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빈과 해명의 누워있는 항현의 머리맡과 발끝에 각각 앉아서 한 마디도 안하고 있었다.
해명은 살짝살짝 수빈의 곁눈질로 쳐다보았지만 수빈의 눈길은 항현의 얼굴에만 꽂혀 있었다.
해명이 그런 수빈을 실망스런 눈빛으로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나 쳐다보지 마요!”
수빈이 눈길도 주지 않고 매몰차게 한 마디 했지만 해명은 되려 기뻤다.
곁눈으로나마 자신을 보고는 있었다는 사실에 실망감이 한 순간에 녹아내렸다.
“....저..... 항현님이 왜 좋으십니까?”
“!.....”
수빈은 눈길도 돌리지 않았지만 미간이 확 좁여지며 노기가 뿜어지는 것이 해명도 후끈, 느껴졌다.
“무슨 헛소리에요!”
수빈이 살아 온 인생에 두 번이 없을 앙칼진 어조로 해명에게 면박을 주어버렸다. 그러나 해명은 밀리지 않았다.
“항현님은 조정의 벼슬을 받고 그 체제 안에서 우리 난힘자들의 자리를 매김하시려던 것이었지요. 저는 현 조정의 도덕적 흠결을 단죄하고 조정을 다시 세워 우리 자리를 공고히 하려고 했고요....... 아시죠.....”
“그게 얼마나 많은 피를 보는 일이 될 줄 알아요.....?”
“뭔 상관이에요. 우리 피가 아닌데...... 결국 자기 앞가림으로 인생을 사는 거 아니에요? 역사란 그 앞가림의 모음인 거고......?”
태연히 끔찍한 소리를 하는 해명의 소리에 수빈은 불쾌한 듯, 얼굴을 찌푸리며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정말...... 더러운 저질.......”
해명이 지지 않고 맞 받았는 데 어조가 구걸하는 듯한 사정조였다.
“이건 당연한 거예요! 그럼 지금의 임금은 내가 왕이 되려면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 하는 데, 그냥 내가 하지 말자하고 왜 생각 안 했대요? 결국 큰일해서 큰 인간이 되려면 피는 꼭 흘리는 거예요! 그걸 넘어서서 그 자, 이유는 왕이 된 거고요ㅡ!”
“궤변이에요!”
수빈이 사납게 쏘아보며 앙칼지게 쏘아 붙이자 해명이 되려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수빈이 자신을 돌아봐 주었다는 기쁨에서였다. 비록 사납게 째려보는 눈길이긴 했지만 해명은 그 눈빛이 자신의 눈동자에 담기는 것만으로도 기쁘기 한량없었다.
그 눈길을 좀 더 자신에게 묶어 놓고 싶어서 해명은 말을 계속 이어갔다.
“말만으론 궤변일 수 있지만! 현실을 봐요! 남을 숱하게 죽이고 남의 재산 빼앗는 짐승들은 지금 귀하신 몸이 되어 남들 머리 위에서 거드름을 피우고 살잖아요?”
“모든 인생은 댓가를 받게 되어있어요!”
“그럼 지금! 우리 손으로 댓가를 치러주고 우리가 그 놈들만큼 귀해진 다음에 그 댓가를 우리가 나중에 받자구요. 순서만 좀 바꾸는 건데 무슨 상관이에요? 그렇게 많은 죄를 진 놈들, 죽인들 무슨 상관이에요.”
“..... 귀를 씻고 싶네요.....”
수빈이 더는 못 들어 주겠다는 듯, 다시 눈을 항현의 얼굴로 돌리자 갑자기 해명의 눈빛이 사금파리처럼 예리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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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녕 진심이시옵니까?......”
항현이 재차 물었지만 안평대군은 굳은 얼굴로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항현은 함부로 대답을 못하고 잠시 표정이 굳어 있다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주 짧은 시간 미동도 않고 가만히 서있었다.
과연, 이미 죽은 항현에게 조국이란, 임금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수빈도 마찬가지, 이미 삶이 다 한 지금 한 때 아내로 맞고 싶었던 여인이란 또 무엇인가?
내 앞의 보살은 정욕의 대상으로써 여인이란 똥이 가득 찬 가죽자루에 불과하다고까지 하지 않는가?
그런 둘 사이에서 고민하는 나는 또 무언가?
죽은 후에도 결론을 얻지 못하는,
나란 존재는?
나란 이유는?
나란 의문은?
“..........”
잠시 후, 항현은 감았던 눈을 다시 뜨고 군더더기 없는 말투로 시원하게 대답했다.
고민이 끝나고 답을 얻은, 상쾌한 미소마저 머금고.......
