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빈은 회산을 오르며 이마에 땀을 손등으로 훔쳤다.
제법 높다란, 산 같은 산에 땅주인처럼 자리 잡은 산들바람이 수빈의 땀 흘리는 온 몸을 식혀 주었다.
바람을 쐬는 수빈은 진을 빠져 나오기 전에 신원 땅의 본진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했다.
사흘 전, 수빈은 회산봉이라는 곳을 이 지역 병사들에게 물어물어 알아냈다.
약속장소인 회산과 약속시간은 전음으로만 들었기 때문에 수빈만이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말릴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는데 그 생각이 맞았다.
행장을 꾸려 바로 도총사 이준에게 항현의 구출에 나서겠노라고 보고하자 구성군 이준은 펄쩍 뛰며 말렸다.
“그대가 혼자 간다면 그들을 이겨 낼 수 있겠나? 공연히 그들의 유인책에 말려들어 그대마저 잡힐 수 있네~!”
“저도 반대입니다. 수빈님이 지금 이 진을 떠나면 저희의 전력이 반감됩니다.”
유격을 지휘하던 남이도 이 때는 작전 조율을 위해 잠시 돌아와 있던 차에 이 총사군막의 전술회의에 참석하게 되었다.
“아직 저들의 기이수, 기이묘법에 대응할 방법이 총통과 화약무기 뿐이에요. 그러나 그 수량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이젠 바닥이 보이고 있고요. 수빈님은 지금 저희에게 필요하신 분입니다~!”
남이의 현실 상황 지적에 도총사인 이준이 눈살을 찌푸리며 수빈을 보고 말했다.
“여기 사자위장의 지적도 그렇고 무엇보다 구출을 나서서 얻을 분명한 결과가 셈이 안 된다는 것도 문제일세. 항현을 분명히 구출한다는 보장이 없어.”
“앞 뒤 상황을 좀 더 살핀 후에 움직이시는 게 좋겠습니다.”
옥신각신 수빈의 사정과 이준, 남이의 만류가 오고가는 가운데 북청에 나가 있던 강순이 귀환했다.
몇 시진 전에 모든 소모무기를 다 사용하여 더는 북청성을 지킬 수가 없으니 후퇴를 허락해 달라는 소식을 가지고 왔다.
이준은 확보한 북청을 버려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다가 그 생각을 바꿨다.
이 곳 신원 본진도 간밤의 적의 기이수의 습격에 이리 시달렸는데 홀로 앞서 나가 있는 5천 병사도 온전히 무사할 수는 없으리라는 계산에서였다.
‘이대로 병력을 흩어 놓았다간 각개격파 당할 수도 있다. 일단 병을 모아 뒤로 나와야 해......’
이준이 전령에게 후퇴를 허락한다는 지시를 구두로 전달하고 전령을 다시 보냈다. 그러나 북청의 상황은 이준이 생각하는 것 만큼 나쁘지는 않았다.
북청의 강순은 이미 총통의 탄환을 모두 소진하고 항현도 성벽 밑으로 떨어진 후, 화살마저 다 떨어진 상황에서 퇴각을 심각하게 고려 중이었다.
‘허나,....... 이미 사면이 다 포위되어 있는 데........ 어찌 한다...... 어느 방향을 뚫는단 말인가......?’
강순이 속만 끊이며 주변상황을 살필 때 반대쪽, 적진에서 한 사람이 말을 타고 뛰어 나왔다.
“그 곳의 지휘장이 뉘시오~!”
“......”
총공격전 의례히 하는 최후 통첩이다싶어서 최대한 시간을 끌고자 답을 안했더니 갑자기 말을 탄 상대가 하마하여 무릎을 꿇었다.
“보시오~! 난 지금 함길도 의군을 이끄는 이시애란 사람이올시다~!”
“?”
강순이 성벽 뒤에서 그 모습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무슨 수작인가? 항복을 무릎꿇고 권유하는 건가? 희롱인가?’
강순이 의아한 눈으로 몸을 감추고 무릎꿇은 자를 계속 바라보았다.
그자는 곧 큰소리로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나 이시애는 이 나라의 충신이올습니다~! 조정이 혼란하여 맑은 기운이 없어 이런 변경마저도 안돈치가 않으니 분한 마음에 이리 몸을 일으켰습니다~! 지휘하시는 상장께오선 이리 나오소서~!”
강순이 가만히 들으니 뭔가 다른 셈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제와 명분을 들먹이는 것도 말이 안 되고 상장인 자신을 불러 이리 하소연을 하는 것도 말이 안 된다.
