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아침, 간만에 자기 집, 자기 방에서 푹 잔 항현은 다시 안방으로 가 부모님께 큰절로 이별을 고했다.
“부디 무사히 돌아오너라! 흐흐흐흑~!”
“몸을 소중히 하고 함부로 모험하지 말거라! 너는 이 나라 난힘자들의 희망이니라!”
어머니와 아버지의 격려를 듣고는 다시 군례를 올린 후 말에 올랐다.
“도련님, 떡이랑 엿이랑해서 조금 쌌습니다요.”
“똘랑아, 우리 부모님 좀 잘 모셔다오.”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도련님, 몸 성히 돌아오십시오.”
“그래......”
어린 아이였던 똘랑이가 키가 버쩍 컸다.
항현은 어른스런 똘랑이에게 부모님 부탁을 마지막으로 집에서 고개를 돌려 경복궁으로 길을 잡았다.
행여 마음 약해질세라 절대 고개를 돌아보지 않았다.
항현은 상선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강녕전 안에는 임금 이유가 이불 위에 일어나 앉아 항현을 맞이했다.
전형적인 군주를 배알하는 유교식 예로 큰절을 올리고 머리를 조아리고 엎드려 이유의 하명을 기다렸다.
일어나 앉아있는 이유는 그런 항현을 미소지으며 쳐다보고 있었다.
“얘야, 항현아~”
“하명하소서~!”
이유는 지난 해명이 부른 조카의 귀신과의 만남이후로 달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근엄함과 엄격함을 억지로 유지하던 지난날과는 다른 온화한 표정으로 신하들부터 가까이는 부리는 궁인들까지 모두 상냥하게 대하며 살았다.
자신이 직접 죽인 어린 조카의 귀신을 코가 비벼질 만큼 가까이서 다시 본 삶이란 어떤 모습일까?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경험을 한 후여서 그런지 이미 익을 대로 익은 사람이 되어 얕은 욕심 없이 그저 병의 통증도 늙음의 불편함도 넉넉히 웃음으로 받아들이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항현아~, 나를 원망하느냐?”
“........ 아니옵니다.......”
항현은 마음을 숨기는 것이 능숙한 사내가 아니었다.
자신을 원망하느냐는 임금의 말에 한참을 뜸을 들이다가 아니라 말했지만 뜸을 들이는 시간동안 다 알 수 있었다.
원망, 많이 했다는 것을.......
“허허허허...... 너도 마음을 여럿 챙기는 것을 꽤나 못하는 구나. 으허허허허.......”
“.......황송하옵니다......”
항현의 조아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미 다 보인 속, 감출래야 감출 수도 없게 되었지만 그래도 얼추 마음 한 쪽이 시원해짐을 느끼고는 있었다.
“너희의 활약으로 한양, 도성이 보존되고 나도 임금의 자리를 자킬 수 있었느니라. 내가 왜 그걸 모르겠느냐......”
“그것은 전하의 위광과 성덕이 적도들을 감화시킨 결과이옵니다. 어찌......”
“아!”
항현이 임금의 칭찬에 서둘러 사양하려하자 이유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아부 솜씨가 거짓말보다는 낫구나. 하지만 지금은 내 말을 듣거라. 네게도 중한 일이다.”
“.......”
이유의 말이 한층 진지한 어조를 띠지 항현은 긴장하고 귀를 쫑긋 세웠다.
간밤에 아비인 철호와 나누었던 얘기가 생각이 나서였다.
“내가 너희 축귀검을 중히 쓰고 동하군을 복위시켜 상왕, 왕족의 장례로 대례를 지낼 것을 조당에 명하려 했었다.”
“........”
“그 일을 영상과 우상에게 먼저 의논하였지...... 그랬더니......”
“.......”
항현이 고개를 들어 이유의 얼굴을 보았다.
군을 대면하고는 허락없이 해서는 안돼는 행동이라 그 자리 상선과 나인들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으나 곧 이유가 그들을 타일렀다.
“격 없이 하는 얘기니라. 사관도 대동 않고 비밀리에 하는 일인 것인데 작은 예법을 너무 따지지 말거라.”
그리고는 항현과 얼굴을 마주보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만일 내가 죽인 동하군을 다시 왕례로 장례를 치르면 동하군을 죽이고 나를 왕으로 모신 자기들 공신들은 뭐가 되냐는 게야.......”
“......”
“나를 옹립한 자기들 공신들을 위해 죽은 조카를 후대하는 것을 참아달라는 청이었단다. 무슨 소리인지 알겠느냐? 온사용?..... 아니 승차하여 지금은 온교위군...... 내가 승착시키고는..... 허허허.......”
이유가 메마르게 웃었지만 항현은 웃질 못했다.
두 공신들은 임금에게 지난날의 계산서를 들이댄 것이다.
우리가 모든 것을 함께 저지른 공범이란 것을 잊지 말라고 다시 일깨운 것이다.
“죽은 뒤에 무슨 지옥이 있던 그건 죽은 다음의 일이고...... 지금은 자신들이 권력을 잃을 수도 있는 정치적, 윤리적 약점을 만들지 말아달라고 내게 얘기한 거란다. 그들은 동하군의 귀신을 그리 가까이서 보았음에도 일단은 살아있는 지금의 정치판을 자신들의 것으로 온전히 남기는 것이 더 중요했던 게지.......”