“저는 무조건 둘 다 구합니다~!”
안평대군이 실망한 얼굴로 한 마디 하려는 데 항현이 먼저 대답을 치고 들어갔다.
“질문의 의미는.....”
“질문의 의미는 수오지심(본성에 따르는 절대 진리)이실 것입니다!”
안평대군이 다시 입을 다물고 흥미롭다는 듯한 눈으로 항현을 바라봤다.
“어느 사람의 목숨이 더 높고 어느 사람의 목숨이 더 낮으오리까? 임금의 목숨이 중하고 여인의 목숨은 경하겠습니까? 결국 이 문제를 둘중 하나를 택하는 시비의 문제로 끌고 갈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오로지 수오로만 판단해야 합니다. 결과를 셈하기에 앞서 반드시 옳은 방법으로만 판단해야 하는 겁니다. 이미 제게 뜻 없는 물음이오나 다시 물으신데도 제 답은 이것뿐입니다!”
안평대군의 표정이 가만히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항현만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고 항현도 가만히 안평대군만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안평대군은 판단했다.
항현의 표정을 이루는 부드러운 미소는 더는 정답을 소유하기 위해 방황하지 않을 수 있는 자만이 갖는 깨달은 자의 미소라는 것을......
안평대군은 별안간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푸핫하하하~~~~~~”
한참 웃더니 안평대군은 눈물마저 찔금거렸다.
“멍청하군~ 자넨 정말...... 바보야~ 바보~ 허허허허~~~~”
안평대군이 가까스로 웃음소리 사이사이로 항현은 타박하는 듯, 하는 얘기를 떠벌이자 항현은 얼굴이 빨개졌다.
“소인이 모자라 이 것 밖에는 결론을 낼 수가 없습니다. 많이 실망하셨습니까?”
“하하하하~~~ 실망은, 이 바보같은 사람아~! 허허허허~~~~”
웃으며 호흡을 조절하던 안평대군의 숨이 그제야 조금 잔잔해졌다. 그리고는 항현을 보며 말했다.
“그래, 자네 말대로일세. 사람들은 수오의 마음을 따르지 못할 때, 수오의 마음을 따르지 않을 때, 시비의 마음을 거론하며 더 나쁜 무언가를 피하게 위해 할 수 없이 차선책을 선택했노라 핑계를 대곤 하지. 사람의 목숨을 뺏고도 더 많은 이들을 지키기 위해라는 둥, 더 높고 중한 이를 위해서 할 수 없이 라는 둥......”
“.......”
웃던 호흡이 잦아들며, 차츰 차분해지는 말투로 안평대군은 어쩌면 스스로의 죽음과도 연관이 있을 말을 늘어놓았다.
항현도 그 저간의 사정을 알다보니 함부로 말을 섞지 않았다.
“그러나! 수오지심으로 판단할 문제를 함부로 중함과 경함, 최선과 차선 따위로 시비지심으로 재단하는 것이야 말로 혀로 눈을 찌르는 일이니......”
“.......”
“수오로만 바라봐야하는 일을 언제나 수오지심으로만 바라보는 것! 시비에 자신의 리(理)를 적당히 섞어 넣어 편한 대로 수오의 축을 바꿔 생각하지 않는, 아니! 바꿔 생각하지 못하는 바보! 그게 자네야ㅡ!”
“.......”
항현이 안평대군의 말을 차분히 듣고 있었다.
바보라 책망하는 말 같기도 하고, 칭찬하는 것 같기도 하고,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한 안평대군의 두서없는 외침에 항현은 섣불리 대꾸를 하지 않았다.
안평대군이 만족한 샛노란 미소를 함박, 얼굴에 담고 말했다.
“...... 내가 사람을 잘못보지 않았으니...... 그대 가시게~!”
“...... 극락으로 말입니까?”
모든 것을 포기한 항현이 묻자 안평대군이 대꾸해주었다.
“깊게 믿고 사모하는 여인이 있는 곳이니 그대에겐 사바가 극락이지~ 허허허.....”
“.....예?.....”
항현이 설마하는 마음으로 묻는 순간, 하얀 공간이 밝은 회색을 지나 어두운 회색으로, 그리고 곧, 짙은 어둠으로 변해갔다.
동시에 안평대군의 모습도 흐릿하게 사라져갔다.
모습이 사라지며 도리어 크고 선명한 안평대군의 목소리만이 항현의 귓가를 때렸다.
“그대의 본성이 천성과 닿아있고, 그대의 합리가 천리와 일치되니 자신을 믿고 사시게~! 그대의 떳떳함을 믿으시게나~!”
“대군마마~!”
