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한참을 걸어 항현과 만난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해명과 비합은 천천히 걸으며 숨을 돌리고 있었다.
그 틈에 비합이 해명에게 물었다.
“해명님, 아직도 그 자에게 미련이 남으셨습니까? 이 질문을 벌써 여러 번 드린 듯 합니다.”
해명이 약간 언잖은 표정으로 비합에게 퉁명스럽게 대답해 주었다.
“예, 저도 여러 번 대답해 드린 것 같아요. 또 물으시는 건가요?”
“어째서 그 자를 그리 설득하십니까? 마음을 독하게 잡수십시오.”
“마음 때문이 아니에요. 비합 거사님, 분명히 말씀드릴께요. 그 항현이란 자는 분명 강한 자에요. 제가 마음에 애정이 있어서 그런 게 결코 아니라 강한 자이기 때문에 저를 이기고 있는 거예요.”
“........”
의외로 완강하게 해명이 나오자 비합이 대꾸하질 않았다. 그러자 해명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물론 우리도 약하지는 않아요. 그러나 강적이라면 싸우지 않는 편이 좋고 우리 편이 돼준다면 더더욱 좋은 일이죠. 저는 의외로 고전 병법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중입니다.”
“.........”
여전히 비합이 대꾸를 않자 해명이 다소나마 미소를 지으며 노인을 달랬다.
“조정이 그들을 박대했으니 의외로 우리 쪽으로 쉽게 넘어올지도 모릅니다. 희망을 가져보자고요.”
“글쎄요...... 저는 우리 쪽의 힘을 모아 항현 하나만 죽여 없앴으면 합니다만......”
“뭐...... 그것도 선택 중 하나겠죠.....”
해명이 시큰둥하게 대답하자 비합도 다시 입을 다물고 북쪽으로 발길만 재촉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북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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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현 형님, 내가 한 번 살려줬어요. 기억해놔요.”
“알겠네, 원수는 반드시 갚지. 하하하.....”
불 속을 빠져 나온 항현이 웃으며 농담으로 준모의 힘에 고마움을 표했다.
수빈이 웃으며 저간의 사정을 물어보았다.
“그런데 어떻게 이리 딱 맞춰서 나타나셨어요?”
“예? 아......아하하하.....”
준모는 웃으며 그간의 일들을 털어 놓았다.
“그러니까 지난 번, 해명 일을 겨우 마무리 짓고는 되려 형님은 귀양살이를 보내고 저도 유학 권고가 내려졌거든요. 어찌나 화가 나던지......”
“흠~.....”
항현은 감정적으로 이해가 되긴 했지만 지금의 지휘관이란 위치를 생각해서 크게 맞장구치지는 않았다.
준모는 항현의 그런 소극적 반응에 아랑곳않고 자기 얘기를 이어갔다.
“화가 하도 나서 저 멸악도를 잡고 한바탕 휘둘러버릴까 생각도 하고 있었는데 아버지 말리시더라고요. 그리고 제게 얼른 이 나라를 뜨라고...... 유학길을 다시 떠나라고......”
“아버님도 잘 계신가요? 저도 금강산에 거의 쫓겨나듯 하느라 인사도 제대로 못 드리고.... ”
“저도 지금 한양에는 가보지도 못했어요. 다만 변고가 있다는 소식도 없으니 당연히 건강하시겠죠. 헤헤헤.....”
수빈은 준모의 말에 측은함을 느꼈다.
나랏일이라는 게 이리도 비열할 수 있다는 것이 화가 났다.
곁에서 듣던 항현또한 화는 났지만 더 해줄 것이 없어 그저 먼산만 보았다.
“그래서 명나라에서 사저와 회동관(명나라가 타국 사신을 접대하는 외교관아)서책들이나 보며 씨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조선 사신이 나를 찾는다고 하더라고요. 조선에서 변란이 났다고......”
“그래서 조선의 어지러움을 막아내고자 돌아오고 있던 길인가?”
항현이 추임새처럼 되묻자 준모도 신이 나서 대답했다.
“뭐, 해명이 놈이 다시 나타났다면 분명히 형님도 누나도 다시 움직이실 거라고 생각이 들더라고요.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생각이 들어서요. 그래서 사신 길인 의주대로가 아니라 중강진에서 함흥으로 내려오는 샛길을 잡아 현장으로 직접 내려왔죠. 헤헤헤.... 판단이 정확했어요. 회양에 이미 군이 주둔되어 있다는 얘기를 회동관에서 들었거든요. 내려오고 있는데 이상한 사기가 느껴져서.......헤헤헤헤......”
수빈도 항현도 해실대는 준모가 밉지 않았다.
다시 보고 싶어서 명나라에서 돌아왔다는 것도 귀엽게 느껴졌다.
수빈이 약간 슬픈 듯한 말투로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래도 고향 집에도 못가고 이렇게 현장으로 직접 오셔서 서운하진 않아요? 집에 가 보셔야죠.”
“어떤가? 일단 한양을 한번 갔다가 오는 것이.....? 아직은 도총사께서도 쾌속진군의 의향은 없으시니 시간이 좀 있을 듯 싶은데......”
