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다시 만난 해명
수빈은 어색하게 웃고 있는 항현을 마주 보며 자신도 웃었다. 그리고 방금 전 상황이 다시 머리 속에 그렸다.
칼날을 밑으로 쥐고 어색하게 팔을 벌린 그 모습.
‘날 안으려고 하신 걸까?’
그러고보니 이상하게 어색하게 웃는 얼굴이 약간 발그레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런 상상을 해서 그런지 자신도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수빈 아가씨, 그간 어찌 지내셨습니까?”
어색한 웃음을 지우기 위해 항현이 서둘러 수빈에게 말을 건넸다.
수빈도 자신의 얼굴의 홍조를 들키지 않으려 일부러 더 과장되게 대답했다.
“사....산..... 암자에요...... 간만에 어머니랑 같이 있었죠...... 나..... 나으리는......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아....... 저는....... 그러니까.......”
두 사람은 동시에 마지막으로 나누었던 주향선표의 입맞춤이 생각났다.
벚꽃잎같던 입술을 벌려 갓 익은 딸기 같은 혀를 느꼈던 항현, 생명이 꺼지려던 순간에 몸 안으로 밀려들던 생명수를 맛본 수빈.
둘 다 멋쩍고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모를 때, 목책 너머에서 낯익은 외침이 들려왔다.
“역시! 이유는 급해지면 염치고 뭐고도 없구나? 귀양살이로 쳐박혀 있는 줄 알았더니만 다시 꺼내 쓰는 건가? 그리고 거기 관원 놈은 밸도 없는가? 나와달라하면 귀양지에서 찬밥먹다가도 허겁지겁 나오는 게냐?”
10척도 훨씬 넘어보이는 나모가비가 목책의 30여 보 정도의 거리에서 서있었다. 그리고 그 어깨에는 낯익은 노인네가 서 있었다.
비합이었다.
“저 늙은이 살아 있었군.......”
“네 놈에게 칼맞은 어깨 값을 이제야 갚겠구나!”
비합의 독설에 항현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와라! 어깨 값을 그 멀리서 받을 수는 없다! 이리와 내 목을 가져봐라!”
“흐흐흐흐........”
비합이 음침하게 웃더니 대답 하나만을 보태고 이내 사라졌다,
“급할 게 없다. 나를 쫓아 북으로 오너라...... 내가 직접 네 목을 끊어 줄테니......”
“지금 얼굴 본 김에 끊어 가시지 무얼 기다리시는 게요!”
“흐흐흐흐..... 북으로 올라오너라...... 기다리마......”
비합이 항현과 축귀검이 복귀한 것을 확인하고는 바로 사라져 버렸다.
항현도 사라진 후에야 비합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눈치 챘다.
바로 자신이 복귀하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리라....
‘아마 저 쪽도 축귀검이 해체됐던 것을 알고 있었으니 다시 조직되는 것에 신경을 쓰고 있었던 게야. 그래서 이런 정찰목적의 기습을 한 것이고......’
“정찰이군! 위력기습이라기보다는 자네들을 확인하려는 게야. 그렇지?”
항현이 뒤에서 갑자기 난 소리에 살짝 놀라 돌아보자 거기에 전립과 전복에 환도를 비껴 찬 남자가 자신에게 말하는 것을 보았다.
“난 이번 원정의 사자위장(행군지휘관) 남이라 하네, 자네 이야기를 여기 수빈 아가씨께 많이 들었다네.”
“아..... 예, 소인은......”
“깜짝 놀랐습니다! 아가씨! 놀라운 힘의 소유자셨군요?”
“예? 아..... 예..... 아니..... 별거 아닌데요..... 호호호.......”
지가 말을 걸어 놓더니 항현의 자기소개는 듣지도 않고 수빈에게로 냉큼 말을 돌린다.
항현이 공허한 눈으로 쳐다보았는데 벌써 남이는 수빈을 데리고 지휘부 유막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인사를 안 받은 건 그렇다치고 수빈을 끼고 가버리다니......
항현은 황당해서 말이 나오질 않았다.
‘저게 남의 집 감나무를.......’
당혹한 마음에 항현은 자기도 얼른 지휘부 유막으로 따라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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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 장교들은 군졸들을 지휘해 목책을 수리하고 부상병을 치료하는 등, 상황을 안정시키고 있었다.
지휘부 유막에서는 장성들의 군무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가장 연장인 일흔이 넘은 강순과 총지휘관인 서른 코앞의 구성군 이준, 평로장군 겸 병조참판 방종선, 행상호군 어유소, 행부호군 사자위장 남이 등이 있었고 수빈과 항현도 말석에 자기의 자리를 잡았다.
“새로 오신 충의교위 온항현 교위와 여기에 수빈 아가씨의 활약으로 적의 위력 정찰을 물리쳤으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오.”
“과찬이시옵니다. 군무에 도움이 되어 참으로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도총사(총사령관) 이준의 치하에 항현과 수빈이 겸양의 말로 받았다. 그러자 남이가 뭐가 그리 신났는지 도총사의 치하에 한 마디를 보탰다.