“.....예......”
항현은 눈을 감으며 숨을 고르게 진정시키며 겨우 대답했다.
‘무서운 사람들, 사후에 무슨 지옥이 있든 살아 있는 지금의 권력은 지키고야 말겠다는 집요한 권력욕.......’
항현은 새삼 그들이 두려워졌다.
으스스한 기운이 이 궁궐과 한양도성의 구석구석에 모두 스며있는 것 같았다.
창귀호니, 귀갱시니 하는 것보다 영의정 현영휘가 내뿜는 사기(사악한 기운)가 더욱 독한 것 같았다.
“그들은 모든 것을 묻을 것을 내게 청했단다...... 너희들 축귀검도 모두 죽여 없애기를 원했지.....”
“그분들은 지금만을 보고 앞을 보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태어나 죽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합니까? 곧 저승에 가면 동하군도 안평대군도 모두 만나야 하실 분들이.......”
“허허허허...... 아무튼 용서는 나만 받지 않았느냐. 내게 용서할 테니 편히 살라고 말한 동하군 귀신의 말이 그들은 벼락이 치는 소리처럼 들린 게야........너는 용서받았지만 우리는 어쩌냐는 거지, 허허허허......”
“........”
항현은 씁쓸했다.
‘너 혼자 용서받았다고 혼자 도망 못 친다는 심보로 왕을 얽어매다니 참 지독한 자들이다.’
“의리라는 것이 있으니 난 결국 그 자들과 같은 지옥으로 가야하느니..... 내 업보고 순리니까......”
항현의 상념을 이유의 자조가 깨고 들어왔다.
화들짝 놀란 항현이 다시 위로를 하려는 데 이유가 다른 이야기로 항현의 말을 막았다.
“전하, 그것은......”
“너는 어찌 할 것이냐, 이미 그 자들은 너와 너희기관에 속한 자들을 모두 죽이길 원한 바가 있으며 지금 가는 북청의 일을 마친다면 다시 그런 논의가 고개를 들 것이다.”
“......”
항현은 다시 성난 기색으로 미간을 좁히자 이유는 다음 말을 이었다.
“결국...... 이 나라 모두가 너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은 없을 것이야...... 그러니......”
항현은 어젯밤 아버지 철호가 들려준 대화가 떠올랐다.
-임금이 축귀검을 조정의 기관으로 반드시 만들어 주겠다하면 이 일을 끝낸 후에 너를 죽이고 모든 일을 역사에 묻겠다는 얘기이다.
이를테면 가장 하책, 악책인 것이다.
만일 재산을 넉넉히 내려 줄테니 어딘가에 묻혀 살라고 얘기한다면 그것은 중책이다.
임금은 너와 너의 친구들을 죽일 마음은 없지만 앞으로 그 신하들, 현영휘, 황창성들이 어떻게 나오느냐를 늘 눈여겨보며 마음을 졸이며 살아야 한단다.
너와 난힘자들을 전주 이씨 종가의 기구로 만들려고 한다면 그것은 너희에게 상책이다.
이를테면 왕실 이씨 집안의 집사 택인 것이지, 그런 안이라면 무조건 받아들이거라.
조정 대신들의 견제를 피하며 이 나라의 그늘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맡아 처리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이 나라 가장 큰 가문의 그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란다.-
“......조정의 기관이 아니라 내수사(내탕, 즉 임금의 개인 재산을 관리하는 내시부 산하의 기관)의 지원을 받는 왕실직속기구이면 어떠하겠느냐? 물론 조정에는 비밀로 왕실, 전주 이씨 종가의 물밑 기관이 되는 것이다.”
철호의 말이 맞았다.
이유가 항현과 그 주변 난힘자들을 자신의 품안으로 넣어 보호하겠다는 이야기를 하자 항현은 저어기 안심했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서운한 감정도 있었다. 그래도 항현은 조정의 인정을 받아 떳떳한 관인이 되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허나, 이게 최선이지..... 다른 방법은 구할 수가 없으니......’
“싫으냐?”
항현이 정좌를 다시 바로하며 이유의 눈을 정확히 바라보며 대답했다.
“하명하오시면 받들겠습니다!”
항현의 당당한 응락에 이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일단은 연락관으로 가거라. 내가 준비한 이 서신을 지금 회양 땅에 주둔중인 토벌군의 총사 구성군 이준에게 전해야 한다.”
“예!”
“그리고 그대로 군에 편제되어 공을 세우라! 나는 이 곳에서 너희를 품을 준비를 하겠다. 알겠는가? 온 교위!”
“하명을 성심으로 받들어 뫼시겠나이다!”
항현은 서신을 가슴에 품고 큰절로 이유에게 인사한 후, 자리를 나왔다.
이유가 마지막에 덧붙인 말이 항현에게는 희망으로 다가왔다.
-너희를 품을 준비를 하겠다.-
난힘자들을 분명한 보호하겠다는 이 나라 최고 지존의 선언인 것이다.