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사람은 허름하기가 마치 폐가같은 한 암자에서 나왔다.
산의 북면에 바위 계곡사이에 처막혀 있는 것이 제대로 된 부처님을 모시는 사원은 아니었다.
“저주를 비는 절이지요. 이 곳 동북면에는 이런 곡중암자가 제법 됩니다. 비밀리로 부처님을 뫼시고 내 한을 풀어 주십사하는......”
“이런 절이 산의 곳곳에 있다고?”
항현의 되물음에 해명이 항현을 바라보며 대답을 해주었다.
“지금 조정의 계유년 피바람을 시작으로 억울하게 숨져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지..... 그리 화를 입은 사람들의 한을 푸는 데는 왜 이리 금강산을 많이 이용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곳의 대부분은 모두 이유나 황창성, 현영휘등 정난 주체들에게 해를 입은 자들의 가족, 혈족들이 맞습니다.”
“......”
해명이 담담하게 이야기하자 항현은 자신이 나온 폐허의 암자 안을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다 녹은 초와 무슨 글자인지도 모르도록 엉망이 되어있는 번져버린 부적, 동물의 피, 뼈........ 그리고 그 뒤에 음산하게 서있는 하얀 연폭소병......
‘여기에는 얼마나 많은 한이 서렸을 고......’
“가십시다~! 회산봉우리의 우릴 기다리는 아가씨가 목이 빠지겠소이다~!”
항현의 비감한 상념의 베일을 비합이 냅다 찢고 들어왔다.
“빨리 가십시다!”
“가시지요.”
“......”
항현이 저주의 자리를 보며 슬픔에 빠진 것을 비합과 해명은 동시에 보았다. 그러나 행동은 서로 정반대로 달랐다.
해명은 항현의 슬픈 얼굴에서 자신의 인생도 이해해줄 수 있는 여유와 공감을 느꼈다면 비합은 타협이 안 되는 고집쟁이, 단순하게만 생각하는 맑은 소년의 얼굴을 보았다.
재촉하는 비합의 짜증은 용서조차 자신들의 작은 어둠에서 둘만이 만족하는 방법을 쓰지 않고 공의에 입각해 처신하려는 항현이 거슬렸기 때문이었다.
어찌 보면 비합의 불쾌함은 절대정의, 공의의 마음인 수오의 마음을 지켜가며 타인의 아픔을 자기 것 마냥 느끼는 측은의 마음 또한 얻고 있는 항현의 성장에 비합 자신은 결코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인간적 질시이기도 했다.
“빨리 가시지요! 날이 밝겠소이다~!”
비합의 재촉에 항현도 걸음에 속도를 붙였다.
떨어지지 못할 정이 있는 것도 아니니 항현은 비합이 잡아가는 길 앞을 잰 걸음으로 따라 붙었다.
세 사람이 멀어진 후 연폭소병에서 한 사람이 더 나왔다.
형의 추적령을 받아 이행하고 있는 이시합이었다.
시합은 이 저주의 암자의 문을 열고 나와 이미 그 곳에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했다.
“병풍을 닫고 갔으면 그 핑계로 그 어두운 데를 안 걸어도 되는 데...... 젠장......”
벌써 다 따라와 놓고도 투덜거린다.
이시합은 마른 흙이 덮혀 있는 곳에 몇몇의 발자취가 있는 것을 쫓아, 살피고는 이내 세 사람이 간 방향을 알아냈다.
“이 쪽이면 석벽계곡...... 회산인데? 회산으로 가는 건가?”
바로 방향을 잡아 걸어 나와 잠시간 뛰듯이 빨리 걷자 이내 세 사람을 시야에 넣을 수가 있었다.
“저깄다! 역시 회산으로 가는 것이구만...... 근데 왜......?”
시합은 세 사람을 시야에 넣은 순간부터는 속도를 줄이고 대신 발소리를 줄여 앞선 자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셋을 쫓았다.
앞을 걷는 세 사람은 본래 살아있는 것, 죽은 것의 기척, 사악한 기운, 사람의 기척등을 살피는 데 매우 능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항현은 몸이 좋지 않은 것 이상으로 수빈을 보게 된다는 사실에 약간 흥분해 있었고, 해명또한 항현의 그런 모습을 보며 기분이 좋았는지 마음이 느슨해져 있었으며, 비합은 항현에게 슬그머니 건넸던 항복의사가 해명의 귀에 들어 갈까봐 조마조마하며 항현의 입만 쳐다보니 주변에 신경을 나누지를 못했다.
이시합은 운 좋게 앞의 셋이 제대로된 상태가 아닌 것을 모른 채 그저 자신의 은신추적이 아주 대단한 줄로만 알고 계속해서 세 사람을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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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이 회산봉 꼭대기에 도달한 것은 저주암자에서 나온 지 2각(약 30분) 쯤 흐른 뒤였다.
