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언문주 대 언문주
임금 이유는 요즈음, 몸과 마음이 편하게 안정되었다.
문둥병으로 손발톱이 빠져 나가는 고통 속에서 언제나 무엇엔가 쫓기고 불안한 인생이었다.
끔찍한 왕의 인생에 후회만이 가득하던 삶.
죽은 조카, 죽은 아우 용이, 먼저 가신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향이 형, ......
그래도 지난 창경궁 전투에서 작은 꼬마 계집아이가 불러낸 동하군 동휘의 영혼과 다시 재회했던 일은 그런 불안함을 덜어주었다.
이젠 편해지시라는 단 한마디가 마법의 주문처럼 이유의 인생에 불안을 없애주었다.
물론 그 한 마디로 모든 죄가 사해질리는 없었다.
‘나의 죗값을 정당히 치러야겠지.....’
지장보살이 되어 지옥의 죄인들에게 물 한 모금을 나눠주는 동생 안평대군의 물을 얻어먹겠구나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마음만은 편하게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다만 한 가지, 창경궁에서 자신에게 원망과 증오를 품고 노려보던 청년의 눈이 마음에 걸렸다.
‘그 아이가..... 중광이와 지솔의 아들이라고 했었지..... 내게 그런 한을 품고 있다니..... 그럴 만도 하지만......’
이유는 창경궁이 침범당한 그날, 자신에게 극을 겨눈 그 청년을 다시 생각했다.
자신이 뿌린 한의 씨앗이 꽃을 피우고 거대한 고목이 되어 자신에게 그늘을 드리운 상황에 비로소 이유는 책임감을 느낄 줄 아는 익은 인간이 되어 있었다.
‘항현이, 축귀검이 그 아이를 다시 돌려 세워 주면 좋겠는데...... 더 이상은 업이 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자신이 얻은 안정된 마음 한 조각이 다른 이에게도, 반드시 그 청년에게도 전해졌으면 하는 마음에 이유는 창문에 휘영청 밝은 달을 보며 그의 인생에서 얼마 있지 않았던 진심을 다해 항현에게 기원했다.
‘항현, 부탁한다. 그 아이를........ 부디......’
임금 이유는 항현의 활약만을 기대하며 손등에 진물이 흐르는 손톱없는 주먹을 꼭 쥐었다.
----------------------------------------------
눈앞이 새까맣다.
진짜 죽는다는 게 이런 걸까?
이미 지장보살을 두 번이나 만났던 항현이었지만 지금의 상황은 전혀 경험한 적이 없는 새로운 상황이었다.
아무 것도 보이는 게 없다.
오로지 몸 안에 날뛰는 불의 뱀, 그 궤적 만이 고통으로 느껴질 뿐, 다른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온몸에 불이 가득하다.
메마른 뜨거움에 몸이 한점, 한점 뜯겨져 태워지는 느낌이었다.
그 때, 손으로 한 줌, 포근한 따스함이 전해졌다.
그리운 느낌.
오른 손을 꼭 잡아주는 다른 이의 손, 그 손이 오른 손에 다른 것도 쥐어주었다.
익숙한 서늘함이 전해져 왔다.
몸 안에 불뱀을 가르고 헤치며 자신에게 전달된 상쾌함에 항현은 모든 감각이 차단된 중에도 그믐밤의 반딧불 마냥 홀로 어둠을 가르는 한줄기 시원함이 느껴졌다.
‘사인참사검! 너로구나! 그리고 너를 내게 쥐어준 이 고운 손은......’
한 줄기 상쾌함에 머리가 다시 생각할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결국 힘으로 누르려면 내 몸이란 그릇이 이 압력을 버티지 못한다. 이 억센 힘의 불이 내 몸을 파괴하려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 주향선표의 송화밀삼차는 내게 해 끼친 적이 없지 않은가? 믿자! 믿어보자!’
항현은 몸 안의 불꽃을 힘으로 억누르지 않았다.
불의 뱀이 몸 안을 마음대로 휘 젓도록 붙잡고 있던 내공력을 풀어 놓았다.
‘믿자! 믿어보자! 주향선표와 송화밀삼차는 내게 해를 입히지 않는다!’
불꽃이 중곡혈을 출발하여 기해혈을 지나 거궐혈을 뚫고 전중혈로 흘렀다.
고통이 전혀 덜함없이 기맥을 뚫고 지나가자 항현은 진땀을 뻘뻘 흘리며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나는 해를 입고 있지 않다! 나는....... 나는....... 나는.......’