항현도 한양에 다녀오라는 권유를 했지만 준모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럴거면 의주 대로를 타고 곧바로 한양부터 갔다가 서수라대로로 해서 회양으로 올라왔겠죠. 기왕 이렇게 현장으로 와서 누나, 형님을 만났으니 일을 마무리짓고 한양으로 가는 게 가장 좋을 듯 싶네요.”
준모의 말도 맞기 때문에 더는 권하지 않았다.
“일단 전투로 시간이 제법 지났구만, 노숙밖에는 방법이 없을 것 같으니 자리를 찾아보세. 여보시게들~”
“예~ 나으리~”
항현은 날이 어둑어둑해지자 병졸들을 시켜 그 날 밤, 묵을 곳을 찾도록 했다.
초여름의 날씨라 밤이 되니 되려 시원하고 쾌적하게 느껴졌다.
여남은 병졸들이 풀과 나뭇가지를 엮어 솜씨 좋게 수빈과 항현, 준모 그리고 자신들이 잘 움막 세 개를 원형으로 배치해 만들었다.
세 개의 움막이 입구를 벌린 가운데에 쑥불을 놓아 여름 해충을 쫓으며 병졸들은 잠에 빠져 들었다. 그러나 수빈과 준모는 항현의 말을 듣느라 아직 잠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왕실, 전주 이씨의 종가에 직접 귀속되는 기관을, 그러니까 비밀 기관을 만든다고요? 조정 도당에 비밀로 한 기관을?”
“그렇지, 주상 전하께서 직접 약속하신 거라네.”
준모가 팔짱을 낀 채, 눈을 돌려 쑥불이 일어나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눈을 항현에게로 돌리고는 말했다.
“이번에는 믿을 수 있는 거예요? 또 이번 반란만 어찌어찌 넘어가면 대충 또 난 유학가고 형님은 귀양가고 누나는 금강산에......”
“이번에는 내가 직접 주상전하를 배알하고 들은 얘기라네. 내수사를 통해 직접 어명을 받고 보고 또한 도당을 통하지 않는 방식일 거라고 하셨네.”
“주상전하가 내탕(임금의 왕실 자산을 운용하는 기관, 세금과 상관없이 운용된다.)으로 운영할 것을 직접 약속하셨다면 믿어도 좋지 않을까요?”
준모의 의문에 항현이 대답하고 수빈이 덧붙여 말을 보태자 준모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나 이내 다시 의문을 제기했다.
“지금 주상 전하는 몸이 많이 편찮으신 걸로 압니다. 덜컥 붕어라도 하시면 그때는 형님과 전하와의 약속은 어찌 되는 겝니까?”
“..... 거기 까지는 아직 의견을 맞춘 것이 없네...... 오래 사시길 바라는 수 밖에......”
항현의 자신없는 말에 준모와 수빈 둘 다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다 수빈이 준모에게 되물었다.
“준모씨는 왜 돌아오신거예요?”
“예?”
“준모씨를 저도 보고 싶었고 이렇게 다시 봐서 정말 기뻐요. 그러나 그 이유만으로 다시 명에서 조선으로 그 먼 길을 다시 밟아 오시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분명히 뭔가 바라시는 것이 있으시기 때문에 오신 것 아니에요?”
“그거야......”
기실 준모도 해명의 난힘에 대응을 못하고 진압군이 쩔쩔 맨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아무도 구체적으로 말해주지는 않았지만 명나라에 유학 와 있는 자기에게까지 귀국하여 도움을 줄 것을 바란다는 것은 분명히 대응이 마땅찮다는 증거였다.
‘골탕 좀 먹게 명나라에서 숨어 버릴까?’
속으로 이런 생각도 했지만 그것이 만전지계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조선 조정에 골탕을 먹이기 위해 도망자, 어명을 받들지 않은 자라는 죄명을 쓰는 것은 자기의 인생을 버리는 일이다.
결국 이번 해명이 연관된 난에 일단 공을 세워야 뭐라도 교섭의 여지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조선에는 항현과 수빈, 그리고 숨어있는 난힘자들이 있으니 그들을 다시 만나야 뭔가 미래가 열린다는 판단이 당연히 세워졌다.
‘일단 귀국하자! 귀국해서 항현 형을 만나야 뭐라도 답이 나오지......’
준모는 그런 판단으로 조선으로 온 것이었다.
무엇보다 현장으로 빨리가기 위해 서수라대로를 중간에서 질러 들어오는 지름길을 잡아 들어온 것이었다.
“그럼 일단 주상의 조건을 수락한 항현 형의 판단을 다시 믿을 게요.”
“너무 믿지는 마시게, 만일 전하께서 변이 있으시던지 다른 마음을 품는다면 달리 대응할 방법도 없다네.”
“대책없는 건 저도 마찬가지인걸요. 헤헤헤.....”
약간 자포자기적 충성거래에 한심해하는, 남과 다른 청춘 셋이 쑥불을 가만히 바라보며 떳떳하고 당당한 미래를 꿈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