강순을 고개를 들어 먼발치를 바라보았다.
‘으....응....? 그 걸어 다니는 나무들이 없다.....? 요괴들이 사라졌구나~!’
이제야 강순은 상대가 저 자세로 나오는 이유를 깨달았다.
저들의 중요 전력이던 기이수(奇異獸)들의 부대가 사라지자 인간끼리의 힘대 힘 대결에 자신이 없어진 것이다.
계산이 선 그제야 강순이 모습을 들어내며 목청을 높혔다.
“충의의 군사라면 마땅히 그 세를 물리고 조정의 명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이시애가 무릎을 꿇고 있다가 성안의 소리를 듣고는 벌떡 일어냤다.
“안에 누구시오~! 이야기 좀 합시다~!”
“나는 북청성을 맡고 있는 도총관 강순이다~! 이 성을 범하려는 것은 나라의 대명을 거역하는 것임을 알라~!”
이새애가 일어나 강순을 보며 말하기 시작했다.
“조정의 맑은 기운이 없어 내 나라 내 민족을 이끌고자 일어섰을 뿐, 나는 추호도 역심이 없소이다~!”
“우리도 진압이라하나 이 나라의 백성을 죽이는 일을 즐겨서 하겠느냐~! 조용히 물러간다면 더는 쫓지 않으리라~!”
“......”
강순이 추적을 않겠다 말하자 이시애는 곧 타고 온 말에 올랐다. 그리고는 더는 말을 섞지 않고 자신의 본진으로 도망쳐 버렸다.
북청성 안의 강순도 급했다.
‘지금 저들이 군사를 물리면 바로 우리도 빠져 나가야한다. 우리는 지금 화살까지 모두 소진했으니 잘못해서 요괴들을 다시 몰고 들이닥치면 이번에야말로 끝장난다.’
다만 강순은 전진, 후퇴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주장이 아니라 제 일선을 맡은 선봉장이었다.
‘일단 준비만을 갖추고 신원으로 전령을 보내야해, 그러자면 갈 때 두 시진, 올 때 두 시진, 잘못하면 명을 받고도 이 자리에서 운신을 못 할 수도 있어.......’
강순은 경험에서 나온 요령을 부렸다.
이시애의 반란군이 후퇴한 후, 바로 전령을 신원의 본진으로 달리게 하고는 북청의 경비를 맡을 일부를 남기고 나머지 병사 전부를 성 밖으로 출동시켜 한 시진 정도를 전진했다.
‘북청성 사수 명령이 내려지면 다시 돌아가 죽으면 되고...... 후퇴명령이 떨어지면 지금 전진하여 아낀 거리가 요긴한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전령이 세시진 정도 후에 후퇴명령을 가지고 돌아왔다.
강순은 북청 성으로 전령을 보내 바로 북청성을 버리도록 조치한 후 병대를 이끌고 신원의 이준이 있는 본진으로 귀환했다.
데리고 간 일만 병력에서 일천 정도의 사망과 이천 정도의 부상으로 칠천 여명 만이 멀쩡히 귀환할 수 있었다.
전 병력 1만 에서 이천이 부상병이니 이들을 보조하는 데 최하 4천에서 최고 6천이니 6천에서 8천은 이미 전투 가용 불능 병력이었다.
이천의 전투병력만이 확실한 전력이었다.
이들 만으로는 전투가 가능할 수가 없으니 거의 전멸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전술적으로 정확한 판단이었고 후퇴는 정확한 판단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귀환 후, 벌써 어두워진 이른 밤에 사령부에 복귀 보고를 하기 위해 총사군막에 들고는 수빈과 이준, 남이의 신경전을 보았다.
“도총사~! 북청에서의 공방으로 이천 정도의 전상자가 나왔소이다. 지금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귀환하였소이다!”
“선배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여기 새타니 처자는 어찌 여기에......”
강순은 지금 총사군막의 갈등을 듣고는 살짝 놀랐다.
“아니....... 온교위의 포로를 데리고 왔다고? 북청에서 성 밑으로 떨어진 사람을 벌써 신원 땅에 데리고 왔다고?”
“상대에게는 연폭소병이라는 물리적 거리를 좁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분명히 그걸 썼을 겁니다....... 성 밑으로..... 떨어져요.....? 누가요? 항현님이요?”
수빈이 차분히 대답을 하다가 갑자기 화들짝 놀라 강순을 바라보았다.
강순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쳐다보는 수빈을 보며 말했다.
