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빈은 나모가비에서 채취한 인골편을 향불에 사르며 성불을 축원하고 제를 지냈다.
같이 정찰을 나가 수빈과 축귀검의 활약을 본 사람들이 그 옆에서 제를 도왔다.
이미 몇 번의 나모가비와의 전투를 직접 목도한 대부분의 병사들도 수빈을 무당이라 함부로 못하고 경외하고 무서워하며 도리어 윗사람처럼 대했다.
물론 수빈은 그런 병사들에게 함부로 오만하게 대하지 않으며 평시에는 병사들의 의료처치나 취사 등에 자기 한 손을 보태며 병사들에게 존경도 받고 있었다.
도총사인 구성군 이준은 그런 수빈을 어여삐 보았다.
군중에 여인이 있음에도 지저분한 군기위반사고가 있는 것이 아니라 군중이 안정되고 기이묘사의 전투에도 확실한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고운 여인이다.’
속에 기억 한줄 적어 놓고 있을 때, 중앙에서 이유의 연락관이 들어왔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곧 장군막으로 한 명의 건장한 사내가 들어왔다.
“어서 오시게-! 우복! 전하의 명은 예를 갖춰 받아야 하는 전교문이신가?”
“아니옵니다! 군사상의 필요에 의한 밀지이옵니다. 그냥 받으셔도 상관없는 줄 압니다!”
당당하게 딱딱 끊어지는 절제된 말투에 병마도총사인 이준이 무표정하게 고개만 까닥거렸다.
사내가 품에서 작은 서신을 하나 꺼내 건네자 이준은 그것을 받아 봉을 뜯고 안의 글을 읽었다.
잠시간 읽은 이준이 다시 고개를 들어 사내를 쳐다보았다.
“연락관의 일은 이제 승전보를 전하는 때에만 하겠다고~?”
“예~! 이젠 북청까지 진군했으니 반란군과의 교전은 시간문제이옵니다. 상대에게 더는 후퇴할 공간이 없으니까요!”
“음......”
서로 아는 군사상의 사정을 다시 한번 반복한 앞의 사내에게 도총사 구성군 이준은 심드렁하게 말을 건넸다.
“이보시게, 우복, 아니 자광, 아니...... 유 겸사복-! 자네를 어찌 부를까?”
“뭐라 칭하셔도 상관없사옵니다! 편하게 부르소서! 저를 군중에 두시고 역적들을 토벌하는 작은 칼로나마 써주소서-!”
“........”
구성군 이준은 왕족으로 태어난 사람이었다.
세종대왕의 넷째 아들이신 임영대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세종대왕의 손자였다.
날 때부터 귀한 신분이었지만 아랫사람들을 대하는 데 후덕하고 함부로 오만하지 않아 무신으로 조정출사를 할 때도 그를 경계하는 사람이 그다지 없었다.
다만, 무신으로 일했던 그의 지난 몇 년이 세상사를 신분이라는 관념에서 벗어나 능력이라는 현실을 직시하도록 했었다.
성리학의 관념적 신분제도가 칼을 다루고 많은 사람을 지휘하는 실질적 능력 앞에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 지 직접 체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렇게 칼을 쓰는 무의 세계에서 살다보니 거꾸로 그에게도 경계하는 종류의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능력이라는 힘으로 신분이라는 관념체계를 뛰어 넘고자 하는 이들이었다.
그런 자들은 필연적으로 혼란한 난세를 바라며 만일, 난세가 도래하지 않으면 직접 난세를 이끄는 흉한이 되기 십상이라는 것이 구성군 이준의 생각이었다.
이준의 경험상, 조직 내의 혼란과 무리수는 모두 그런 자들에게서 나왔다.
구성군 이준은 왕족이란 신분답지 않게, 군인이란 직업답지 않게, 아랫사람들에게 자상하고 그 대함이 겸손한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그런 겸손함과 상냥함이 칼의 힘과 함께 관념적 유교의 신분체계를 받치는 현실적 힘이 된다고 믿는 성리학의 보수층이기때문이었다.
그런 구성군의 눈에 지금 눈앞에 있는 사내는 영 마뜩치 않은 사람이었다.
