와서, 가족마저 만나지도 못하겠네요.”
마리에가 답하지 않아도 하랑은 중얼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딱히 답을 바라고 물은 것이 아닌 혼잣말인 듯했다.
“입고 있는 이 옷도 불편하긴 하지만. 여자의 로망인 드레스도 입고 있으니 공주가 된 것 같고 언제 이런 호사를 누려보겠어요.”
입고 있는 드레스는 장식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수수한 옷인데 마리에는 진짜 공주의 옷차림을 못 봤으니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마리에! 밖에 나가봐도 돼요? 네? 네?”
그때 이내 몸을 돌린 하랑은 꽤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이렇게 아름답게 눈이 쌓였는데 나가서 뛰어놀지 않으면 손해라고 생각했다.
마리에는 하랑의 질문에 눈매가 살짝 굳어졌지만 순수하게 자신에게 허락을 구하는 그녀의 모습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폐하께서 오늘 하루는 이 방에서 지내기를 원하셨습니다.”
“음.”
마리에의 말에 하랑은 턱 아래를 검지로 톡톡 두들기며 몇 초 정도 고민하는 척하다가,
“제가 나가면 마리에가 곤란해지나요?”
“그렇습니다.”
“그럼 마리에가 곤란해지지도 않고 저도 즐겁게 놀 방법은 한 가지네요.”
“무슨 방법입니까?”
“내가 몰래 나갔다 올게요! 마리에는 내가 여기에 쭉 있었다고 말하면 돼요. 우리 둘만 비밀로 하면 문제 될 것이 없잖아요?”
뜬금없는 제안을 내밀었다.
페하의 사람인 걸 알면서 본 지 얼마 되지 않은 자신과 비밀이라니. 마리에는 제법 당황스러웠다.
물론 그녀는 표정을 드러나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안됩니다.”
“30분만.”
“.......”
“그럼 20분! 더 이상은 나도 양보 못 해요.”
자신이 내보내 주지 않으면 그만인데 하랑 본인이 양보 못 한다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녀의 간절한 눈빛에 마리에는 작게 한숨을 쉬며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쓰! 마리에, 고마워요!”
하랑의 갑작스러운 포옹에 내내 표정이 없던 그녀의 눈동자가 커졌다.
***
사각사각.
침묵의 공기 안에서 종이 위에 펜이 써지는 소리만이 유일했다.
소리마저도 단정하고 흐트러짐이 없어 펜의 주인이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경들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입니까.”
긴 테이블의 끝에 앉아있는 샤를은 눈을 아래로 둔 채 물었다.
“신의 기사를 폐하의 기사로 임명하는 것이 어떨는지요.”
순간, 펜의 움직임과 함께 공기의 흐름이 일순간 멈추었다.
7원로와 귀족들이 모인 이 자리에서 얼어붙은 공기를 만들어낸 이에게 모두 시선이 쏠렸다.
용기있게 샤를과 눈을 마주치고 있었지만,
펜대가 천천히 내려지면서 탁자와의 마찰음이 날카롭게 울리자마자 질문을 한 이는 자신의 말을 깨닫고 샤를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샤를은 이 공간의 공기보다 더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제가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하지만 이래서는 황권을 공고히 하실 수 없습니다. 신의 기사는 그 이름만으로도 백성들에게는 영웅이자 수호자입니다. 폐하께서 그의 명망을 더 잘 아실 거라 생각.......”
그는 턱을 괸 채 미소 지으며 듣고 있었지만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에 상대방은 눈치를 살피었다.
“계속하십시오.”
샤를이 너그럽게 권했다.
“그, 그리하면 제국의 군사권력까지 끌어모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신의 기사를 전하의 수중에 둔다면 흩어졌던 옛 기사들이 모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자를 신의 기사라 함에는 조금 어폐가 있군요.”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샤를의 말에 숨을 삼켰다.
“무, 무슨 말씀이신지?”
“신의 기사라는 칭호는 오래전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지금 신과 계약을 한 것이 아닌 그저 기사일 뿐이지요. 그런 자를 나의 기사로 둔다. 그것은 있을 수 없지요.”
“저도 폐하의 의견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그때 샤를과 조금 떨어진 자리에 있는 자가 입을 열었다.
깔끔하고 단정한 인상을 가진 바르만 디 포르메 후작.
제국의 개혁을 위해 샤를과 함께 한 자였다.
샤를에게는 그가 루카스 다음으로 신뢰가 깊었다.
“한때 신을 섬기는 기사였던 자가 신이 죽을 때 무얼 하였습니까? 아무것도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바르만의 말에 동조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물론 주군을 지키지 못한 그의 죄는 물어야 마땅합니다만, 지금은 황위를 굳건히 해야 할 시기가 아닙니까. 신의 기사만 한 좋은 거리가 있습니까?”
“그렇지요. 하지만 그런 자에게 폐하의 안위를 맡길 수는 없지 않습니까?”
서로 다른 의견들이 충돌하는 가운데 샤를은 이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폐하.”
무미건조하게 그들을 보고 있던 샤를이 조용히 입을 떼는 바르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곧 제국의 건국일이 아닙니까? 그때 이(異)세계에서 온 신을 내보이신다면 제국의 힘을 더욱 굳건하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아직 신이라는 것도 증명되질 않은 상태입니다.”
“맞습니다. 게다가 인간입니다. 제국의 백성들이 인간을 신으로 섬기겠습니까, 아니 그렇습니까?”
충돌에 토론의 또다시 방향이 흩어졌다.
시끄러워진 분위기 속에서 샤를의 바로 옆에 앉아 있던 루카스가 큰기침을 내자 시끌벅적했던 좌중이 조용해졌다.
“크흠. 폐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루카스의 물음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샤를을 향했다.
그의 입술이 천천히 떨어졌다.
“간단한 일을 왜들 이리 어렵게 만드는지 모르겠습니다.”
샤를은 웃으며 말했다.
“바르만 후작의 말대로 돌아오는 건국일에 인간 신을 내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가 신으로서 붉은 장미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