“전투중 전사야, 상시로 일어나는 일이지......, 온항현 교위는 많이 아깝긴 했지만......, 항현이 죽은 줄로만 알았는데...... 포로로 이 곳에 왔다는 말인가? 살아 있는 건 확인하셨는가?”
“성 벽에서...... 떨어지셨단 말입니까.......?”
“아니...... 온교위가 성벽 아래로...... 떨어졌다고요.....? 아까 그건...... 그럼.....? 죽은 시체.......?”
강순과 수빈의 이야기에 끼어든 이준이 수빈의 타들어가는 가슴에 또 기름을 부었다. 그리고 그 말을 받아 남이가 거들었다.
“저들은 시체를 움직이는 사술을 쓰는 자들이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얘기입니다.”
“....... 그렇지 않아요...... 그럴 리가.......”
수빈이 눈에 눈물을 그렁거리며 남이의 말을 부정했다.
목소리마저 가늘게 떨리며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수빈이었다.
강순이면 몰라도 이준과 남이는 수빈을 좋아하는 마음이 조금씩 싹트는 중이었다.
그 탓이었을까?
두 사내는 항현이 죽었을 가능성에 꽤 많은 무게를 두며 수빈에 대한 설득을 이어갔다.
“일단 가시는 것은 우리가 먼저 앞을 닦아 놓은 후 새타니께서 움직이시는 것이 좋을 듯하오!”
“예~! 일단 온교위의 생사를 확실히 확인한 후, 주변탐망도 보다 증강하여 안전을 확보해야합니다.”
“......”
수빈이 더는 대답을 못하고 총사군막에서 눈물만을 글썽이고 있었다.
“일단은 자기 막사로 물러나 계시게...... 자네를 항현이 ”살아있다면“ 구하기 가장 용이한 위치로 배치하겠네. 약속하지. 살아 있다면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으이......”
“.......”
울먹이는 수빈은 강순의 권유에 대답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 숙여 목례만 까닥거린 후에 총사군막을 빠져 나왔다.
항현의 생사를 남 일처럼 얘기하는 지휘장들의 이야기에 더는 말해 봐야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교위라면 정 5품의 교위라면 낮은 직책은 아니었지만 총병력 3만의 이준의 휘하에는 오십 여명 정도 있는 중간 장교중 하나에 불과했다.
수빈도 지난 남이의 즉결처분을 본 후로 군이란 조직의 묘한 냉정함에 눈을 뜨고 있었다.
더 이상은 항현의 생사를 저들에게 맡기면 안 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다음 날, 세 남자는 전술적 필요와 자그마한 연정 때문에 곁에 있어 주었으면 하는 여인이 자기의 막사에 없는 것을 확인했다.
“이 아가씨가 우리 남자들, 말을 들을 리가 없지.......”
남이의 자조적인 혼잣말에 이준이 그리 잘 알면서 왜 가만히 놔뒀냐는 듯이 흘겨보았고 강순은 여인 떠나간 빈 막사를 보며 피식 웃어버렸다.
더 이상 적의 기이묘사를 막을 방법이 마땅치 않은 이준은 그날 저녁, 다시 신원을 떠나 길목이 좁은 철령으로 본진을 옮겼다.
여차하면 다시 회양까지 후퇴할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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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산이 제법 높네~”
사흘 뒤가 약속이었으니 아직 이틀은 남은 셈이었다.
수빈은 보다 일찍 약속장소에 도착해야한다고 판단했다.
‘뒤를 잡으면 어떻게 휘둘릴지 몰라, 이미 잡혀있는 것도 있으니 시간만이라도 내가 먼저 잡아나가야 돼~!’
야물게 생각한 수빈은 약속장소만이라도 먼저 선점하여 항현을 구출하는 일에 보다 만전을 기하고자 했다.
지난 창귀호와의 싸움때 산을 타며 헉헉댄 후로 나름 산길을 뛰어다니며 체력을 붙였던 수빈이었지만 역시, 급 비탈의 산을 타는 것은 여전히 버거웠다.
가까스로 회산봉에 오른 수빈은 널따란 평지를 이루고 있는 회산의 봉우리를 둘러보았다.
‘몸을 숨길 데도 없고....... 뭔가 사용할 만한 지형적 이점이 하나도 없네..... ’
수빈은 포기하지 않고 주변을 찬찬히 살피며 이틀 뒤에 항현과 해명무리와의 만남을 준비했다.
낮은 구름이 높지 않은 회산 봉우리의 수빈의 곁에서 조용히 또아리를 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