일개 갑사의 몸으로 전쟁에 나가 공을 세우고 싶다고 상소를 올리고 임금인 이유에게 호전적 전술, 전략을 올려 아부하여 자신을 내세우고는 이제는 현장에 자신을 쓰라고 최고지휘관인 자신에게 스스로를 내세우는 사내였다.
혈통 또한 양반가의 얼자이니 가슴 속의 한이 얼마나 되는지 몰라도 사람의 목숨을 자신의 전공으로 세고 있는 속을 감추려고 들지도 않는다.
구성군 이준의 인생철학에서는 이 사내가 제법 껄끄럽고 위험한 사람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겸사복 유자광~! 어디에서 공을 세우고 싶은가? 공을 세울만한 현장이라면 북청성이나 아니면 유군으로 길주 일대를 쏘다니며 위력 수색하는 일이 있다네. 어느 쪽을 맡고 싶으신가?”
“......전......”
이준으로서는 껄끄러운 사내를 자신의 군영에서 내 보내는 게 상책이라 여겼다.
보나마나 호전적인 공격 일변도의 공적만들기에 입각하여 전략을 낼 것이고 그것은 가능하면 상대편의 병졸들을 작게 죽이고 아군의 병력손실도 적게 하려는 자신의 복안과 많이 틀릴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내 속 긁을 것이 분명한 위인을 장군막에 오래 놔둘 이유가 없지......’
“유군으로 길주 주변을 평안토록하는 일에 투입되고 싶습니다-!”
이준이 비웃듯, 싱긋 웃었다.
유자광이라고 불린 사내가 그 웃음 앞에 고개를 숙이며 얼굴을 붉혔다.
‘길주 백성의 목숨으로 공을 한껏 쌓겠다는 뜻이구만.......’
유자광은 이준의 마음속의 말을 귀로 들은 것 같았다.
천민인 어머니의 몸에서 태어나 얼자로 살아오며 힘과 독기만큼이나 잘 발달된 것이 바로 눈치였다.
상대의 작은 몸짓, 표정이 주는 작은 정보를 취합하여 상대의 속을 셈해내는 힘!
그 힘이 유자광에게 가르쳐 주었다.
자기 앞에 있는 이 젊은 지휘관은 자신을 믿지도, 좋아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이 어의(御義)을 그대로 지니시고 아침에 서진하여 나간 남이장군이나 어유소장군을 찾으시게. 도총사인 내가 명했다하시고 이유를 자세히 묻거든 그 전하의 서찰을 제시하시게나.”
“......예......”
유자광이 그대로 장군막을 나갔다.
먼발치에서 수빈도 장군막에 들어간 손님이 나서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뭔가 음습한 독기가 가득한 것을 보았다.
‘이게 무언가? 저 사람은 누구길래 이만한 사기를 흩뿌린다는 말인가?’
수빈은 이 사기가 기이묘사를 다루는 자신들의 기와는 다른 기라는 것을 알았다.
기이한 것보다도 오히려 평범한 독기였다.
평범한 사람이 세상에, 세상의 다른 누군가에게, 한과 화를 품을 때 생기는 그런 독기였다. 문제는 그 양이었다.
마치 주술사가 주문으로 모은 것처럼 평범한 독기가 온몸으로 하나 가득 채워 흘리며 다니는 모습에 수빈은 아연실색했다.
‘도대체 무슨 인생을 보냇길래 이리 독한 기운이...... 다른 기이한 귀신도 없이 오로지 자신의 마음만으로 이만한 사악함을 뿜다니......’
수빈의 눈에는 유자광의 몸에서 진검은 안개가 흘러 나오듯이 보였다.
자신을 바라보는 수빈을 본 유자광이 자신을 보는 기척을 느끼고 수빈을 쳐다보았다.
‘군영에 왠 여인인가? 날 왜 저리 쳐다보지?’
유자광은 의아하게 생각하긴 했지만, 곧 타고온 말에 다시 올라 진문을 나서 길에 깔린 행군의 흔적을 쫓아 그대로 내달려 사라졌다.
수빈이 한서린 독기를 흘리며 달려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지금 곁에 없는 두 사내의 걱정에 큰 호흡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