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습니다! 항현님!”
낯익은 목소리, 해명의 인사에 항현이 얼굴이 굳어지며 인사를 받았다.
“오랜만이군! 어째서 또 세상을 어지럽히시는가? 해명!”
항현이 인사를 받으며 나무라듯 말하자 해명은 싱글거리며 자기 말을 이었다.
“항현님께서는 귀양살이를 가셨다고 들었는데 언제 복귀하셨습니까?! 제 말이 맞지 않습니까? 그들은 우리 난힘자들을 절대 용납하질 않아요!”
항현이 인상을 찡그리며 다른 얘기로 말 머리를 돌리려고 했다.
“넌 지난 싸움을 지고서 조용히 드러내지 않고 살고 있다고 들었는데 어찌하여 갑자기 출몰하여 조정을 다시 놀라게 하느냐!? 지난 날 주상전하의 용서를 기억하고 다시 그늘로 돌아가 자숙하거라!”
해명이 빙글빙글 웃으며 항현의 말을 다시 받았다.
“이 나라, 전주 이씨의 왕조가 얼마나 많은 죄를 삼지사방에 저질렀는지 여기 조용히 살려고 해도 내 힘을 좀 빌려달라는 자가 있지 뭡니까? 조금만 도와주려는 것 뿐입니다!”
해명이 말을 마치자 항현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비합이 호드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러자 옆에서 그르렁대던 창귀호가 매섭게 울부짖었다.
“어흥-!”
항현이 해명의 말을 받아치는 것을 포기하고 바로 주문 영창에 들어갔다.
“귀문을 지키는 영수여!
이 세상을 떠도는
가지 않는,
가지 못하는,
가야만 하는,
가여운 넋을 인도하라!......”
“카-흥---!”
창귀호가 다시 화살같이 항현을 향해 날듯이 뛰어가자, 항현의 입에서도 기합이 터졌다.
“귀인일진격-!”
“쾅-!”
칼에서 한줄기 검기가 뻗어 창귀호를 뒤로 날려 보냈다.
그 모습에 해명이 쌍철극을 양 손에 나눠쥐더니 주문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바람잃은 구름이여!
메어마른 산구릉에
검은바위 맨얼굴로
삭풍바람 맞대본다.
검은들개 긴다리로
구름위를 훔쳐보니
붉은해는 빛을잃어
핏빛달에 비키노라!”
수빈의 귀에 처음듣는 주문을 읊은 해명이 쌍철극을 자신의 옆에 겨누고 큰 기합을 주었다.
“마각견청주-!”
“캬랑-!”
해명이 주문은 소환주문이었다.
작은 폭발과 하얀 연기가 걷히더니 희한한 동물이 하나 나왔다.
광채가 나는 노란 자위에 붉은 눈동자를 가진 짐승이었는데 곱슬곱슬한 털이 길게 치렁치렁했고 다리는 말의 다리처럼 근육이 있고 길었다.
짖는 소리도 개가 짖는 소리인지 다른 짐승의 소리인지 모호한 괴상한 소리로 짖었다.
“알고 계세요? 수도 한양에는 형이 동생을 죽이고 자격없는 임금이 충신들을 죽인 수많은 역천의 죽음이 있는 것을?”
“뭐라고!?”
항현이 창귀호를 경계하면서도 해명의 새로운 소환물을 보자 그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억울한 넋들이 자꾸 쌓이다보면 하나로 뭉쳐 괴이한 짐승의 꼴을 갖추기도 하지요.”
“그래서!”
“지난 도성침범때 저희가 맨손으로 그냥 도망쳐 온 게 아니에요. 헤헤헤.....”
“그럼.......”
해명이 자신이 소환한 괴상한 짐승의 등을 살살 쓰다듬었지만 그 짐승은 계속 으르렁거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우리의 요기에 이끌린 것인지...... 왠 영기가 하나 따라오더군요.”
“그게 그거라는 거냐?”
“전 어머니, 아버지가 과거에 소격전 도류셨죠. 그리고 아버지는 그런 축귀행의 기억을 모두 다 기억하고 계셔서 제게 많이 가르쳐 주셨고요.”
“........”
항현이 함부로 대답하지 않자 해명이 그대로 말을 이어갔다.
