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째 표정이 밝지 않구만? 자네?”
“예.... 옛....!”
항현이 무표정한 얼굴로 멍하니 있다가 안평대군이 말하자 퍼뜩,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
“극락에 간다는데도 무슨 곡절로 그리 멍하게 계시는 가? 자네?”
“..... 예? 곡절이라뇨.....”
안평대군이 빙긋이 웃으며 항현에게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극락도 주저할 만큼 그대의 정신을 사바에 잡아 두는 것이 무엇인고? 여자인가?”
“......”
항현이 짖궂게 던진 안평대군의 질문에 답을 못하고 입을 한일자로 다물어 버렸다. 그러나 연장자의 원숙함은 그런 항현의 반응만으로도 대답을 얻어냈다.
“여자구만..... 여인이란 자고로 남자를 늘 붙잡는 존재이니..... 허허허..... 아주 예쁜가?”
“.....예.....”
약간 자신없는 소리로 대답한 항현에게 안평대군이 껄껄대며 놀리듯 이야기를 이어갔다.
“허허허허~ 예쁘다고 생각하니 예쁜 것이지~ 부처님께서는 그저 여인이란 똥이 가득 찬 가죽주머니라고만 생각하시라고 하시었다네~! 깨달음에 방해만 된다는 게지! 허허허허..... 어떤가? 자네의 정욕으로 눈이 흐려진 결과라고는 생각지 않으시는가?”
“......그건.......”
항현이 안평대군의 말에 잠깐 당황했지만 곧 정색을 하며 진지하게 대답하였다.
“전 그 사람을 정욕으로 대하질 않았습니다. 그저 제가 가진 꿈에 강한 지지를 해주었고 저도 그런 그 사람이 고마워서.....”
“그러니까 혼인같은 건 생각 없다?”
“.....아니..... 해달라면 할 수도 있습니다만.....”
항현이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대꾸를 하자 안평대군이 웃는 낯으로 대뜸 소리를 높혔다.
“이 사람아! 남자가 여자에게 살아달라고 매달려야지! 여자가 매달려 오길 바래? 꿈도 크구만.....! 자네 얼굴이 못 난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까지 잘 생긴 것도 아닐세~! 허허허......”
“.......”
안평대군이 장난스레 퉁을 놓자 항현은 얼굴이 벌개져서 대꾸를 못했다.
“해달라면 할수 있다”, 다시 잘 생각해 보고선 어이없을 만큼 오만한 말이란 걸 깨닫자 항현이 갑자기 부끄러움을 느끼고 고개를 아래로 떨궜다.
안평대군이 계속 킬킬대며 말을 이어갔다.
“아무튼 깊이 믿는 사람이란 거구만..... 그렇지?”
“.......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한 항현에게 안평대군이 빙긋이 웃다가 표정을 멈추고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깊이 사모..... 아니, 믿는 사람이라니 내가 다시 하나 물어보세. 만일......”
“.......”
이 양반이 또 무슨 짓궂은 질문으로 사람을 놀릴려고 그러시나하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안평대군을 돌아보자 얼굴에 웃음기가 가신 것이 눈에 들어왔다.
“자네의 깊이 믿는다는 그 사람과 지금의 금상중, 하나만 살릴 수 있다면 누구를 살리시겠는가?”
“!......”
굳은 안평대군의 얼굴처럼 질문을 들은 항현도 얼굴이 돌처럼 굳어졌다.
벌겋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진심이십니까?......”
항현이 낮게 묻자 안평대군은 의외로 엄한 표정으로 말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
수빈은 여전히 무릎을 가지런히 모으고 누워있는 항현을 바라보며 구석에 앉아 있었다.
발갛게 충혈된 눈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 항현에게만 꽂혀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움막 안으로 들어왔다.
가운데 피워놓은 모닥불이 바람에 어지러히 흔들렸다.
찬바람에 한기를 느낀 수빈은 들어온 사람에게 귀찮다는 듯, 한마디 던지며 돌아보지도 않았다.
“......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있다 갈께요...... 지금은 항현님과 있고 싶어요......”
“.......”
눈물에 눈이 부어서 잘 안 보였는 지, 들어온 사람이 그저 검지나 엄지, 은씨 일족의 누구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어두운 움막의 침침한 조명도 수빈이 사람을 못 알아보는 데에 한몫했다.
“수빈님~”
‘!...... 누구지....? 엄지님이 아니야.......’
목소리가 조금 다르다.
수빈은 엄지의 목소리가 아닌 굵은 남자의 목소리에 약간 당황했다. 그러면서도 이 남자의 목소리가 낯설지가 않은 것도 이상했다.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주는 기묘한 위화감.
‘...... 이 목소리는....... 바로.....!!!’
수빈이 일어나며 눈을 부볐다. 그리고 확실히 상대를 확인했다.
해명이 눈 앞에 보이자 수빈은 경악과 분노에 휩싸였다.
“당신! 해명!”
“수빈님, 다시 뵙습니다.”
“어째서 당신이 이곳에......!!!”
해명을 본 수빈은 다시 두 주먹을 꼭 쥐었다.
분한 마음에 눈에서는 더 뜨거운 눈물이 또 다시 방울방울 맺혔다.
“이...... 이....... 당신......”
“앉으시죠. 전 손에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습니다. 빈손이에요. 그냥...... 항현님을 보러 온 거예요.”
“당신이...... 뭘 봐요. 항현님이 이렇게 된 걸...... 또 무슨 해꼬지라도 하려고......”