널따란 회산봉우리에 올라서자 수빈이 장옷을 산바람에 휘날리며 목련꽃잎처럼 하얗게 서있었다.
“항현 나으리~!”
거두절미, 나머지 둘은 안중에도 없다.
해명이 쓴 웃음을 짓는 가운데 항현이 뭐라 하기도 전에 수빈의 주문 영창이 나왔다.
“한울님의 강인함은 독수리의 발톱같네,
한땅님의 든든함은 큰수닭의 벼슬같네,
햇님의 따스함은 비둘기의 가슴같네,
달님의 시원함은 푸른매의 횃짓같네.
사조포란주-!”
황금빛의 새의 환영이 수빈의 손에서 나와 세 사람을 향해 날아갔다.
곧, 수빈의 손이 움직이더니 빛의 새는 하늘로 솟구쳤다.
섭섭한 해명도, 반가운 항현도, 털어 놓지 못할 근심이 많은 비합도 모두 눈이 하늘로 올라간 수빈의 포란주의 새를 쳐다보았다.
“하~앗~!”
수빈이 손을 아래로 빠르게 내리자 빛의 새가 날개를 활짝 펴며 정말로 알을 품듯 밑의 세 사람을 감쌌다.
“후와아아아아아~~~~~~!”
“오호~ 이런~”
“우와아아아아~!”
“.......”
처음 수빈의 치유 주문을 체험한 해명과 비합은 깜짝 놀랐다.
온 몸에 기의 소통이 원활함을 넘어 방금 전, 빛의 새가 품은 알에서 다시 태어난 것 같은 새로운 청량함이 온 몸을 가득 채웠다.
오랜 진중 생활에 쌓였던 피로와 잔고통도 말끔히 사라졌다.
“이런 주문이 있었다니......”
“언문주로도 가능한 지 만들어 봐야 겠군요. 호오~”
“......”
해명과 비합과 달리 항현은 아무 말도 않고 있었다.
수빈의 상태가 어째 이상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 주문이 이리 강한 주문이었던가? 힘이...... 너무 강하지 않은가.......?’
항현은 수빈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수빈의 눈.
수빈의 눈이 마치 넋을 잃은 것처럼 멍한 눈이었다.
“수빈 아가씨.”
항현이 걱정스레 말을 건네자 들었는지 수빈의 입가에 잔잔히 미소가 그려졌다. 그러나 바로 흉한 으름장이 떨어졌다.
“항현님을 제대로 돌려주지 않는다면...... 불을...... 내릴...... 것이다......”
“걱정마십시오~! 수빈님, 지금 바로......”
대답하던 해명도 이내 상황을 알아보고 말을 멈추었다.
“저........? 상태가 어째 이상한데......?”
“응?”
해명의 눈치를 본 비합도 수빈의 이상한 상태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주변 고송에 불가의 것으로 보이는 부적과 기물들의 배치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항현님을 내놓아라~! 아니면 번갯불로 태워 죽이리~!”
굵은 남자의 목소리의 흉흉한 협박이 해명과 비합의 귓전을 때렸다.
수빈의 얼굴에 붉고 턱이 각진 남자의 얼굴이 어리어 보였다.
“빙의? 빙의다! 저 처자는 스스로 신에 씌었다! 해명님! 우린 지금 저 처자가 쳐놓은 난힘주법진에 들어와 있습니다!”
비합의 말에 해명도 주변을 다시 살폈다.
이내 해명은 수빈이 어떤 것을 각오하고 준비했는지 알아보았다.
“세상에 이제 보니 제법 큰 난힘주법진이네요~! 며칠 걸렸겠는 걸....... 우리가 항현님을 걸고 싸울까봐 준비를 하고 기다리셨네요~! 비합거사님! 신에 씌였다면 어떤 신인지 알아보실 수 있겠습니까?”
“그건.........”
비합이 주변의 주법진을 살피며 아직 대답을 못하는 가운데 수빈의 몸에서 괴상한 광채가 피어오르며 초점 없는 눈이 불꽃을 내뿜었다.
세찬 바람이 회산봉 위에 넘실대며 흙먼지를 날렸다.
수빈과 세 남자의 사이에 굵은 벼락이 하나 내리 꽂혔다.
“콰~탕~!”
“항현님을 내놓지 않으면 죽음뿐이다~!”
“드립니다~! 드린다고요~!”
해명이 두 손으로 앞에 내어 사래질을 치며 수빈을 안정시키려 애를 썼다. 그리곤 고개를 돌려 항현에게 말했다.
“항현님, 작별인사도 하고 수빈님과도 이런 저런 대화도 하고 하려고 했는데......, 이거 안 되겠네요. 얼른 가셔야 겠습니다~! 저런 강한 신과의 빙의는 자칫 시행자의 목숨도 위협할 수 있어요~!”