“궁궐에는 이런 짐승이 가끔 나왔습니다. 당연히 태조 대왕은 전조 고려의 왕족들을 잔뜩 죽여 대항세력을 멸했으며 그 다음 왕인 태종은 자기 배다른 동생을 죽이고 옥좌에 앉았으니 궐마다 귀신이 들끊는 게 당연하죠.”
“그따위 망발을.....”
“소격전, 그리고 축귀검 같은 기관들이 끊임없이 생기는 이유가 바로 그겁니다. 궐에 출몰하는 이런 귀신들을 잡는 것이죠. 사실 모르셔서 그렇지 궐에서는 심심찮게 나오는 귀신이었어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
항현이 괴로운 대화를 끊기 위해 해명의 목적을 묻자 해명이 실실 웃으며 대답했다.
“달리 하고 싶은 얘기는 없습니다. 다만 이런 귀신이 들끊는 왕조에 계속 충성을 하실 건가 여쭙고 싶군요? 지금이라도 저희와 함께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항현은 길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물론 신뢰하기 힘든 부분이 없진 않았지만 항현은 자신이 걸어왔던 길, 믿어왔던 가치를 지키는 것으로 해명에게 대답했다.
“난 조건에 따라 충성하지 않는다! 물론 내 충성의 대상이 많이 더럽고 악한 면이 있는 자들이라고 생각도 한다! 허나 내가 부모를 골라 태어난 게 아니듯 충성의 대상도 내가 고르는 것이 아니다! 그저 운명인 것이다!”
“흠~ 한심하군요! 한 번 뿐인 인생을, 충성을, 그럴 가치 없는 미물들에게 낭비하신다고요?”
“운명이란 그런 것이지.......”
“잘 알았습니다!”
해명이 항현을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전, 왜 항현님을 보면 자꾸 이렇게 손을 뻗을까요? 안 오는 것을 빤히 알면서도.... 헤헤헤헤...... 왜 이런질 모르겠네요. 헤헤헤헤......”
“해명! 그만 마음 속의 복수심을 털어라! 힘든 인생을 일부러 택하지 않아도 된다!”
“......”
해명이 실실 웃으면서도 대답은 안했다. 그리고 고개를 번쩍 들더니 기합을 넣었다.
“가라-! 마각견-!”
“캬-헝---!”
앞에서 말의 다리를 가진 괴물개가 덤벼들자 수빈이 그 앞을 막아섰다.
“새는 불붙은 땅위로 비구름을 데려 온단다.
불붙은 새는 악인의 땅위를 남기지 않고 태워버린단다.
밝은 눈의 새는 한울님의 심판에 공정한 증인이 된 단다.
구름 속에 밝은 눈의 불붙은 불새야. 지금 이리 오너라.
은조화격진-!”
“펑---!”
불꽃의 새가 생전 처음보는 괴상한 짐승을 향하여 날아갔다. 그러나 짐승은 그것에 끄떡도 안했다.
“캬--------흥--------!”
개 짖는 소리도 아니고 늑대나 범의 소리도 아닌 괴상한 날카로운 소리에 병졸들이 와싹 얼었다.
“저.... 저게 무어야......”
“괴물이다..... 괴물이야...... 우리 오늘 살 수 있는가.......”
괴이수(怪異獸)가 앞에서 그르릉 대는 가운데 뒤에서 누워있던 창귀호도 일어났다.
항현과 수빈, 그리고 병졸들은 짐승들에게 앞뒤로 포위된 상태가 되어 버렸다.
“오늘은 이만! 저는 북청으로 갑니다! 따라오시겠죠? 당연히? 얘네들은 귀양살이하시느라 둔해지신 몸도 푸실 겸, 놓고 갈께요! 재미있게 노시고........! 다음에 봬요!”
“해명! 너!.........”
옆의 비합이 주문을 읊조리자 비합의 사자추에서 검은 안개가 흘러나왔다.
금새 안개가 해를 가리도록 쌓이더니 해명과 비합, 두 사람을 감쌌다. 그리고는 안개가 햇빛에 사라지자 두 사람의 모습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이젠 산 중 오솔길에는 죽어서도 움직이는 범과 그 출처를 알 수 없는 괴물과 일련의 사람 떼가 대치하고 있는 기묘한 그림이 연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