해명이 항현의 발치에 앉으며 말을 건네자, 수빈은 호흡이 거칠어지며 벌떡 일어났다.
지친 몸이 끝도 없는 분노로 채워지자 말도 중언부언, 제대로 끝맺는 말이 없었다.
시큰덕대는 수빈의 충혈된 눈을 가만히 쳐다보며 해명이 말을 이어갔다.
“제가요? 해꼬지라뇨? 제가 뭘요....?”
“........!”
수빈이 담담하게 대꾸하는 해명의 말에 되려 말문이 막혔다.
해명의 대꾸가 수빈의 앞을 막듯, 이어졌다.
“항현님을 저격했던 불총은 제 뒤에서 날아왔잖아요? 솔직히 저도 놀란 일입니다. 그 조준선 위에는 수빈님이 있었어요. 항현님이 수빈님을 위해 기꺼이 몸을 던진 거고 수빈님 대신 맞은 거죠.”
“!.......”
“또한, 이후에 빨리 저희에게라도 도움을 청하셨다면 지금 같은 꼬.....ㄹ, 아니, 모습은 되지 않으셨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수빈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
수빈도 스스로를 자책하던 부분을 해명이 찌르자 말문이 막혔다.
“비사문천을 몸에 깃들게 하여 우리를 죽이고자 하시며 그대로 오랜 시간 비바람에 항현님을 방치하셨죠. 이렇게 된 것도...... 결국 항현님이 이렇게 된 원인도 수빈님이고 이렇게 된 과정도 수빈님이죠. 근데 제가 뭘요?”
“.....당신이.....! 당신이.....! 그 더러운 역적질만 아니었어도......!”
수빈이 억지를 쓰자 해명도 억지로 받았다.
“그렇게 따지면 지금 임금이란 작자가 조카 왕위를 안 뺏았으면! 내 이모부가 우리 어머니를 죽이지 않았다면!”
“........”
해명이 언성을 높여 받자 수빈이 대꾸를 못했다.
그러자 해명이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언문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언문주도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그럼, 우리 가족은...... 끝도 없는 이야기예요......”
“........”
수빈은 해명의 눈에도 한 방울 맑은 눈물이 맺혀지는 것을 보았다.
서로 더는 대화가 없어졌다.
수빈은 시큰대며 해명이 앉은 반대쪽, 항현의 머리 쪽에 앉았다.
항현의 얼굴을 가까이서 본 수빈이 다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고, 해명은 그 모습을 슬픈 눈으로 쳐다보았다.
---------------------------------------------
준모와 남이, 그리고 이천 유격대는 그 주변을 뒤지며 다녔다.
동산 하나가 아스러진 것으로 봐서는 분명히 무슨 일이 있어도 있었는데, 비바람에 흔적이 씻겨진 것인지 추적이 용이하지 않았다.
“대장님, 이젠 우리도 포기하고 본대를 따라 이동해야 합니다! 이대로 북청 지역에 우리만 있다 보면 결국 포위되어 토벌되는 것은 우립니다!”
남이가 부하장교의 고언을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으나 특별히 대답은 하지 않았다.
전략적으로 특별하지 않은 합리적이고 평범한 의견이었다.
물론 남이도 충분히 아는 내용이었고......
남이로서는 구하고자 하는 대상이 분명히 있었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무리한 움직임을 감내하고 있던 차였다.
‘수빈 처자는 대체 어디 있는가? 누군가 다른 사람들이 있었던 것인가? 이 부근에 있지 않고 이미 구출되어 어디론가 옮겨진 것인가? 포로를 교환한다고 했는데 그럼 항현은 어디로 간 건가? 둘 다 뭔가 해를 입은 것인가?’
여러 의문이 교차하는 가운데 정보는 너무 엉성하고 양도 많지 않았다.
병사들도 불과 이천, 수색을 위해 회산을 중심으로 적은 병사를 마구 풀어 놓은 것도 상당히 위험하다면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만 해야 하나......’
상황을 종료해야하는가에 고심하는 남이의 귀를 한 병사의 외침이 때렸다.
“여기 사람이 있습니다~!”
남이와 준모가 소리가 나는 쪽으로 부리나케 뛰어갔다.
남이는 병사들이 안아 일으키는 사람을 보고 실망했다.
자신이 찾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녀리면서 강인함이 함께 공존하는 투명하리만큼 하얀 피부를 가진 보석같은 두 눈을 가진, 복숭아 꽃같은 입술의 여인이 아니었다.
머리는 벗겨지고 꾀죄죄한 차림에 쥐처럼 얇은 수염이 난, 왠 노승이었다.
이건 뭐야란 느낌이었다.
“아직 숨은 붙어 있느냐?”
“예~! 그러나 아주 약합니다!”
“그럼 막사로 옮겨 비를 피하게 하고 곡을 조금 끊여 먹여 몸을 데우게 하라, 묻기라도 해봐야 하니.......”
“예~!”
실망한 남이가 뒤로 돌아 섰다가 흠칫 놀랐다.
준모가 여의주를 잃어버린 용처럼 눈에 불을 켜고 화를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 자...... 자네.....무슨 일인가?”
“비합거사~! 저 자가! 여기 왜!”
남이가 준모의 눈길을 따라 가자 그 곳에는 방금 찾은 노승이 있었다.
용의 숨결같은 눈빛이 그 노승에세 꽂혀 있었고 준모는 험악한 어조로 그 사람의 이름을 불러댔다.
남이의 유격대에 구출한 인물은 바로 비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