항현이 어둠 속에서 흐릿해지는 안평대군을 불러보았지만 귓가에 호방한 웃음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대군마마ㅡ!”
“하하하하하하하하하!~~~~~~~~~잘 가시게!~~~~~~~~~~~ 다시 보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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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막 안, 수빈이 뒤쪽 벽으로 재빨리 물러났다.
“무슨 짓이에요ㅡ!”
눈빛이 험악하고 호흡이 거칠어진 해명이 수빈과의 거리를 좁히고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난힘이나 적에 대한 미움이 아닌, 인간이란 동물의 암컷으로서 본능적으로 갖고 있는, 수컷에 대한 두려움이 수빈을 감쌌다.
“무엇 때문에 저 사람 뿐인 겁니까? 왜 나는 아니지요?”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을 던지며 해명이 수빈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가까이 오지 말아요ㅡ!”
더욱 날카로워진 수빈의 소리가 움막에 울렸다. 그러나 산자락의 거센 바람소리에 막혀 움막 밖으로는 멀리 뻗지 못했다.
“저 사람을 봐요ㅡ! 이젠 저 사람은 살지 못해ㅡ! 끝난 사람이에요.....”
“닥치지 못해ㅡ!”
냉혹하게 지적하는 해명의 말!
다시 눈물이 그렁거리며 수빈이 해명의 말을 부정하기 위해 악을 썼다. 그러나 해명은 수빈을 꺽기 위해 이야기를 멈추지 않고 던졌다.
“우리 같은 난힘자, 나 같은 역적자식, 당신 같은 칠반천역, 모두 고개 쳐들고 살도록, 우리 얕보고 천대했던 놈들이 고개, 땅바닥에 쳐 박고 살도록 내가 해 주겠소ㅡ!”
“난 그런 걸 원하는 게 아니에요ㅡ!”
“어차피 세상은 둘 중 하나요ㅡ! 우리가 고개를 들면 저쪽은 숙이고 저쪽이 고개를 쳐들면 우리가 숙여야하고...... 다른 예, 의, 충, 정을 얘기하는 자들 또한 우리를 숙이도록 술책을 쓰는 것에 불과해요ㅡ!”
공포와 슬픔으로 범벅이 된 수빈의 눈에 진심을 드러낸 해명이 무서운 짐승으로 보였다.
“결국, 우리가 떳떳이 사는 것이 최선이고 상대를 숙이게 하는 것이 최선이며 숙이지 않는 자는......”
수빈이 움막의 벽을 타고 문 쪽으로 움직였다.
무조건 밖으로 나가려는 수빈의 손목을 해명이 날쌔게 잡아챘다.
“앗ㅡ!”
“......베어 버릴 뿐ㅡ! 보기 좋은 최선은 아니라도 반드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차선은 되는 방법입니다ㅡ!”
수빈이 겁에 질렸다.
스스로 선택한 도취와 흥분에 해명의 눈이 괴상한 빛을 뿜고 있었다.
사내의 억센 손에 손목을 붙들린 수빈을 해명은 다시 있던 움막의 벽으로 밀어 부쳤다.
해명이 서서히 수빈에게 가까이 얼굴을 들이 밀었다.
“내가 세상을 손에 넣어 가장 높은 곳에 당신의 자리를 만들어 드리겠어요...... 수빈님~!”
“안돼~! 저리가~!”
수빈과 해명의 얼굴이 서로의 호흡을 삼킬 수 있을 만큼 가까워 졌다.
해명의 숨결에 습한 단내가 수빈을 더더욱 무섭게 만들었다.
“내가 하겠소~! 반드시 당신은 저 높은 자리에~!”
“이 손 놔요ㅡ! 안돼ㅡ! 저리가ㅡ! 항현님~!”
수빈의 필사적인 비명에 손목을 쥐고 있던 해명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수빈이 있는 힘껏 뿌리치고는 알았다.
해명이 자신이 크게 소리를 쳐서 손목을 놓아준 것이 아니라는 걸.
해명은 자신의 뒷목에 겨울 한기를 잔뜩 머금은, 차갑고 예리한 무언가가 와 닿는 것을 느꼈다.
분명히 칼이었다.
‘이 움막에는 나와 수빈님, 그리고 시신이 한 구....... 아니, 분명히 시신이라고 생각했던 그 사람 하나.......’
해명이 고개를 뒤로 돌리는 순간, 수빈의 입에서 반가움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항현님ㅡㅡㅡㅡㅡㅡㅡ!!!!!!”
항현이 머리에 붕대를 감은 채로 우뚝 서서 사인참사검으로 해명의 뒷통수를 겨누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