전중혈을 지난 불의 뱀이 염천혈을 지나며 임맥이 뜨거워 졌을 때 항현은 뭔가 불가사의한 확신을 할 수 있었다.
‘......나는 ......나는 ......나는 ...... 강해지고 있다! 강해지고 있다!’
열기가 독맥을 훍고 지나 백회혈에 내려 앉았다.
전신 임맥 양독이 불꽃으로 가득해졌을 때 항현의 입에서 기합이 터졌다.
“흐ㅡㅡㅡ합ㅡㅡㅡㅡㅡ!!!!!!!!”
고통에 굴복한 죽음의 비명인가? 고통을 굴복시킨 용기의 함성인가?
대답은 오른 손으로 오른 손을 서로 쥐고 있던 수빈이 제일 먼저 알았다.
억센 듯, 사려깊게 자신의 손을 끌어안아 주는 아귀힘.
살아난 남자의 입술에서 메마른 부름이 흘러나왔다.
“.......수빈 아가씨........”
“항현 나으리!”
은씨 일족과 움막 안에 사람들의 눈이 항현에게 몰렸다.
손을 잡은 그대로 항현이 일어나려 하자 움막 안의 사람들 모두가 놀랐다.
“..... 수빈 아가씨..... 저는......”
“일어나실 수 있으시겠어요? 항현 나으리?”
항현이 더듬거리며 일어나 두 발로 서며 선언하듯 수빈의 걱정에 대답했다.
“....... 저는 ....... 강해졌습니다.”
그대로 머리에 감긴 붕대를 풀어 내리자 이미 총을 맞은 상처에는 새살이 돋아나 있었고 초췌하던 얼굴에 홍조가 감돌았다.
“수빈 아가씨, 저는 강해졌습니다~!”
항현의 다시 한 번, 반복된 확언에 수빈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드디어 모든 항현이 수빈에게로 온전히 돌아온 것이다.
--------------------------------------------
아침이 밝아왔다.
북청성은 이시애의 지휘 아래 공성방어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성벽 위로 돌과 화살을 날라다 쌓아 놓고 방어군에 배치결정을 내려 각각의 방어 지대를 설정해 주었다.
막막히 공포에 떨던 병사들은 그 정도만으로 답답함을 덜고 해볼만하다는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
“해명 도령은 정문에 계시다가 기이수들을 조종하시어 적을 쳐부숴 주시오~! 부탁드리리다~!”
이시애의 풀죽은 말투, 좋게 말하자면 겸손한 말투에 해명은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해명은 원래 일이 좋게 풀리지 않을 것 같으면 다 버리고 자신의 사람들과 반란군을 이탈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해명이 설정한 도저히 돌릴 수 없도록 상황이 패배로 돌아선 시점에서 벌써 한참 지나 있었다. 그런데도 지금 해명은 북청성에 남았다.
‘뭐....... 도망이야 언제든지 할 수 있으니까......’
해명은 속으로 스스로에게 변명을 하면서 처음으로 성 안의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얼굴마다 굳은 표정이었지만 서로 눈이 마주칠 때면 반드시라도 좋을 만큼 미소를 억지로 만들어서라도 웃었다.
아마도 강대한 적과의 일전에 서로 무너지지 않기 위한 버팀목이 되기 위해서 미소를 만드는 것이리라.
사람 인자가 사람 둘이 서로 기대고 있는 모습이라는 이야기가 성내의 분위기에서 확실히 느껴졌다.
지난날의 해명이라면 이런 약자간의 의지에 콧방귀도 안 뀌었겠지만 지금은 약간의 흥미가 생겼다.
‘인간은 결국 이리 살아야하나? 나도, 건암님도, 종희 누나랑 해운이도...... 물론 서로 의지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만일 조금 더 일찍 내가 이렇게 낯선 이들을 의지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면 비합님도 죽지 않았을까?’
해명은 북청성의 정문에서 밖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을 때 뒤에서 한 어린 병사가 주먹밥과 약간의 절인 채소들을 작은 옹기쟁반에 담아 와 해명을 불렀다.
“저기 도령~.....”
“!”
“이거...... 아침 드시우......”
해명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어린 병사는 낯을 가리는지 그 옆에 쟁반을 놓고는 바로 뒷걸음질을 쳤다.
해명이 그 모습을 보며 잠시 생각하다가 겨우 경우에 맞는 말을 찾았다.
“고맙소~!”
“.....?.....”
어린 병사가 살짝 놀라 잠시 해명을 바라보다가 바로 고개를 숙여 답례를 한 후, 뒤로 돌아 뛰어 갔다.
해명이 그 뒷모습을 보며 미소를 짓고는 주먹밥 하나를 집어 씹기 시작했다.