항현도 해명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 처자는 우리가 어떤 야로라도 있을까 두려워 저런 신에게 씌어 우리를 대적하려는 것 같소이다! 어서 가시오! 무슨 신인지 몰라도 말려들기 싫소!”
돌개질치는 바람 속에서 비합이 사인검을 항현에게 건네주었다.
“자~! 가지고 가시오!”
“.......”
말없이 칼을 건네받은 항현은 수빈을 향해 걸어갔다.
이미 자신을 알아보는 지도 알 수 없었지만 항현은 사인검을 가로로 잡아 앞세우고 수빈을 향해 걸어갔다.
“항현...... 항현님을.......”
“수빈 아가씨~!”
공기를 찢는, 파공성을 내뿜는 바람을 뚫고 항현의 외침이 수빈에게 닿았다.
바람이 잦아들고 주변에 마음 없이 뿌려지던 번갯불도 차츰 멈추었다.
“수빈 아가씨~!”
“...... 항현님........?”
항현의 두 번째 외침.
수빈의 얼굴에 겹쳐져 보이는 각지고 붉은 남자의 얼굴이 사라지고 서서히 하얗고 분홍빛도는 여인의 얼굴로 돌아왔다.
“수빈 아가씨~!”
“........ 항현 나으리.......”
항현을 확인한 수빈의 얼굴이 완전히 나어린 처녀의 그것으로 변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반가운 얼굴.
활짝 웃으며 항현이 다가가자 수빈도 산봉오리에 남은 바람을 헤치듯, 일렁이며 항현에게 다가갔다.
“수빈 아가씨.”
“항현 나으리.”
해명이 먼발치에서 둘의 해후를 지켜보며 싱글거리다가 문득,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쳐들었다.
“뭔가 이상한 냄새가 나는 데....... 뭔가 타는......”
고개를 한바퀴 빙 돌려 보자 바로 냄새의 진원지가 눈에 들어왔다.
산에 흔한 고목 한그루 뒤에 빨갛게 불씨가 붙은 화승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화승이 연결된 화승총도 같이 보였다.
총구의 연장선상에는 회산봉 위에 두 남녀가 정확히 들어와 있었다.
“항현님ㅡ!”
해명이 급하게 항현을 불렀다.
해명의 다급한 외침에 항현이 뒤로 돌아 해명과 같은 것을 보았다.
흔해빠진 고목 뒤에 숨어있는 사금파리처럼 반짝이는 붉은 불씨, 그리고 총구.
“수빈님ㅡ!”
항현이 비틀대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수빈에게 몸을 날렸다.
그 등 뒤를 뒤따르듯 총성의 울림이 파도처럼 회산봉 위를 몰아쳤다.
“타ㅡㅡㅡㅡㅡ앙ㅡ!!!!!”
항현이 수빈의 품속으로 떨어졌다.
머리에서 피를 뿜으며 안기듯 수빈의 품으로 쓰러졌다.
총성에 놀란 수빈이 곧 자신의 가슴 속에 피범벅이 되어 안긴 항현의 얼굴을 잠시간 쳐다보았다.
갑작스레 바뀐 상황을 잠시 인지하지 못하다가 곧, 천둥같은 비명을 질렀다.
“안돼ㅡㅡㅡㅡㅡ!!!!!!”
바람이 다시 날뛰었다.
번개가 다시 회산봉 위에 침봉의 바늘처럼 꽂혔다.
수빈이 항현을 안고서 분노에 서슬이 시퍼랬다. 그리고 그 얼굴에 각진 턱의 붉은 얼굴의 사내의 형상이 다시 나타났다.
“아무도 도망 못간다ㅡ! 이놈들ㅡ!”
“이 진은 북방 비사문천의 부름의 주인 것 같습니다! 해명님ㅡ! 비, 바람, 번개를 마음대로 쓰는 호불 사천왕의 우두머리지요~!”
해명은 쓸데없는 비합의 늦은 보고를 듣고 눈을 잔뜩 찌푸렸다.
비합도 말을 한 후에 왜 말했는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시점엔 이미 필요 없는 답이었다.
‘젠장~!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저 놈은 대체 누구야~?!’
해명은 고개를 돌려 뒤에 화승총을 쏜 자를 쳐다보았다.
나무 뒤에 숨은 건지 아니면 도망친 건지 그 자리에 보이질 않았다.
“콰ㅡㅡㅡㅡㅡ릉ㅡ!!!!!”
“끼야아악ㅡㅡㅡ!”
수빈이 눈에 힘을 주자 한줄기 번개가 고목에 떨어지고 이어서 생뚱맞은 비명이 멀게 들렸다.
‘확인은 한 셈이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해명과 비합은 자신들의 난힘무기, 사술상우극과 사자쾌속추를 꺼내어 움켜쥐었다.
호불호법신을 몸에 씌운 수빈은 머리에서 피가 흐르는 항현을 가슴에 안고 앉아 사천왕 비사문천의 눈으로 해명과 비합을 가만히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