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합이 철령 계곡에 자리한 비밀 지점에서 해명을 만났다.
해명은 비합의 축귀검 재결성 소식에 필필 비웃으며 받았다.
“이 놈의 나라, 양반놈들에게는 몰염치가 미덕이니! 내가 사라지자 바로 항현님을 귀양살이로 내몰더니 이리 허겁지겁 다시 불러들여? 허허허~ ”
“어쩌시겠습니까? 바로 덮칠까요?”
한탄과 비웃음으로 너털웃음을 짓는 해명에게 비합이 앞으로의 활동 방향을 물었다.
“음.......”
“여기서 바로 공격하여 자웅을 겨루는 것도 방법이요. 끌어들여서 난중 어육을 만드는 것도 방법이고 우리 힘을 전부 모아 일대격전을 벌일 수도 있으며......”
“.......”
해명은 생각을 조금 하더니 이내 대답이 나왔다.
“일단 시간을 두고 좀 끌어들이죠?”
“역시......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하시겠습니까?”
비합이 해명의 속을 넘겨짚어 물어보자 해명이 힘없게 웃으며 읊조렸다.
“그래도 그만큼 그 쪽도 고초를 겪지 않았습니까? 마음이 달라졌을지도 모르니까.......”
“........”
비합이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다시 의견을 제시했다.
“나모가비나 귀갱시, 창귀호들이 조금 여유가 있습니다. 제가 그들을 이끌고 가 접촉을 조금 해 볼까요?”
“얼마나 되죠?”
갑자기 해명이 의욕적으로 여력의 수량을 묻자 그 생각을 눈치 챈 비합이 말릴 요량으로 되물었다.
“직접 가보시려고요? 그건......”
“그것도 여러 선택 중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뭐...... 지금 당장 뛰어 가겠다는 것은 아니고요. 헤헤헤......”
예의 소년처럼 천진하게 웃는 해명 특유의 웃음으로 대답하자 비합도 안심하는 듯 한숨을 쉬더니 순순히 수량을 일러주었다.
“지금은 나모가비가 넷, 창귀호가 일곱, 근처 산의 무덤이나 마을의 상여에서 만든 귀갱시가 50여 구 정도입니다. 모자라다 생각하시면 더 만들 수도......”
“아니오! 아니에요!”
해명이 손을 홰홰 저으며 제지시켰다.
“비합 거사님의 힘은 나중에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질 때를 생각해 남겨 두자구요. 지금은......”
해명이 말을 채 끊지 않으며 양손에 하나씩 철극을 들고는 일어났다.
해명의 고유 무기인 사술 상우극이었다.
“...... 지금은 직접 나서서 처리하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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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명의 호위를 제외하면 단 둘이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호젓한 산길을 걷고 있었다.
물론 망량, 괴물이 출몰하면 싸워 퇴치해야 하는 임무를 맡고 있기는 했지만 적어도 괴물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같이 말을 타고 산책하는 둘만의 시간이었다.
항현은 신이 났다.
본디 난힘을 가진 입장에서 괴상한 선민의식이라도 가질까봐 약간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은 항현이었다.
엄격하되 잔인하진 않은, 목표가 뚜렷한 교육을 받으며 항현은 몸가짐이나 행동거지가 늘 조심스러웠고 무게감이 있었다. 그러나 이 날은 아마도 항현의 인생 최고로 가벼운 날이었을 것이다.
“산에서 뭐하고 계셨나요?”
“다른 언문주를 만드신 것이 있으십니까?”
“어머님은 어떤 분이세요?”
그답지 않게 수다스러운 물음에 수빈이 얼떨떨했지만 곧 자신을 반가워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는 항현의 수다의 상대가 되어주었다.
깨를 볶는 듯한 둘만의 수다에 다른 병졸들이 오글댔지만 항현은 꿈같은 시간이 계속되기만 바랄 뿐이었다.
“나 참, 이거 어디 조용한 정자라도 없나?”
“그러게, 우리만 정찰로 멀리 갔다 오고 두 분은 거기서 푹 쉬셔야 겠구먼 허허허~”
“나으리~ 쉰네들이 방해하고 있는 겁니까요? 허허허~”
나이가 좀 있는 병졸들이 항현과 수빈이 들리게 약간 진한 농지거리를 해댔다.
수빈이 금새 얼굴이 빨개져서 어쩔 줄을 몰랐고 항현도 자신이 너무 경망스레 나댄 것이 부끄러워 껄껄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두 분 운우지정을 즐기신다면 저희는 가까은 마을에서 술과 음식이라도 조달을 하겠습니다요. 충성아닙니까? 허허허.....”
구체적인 단어가 나오며 농이 한층 더 진해진 그때 항현이 갑자기 자신의 칼을 뽑았다.
“스~렁~!”
“힉~!”
병졸들이 순간 선을 넘었는가 아연 긴장했다.
작전 중 상급자에게는 병졸, 부하들에 대한 즉결권이 주어진다.
사람끼리 부대끼는 상황에서 농담도 오가고 장난도 칠 수 있는 법이지만 상급자마다 개인적인 한계가 다르니 운 없는 병졸은 적은 구경도 못하고 자기 상관의 칼에 죽는 일도 허다한 것이 중세 군대였다.
병졸들은 어느 부분이 항현을 화나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무조건 용서를 빌어야 산다는 생각에 고개를 조아렸다.
“나..... 나으리..... 농이 지나쳤습니다. 화 푸십시오......”
“저희들 죽일 놈들...... 한 번만 살려주시면...... 다시는..... 어설픈 농짓거리는.....”
“내 주변으로 모이거라! 창을 꼭 쥐고 전방을 주시하라!”
“예....옛~!?”
병졸들은 그 때야 항현의 발검이 자신들에게 화가 나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고보니 말을 타고 얼굴만 수줍게 붉히던 새타니 처자도 얼굴에 웃음이 싹 사라지고 막 벼려낸 칼날같은 서늘함만이 있었다.
병들은 바로 중평세(창을 두 손으로 잡고 허리쯤에 수평으로 하여 앞을 겨누는 자세)로 기승한(말을 탄) 항현과 수빈을 중심으로 모였다.
“어흥-!”
하늘을 찢는, 말 그대로의 파공성이 귓전을 때렸다.
“히잌-! 범이다-!”
“겁먹지 마라-! 적의 요술이다! 진은 강건하게 굳혀라!”
항현과 병졸의 진 오른쪽 언덕 능선에서 창귀호가 그 모습을 들어냈다.
“크~헝~!”
“아이쿠야~! 나왔다-!”
창귀호는 항현을 한 번 노려보더니 그대로 솟구쳐 항현의 정수리를 과녁삼아 꽂혔다.
“크-앙-!”
항현이 뽑았던 사인참사검을 위로 뻗어 창귀호의 얼굴을 향해 찔렀다. 그러나 창귀호는 고양이과 동물 특유의 기동력을 발휘, 등을 둥그렇게 말더니 앞발을 연속으로 휘두르며 검을 쳐내며 항현의 얼굴을 노렸다.
항현이 말에서 뛰어 내리며 창귀호의 앞발을 피하자 창귀호는 반대편으로 뛰어내려 전투자세를 갖추고 빈틈을 노렸다. 그리고 항현의 앞에 두 사람이 나타나 외쳐 말을 걸었다.
“반갑습니다! 항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