시간이 벌써 진시의 중간(진시: 아침 7~9시, 그 중간이니 아침 8시) 쯤을 지나고 있을 때, 갑자기 날이 어둑어둑 구름이 끼며 태양을 가리기 시작했다.
해명은 하늘을 갑자기 뒤 덮은 이 구름이 여느 구름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적이다~! 적이 몰려 온다~!”
성벽 위에서 누구의 소리인지 모를 외마디 경고성이 비명처럼 들렸다.
바로 이어서 건암과 종희도 해명이 있는 성문루로 올라 왔다.
“도련님, 이 먹구름은 보통 구름이 아닙니다!”
“저 쪽도 난힘자들이 있으니까요..... 별스런 일은 아니지요.....”
종희의 말에 해명은 언제나처럼 살그머니 미소를 띤 얼굴로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걱정마세요. 일단 상대가 뭔가 짓꺼리를 하기 전에 우리의 힘을 먼저 과시하죠. 건암님, 우리가 가진 나모가비, 귀갱시, 창귀호를 풀어 일단 적의 선봉을 꺽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도련님!”
뒤이어 이시애의 장교단이 문루로 우루루 올라왔다.
“해명 도령! 갑자기 날이 흐려지고 경군들이 접근하는 데 이건 적의 작전인건가?”
이시애의 질문에 해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안심시키기 위한 말을 해주었다.
“그래서 저희가 가진 힘으로 적의 예봉을 흩으려고 합니다. 성벽의 각 부대들을 동요하지 않도록 잘 관리해 주십시오.”
“알겠네~!”
일단 해명이 기이수를 출전시켜 서전을 벌인다니 이시애나 장교들은 동북면 군사들이 상하지는 않을 거라는 데에 안심이 되었다.
해명이 다시 한 번 건암에게 눈짓을 하자 건암은 품속에서 나무로 된 호드기를 꺼내 불었다.
인간이 듣지 못하는 소리에 귀물들만이 듣고 반응을 했다.
성벽 밑에서 두 길(길: 조선시대 단위 약 1.8~3미터 정도로 두길이면 5~6미터) 가까이 되는 나무가 뿌리를 다리삼아, 가지를 팔 삼아 흙을 헤치며 일어났다.
나모가비는 북청성의 정문으로 걸어 가 우뚝 서서 큰 포효를 질렀다.
“크오오오오오~~~~~~~”
나모가비가 일어나 웅장한 전모를 들어내자 성문루에 있는 이시애와 그 휘하 장교들이 크게 환호를 질렀다.
“이야아아아~~~~!!!!”
“이거라면 누가 우리를 이길까?”
“덤벼보라 이거야 한양 경군놈들아~!”
기세를 올리는 장교들의 환호 속에서 해명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적의 병사들이 대오를 조금도 흩트리지 않고 방패를 모으고 방어진을 견고히 유지하고 있는 점이었다.
‘결국, 이 정도의 기이묘사는 더 이상 신기하지도 않다는 건가? 그러나 그리 모여 있어봐야 나모가비를 인력으로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해명이 의아하게 생각할 때, 병사들이 방패를 세워 견고히 유지하던 중앙의 진이 둘로 나뉘며 길을 내었다. 그리고 그 길에서 해명의 것과 마찬가지로 뿌리를 다리 삼아, 가지를 팔 삼아 또 다른 나모가비가 일어났다.
“크워어어어어어~~~~~”
“!”
문루의 해명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상황을 살펴보았다.
보고 또 보고 다시 한 번, 고쳐 봐도 분명히 상대의 진영에서도 나모가비가 걸어 나왔다.
그 뒤로 둘로 갈라져 적이 진중에 연 길에 말도 아니고 전차도 아닌 4인 평교자에 사람 하나가 실려 천천히 앞으로 나왔다.
해명은 그 모습에 나모가비보다도 더 크게 놀랐다.
그는 해명이 잘 아는 사람이었다.
일찍이 저 먼 토번과 몽골에서부터 바다 건너 왜의 땅까지 두루 거치며 타국의 주술을 연구했고 그것을 기반으로 삼아, 훈민정음을 도구로 삼아 해동 조선의 독자 주술을 연구하던 사람이었다.
해명에게 아주 까마득한 연장자로 늘 가르침을 많이 주던 어른이었고, 얼마 전에 자신의 눈앞에서 비사문천의 번개를 맞고 죽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비합 거사님~!”
해명의 탄식같은 부름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비합은 네 병사가 받쳐 든 평교자 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양 손가락을 겹치고 꼬와 주술의 인을 맺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