“아니오! 정말 대단했소! 수빈님의 그 불새의 주문이 없었다면 본영은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오!”
“과찬이세요......”
“허허허......”
“이 모든 것이 선대왕의 언문에서 나온 힘이란 말이오?”
약간 굵고 퉁명스러운 말투는 평로장군의 직책을 받아 원정에 나선 병조참판 방종선이었다.
병조라고는 하나 그 때 이미 이조, 예조, 병조의 당상, 당하관은 모두 문신이고 성리학자들이다보니 언문에는 어느 정도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병조참판 방종선도 이런 학자그룹의 일원이다보니 한글의 존재를 탐탁치 않아하는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방종선에게 이런 이질적 주술의 세계에 한글이 이용되는 것은 좋은 트집거리가 되었다.
“전날에 공혜공(최만리)께서 새로운 글자가 나라에 도움이 될 일이 하나도 없으니 하지 마시라 권하였는데도 세종대왕께서 억지로 만드셨으니 오늘날 이런 폐단이 나는 것이오! 어찌 이런 기이묘사가 나도록 하시어 후예들을 이리 고되게 하시는 지....... 선왕의 업적이 하늘을 찌르지만 이 일만큼은 결코 잘 하시지 못한 것 같소이다.”
그 자리에서 당장의 군무와는 동 떨어진 얘기인데다가 유학자들의 사대주의는 함부로 책망 못하는 국가 중심이념이라 그저 웃으며 넘기는 중에 수빈만이 방종선에게 한 마디 반론을 제기했다.
“글자는 말을 종이위에 잡아 주는 단순한 도구일 뿐입니다. 나무를 썰기 위해 만든 도끼로 사람을 죽이는 일이 있다고 해서 나무를 이빨로 물어뜯겠습니까? 언문이 생겨 주문이 나왔다지만 진서로 된 주문은 그보다 훨씬 많습니다. 어찌 언문주가 나타난 일을 세종대왕의 허물로 여기겠습니까?”
“뭐야-! 아니 이 무당 새타니 계집이 어디서 말대답이냐! 고얀~!”
방종선이 낯을 붉히며 언성을 높이자 항현이 불끈하였을 때, 더 큰 고함은 상석에서 뿜어졌다.
“이보오! 평로장군! 지금 이 자리에서 선왕의 허물을 논하는 것이 얼마나 참람한 일인가? 또한 이 여인과 말석의 충의교위가 아니었다면 저 괴이물들을 정리할 수 있었겠는가? 어디로 들어갈 때 마음과 나올 때의 마음이 다르다더니 그 꼴 아니오!”
도총사인 이준이 고함을 쳐 방종선의 입을 막자 가장 연장자인 강순이 조용히 한 마디 보탰다.
“선대왕의 일은 지금 알 수도 없고, 알아도 쓸데없는 일이지만 이들이 있어야 적의 미지의 힘에 대항할 수 있다는 것만은 방금 확인한 바요. 그러니 쓸데없는 분란은 만들지 맙시다. 참판대감.......”
도총사가 언성을 높이고 가장 연장인 일흔 살이 조용히 보태자 방종선은 더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도총사가 새롭게 명을 내렸다.
“그대들을 축귀검이라 부른다고 들었다! 맞는가?”
“예, 과거에 저희 난힘자들을 모아두던 기관의 이름이 맞사옵니다!”
“예........ 그러하옵니다......”
수빈은 자기 때문에 유막 안에 충돌이 난 것에 미안함 때문인지 어조가 뚝 떨어져버렸다.
도총사 이준은 그런 수빈과 항현에게 다음 명을 내렸다.
“축귀검은 이제부터 전군정찰을 맡는다! 다른 정찰과 다르게 축귀검은 적의 기이묘사에 중점을 두어 행동한다!”
“예, 명을 받들겠나이다!”
“.....받들겠나이다.....”
도총사 이준은 다음 명을 다른 모든 장수들에게 전했다.
“전위는 사자위장 남이가 맡아간다. 군의 머리이니 각별히 조심해야 할 것이다! 전군정찰 축귀검과 긴밀히 연통하도록 하라!”
“옛! 명을 받들겠나이다!”
남이에게도 임무를 맡기고는 최연장자 강순에게도 부탁의 어조로 명령을 내렸다.
“후위는 진북장군께서 맡아주십시오! 적은 지형이 익숙한 자신들의 고향에서 싸우는 것이니 유격전을 벌일 공산이 큽니다. 도총관대감을 믿겠습니다!”
“맡겨주십시오! 도총사!”
강순이 점잖고 우직하게 대답하자 이준은 다시 우렁하게 하명하였다.
“나머지는 나와 함께 중군이 된다! 각기 임무를 숙지하고 각자 맡은 군사들을 허술히 잃는 법이 없도록 하라!”
“옛! 명을 받들겠나이다!”
“진채를 뽑고 유막을 거두라! 이제부터 전진한다!”
“옛!”
이준의 명에 따라 회양에서 머물던 반란진압군은 회양을 떠나 철령고개를 넘어 함흥을 향해 북상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